[시리즈]만들어진 가해자: 전수조사의 함정-광주 D여고의 대형 스쿨미투, 그 후 1년 6개월 ⓷-1

이선옥 승인 2020.02.28 01:57 의견 0

8백명 넘는 학생들이 설문자가 의도한 준칙을 모두 따른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무기명 설문을 돌릴 때는 이런 가능성을 감안한 후속 조치가 마련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D여고의 교장은 진실과, 모호한 사실, 거짓이 뒤섞일 수밖에 없는 대규모 설문을 진행하면서 응답 내용이 모두 진실이라는 전제만을 두었다.

만들어진 가해자가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상정하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성폭력과 관련된 오래된 믿음이 있다.

한 페미니스트의 말을 예로 들어보자.
  •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성폭력 사건들은 여전히 피해자의 말을 무시하고, 사건을 은폐하며, 가해자는 어떤 타격도 받지 않고 끝난다.
비슷한 주장은 더 있다.
  • 피해자는 자책하지만 가해자는 잊는다.
  • 가해자는 남고 피해자는 떠난다.
  • 여성은 거짓으로 피해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 어떤 여성이 자기의 모든 것을 걸고 거짓말을 하겠는가.
성적 행위와 관련된 범죄 사건에서 여성운동가들은 이같은 공식을 반복적으로 주장해 고정시켜왔다.

오랜 세월 피해여성들의 진실을 묵살해왔다는 사회적 부채감은 성범죄에 한해서만 특별한 믿음을 법칙으로 만들었다.

성범죄 사건에서 여성의 기억은 정확하며, 여성의 말은 진실되고, 피해 여성에 대한 어떠한 의문도 2차 가해를 유발하므로 금지한다는, 바로 위와 같은 믿음에 기반한 법칙이다. 새로운 법칙은 정의로운 이들의 부채감과 공명해 각종 제도에 녹아드는 중이다.

대법원은 성인지감수성이라는 개념을 사실상 새로운 증거법칙으로 도입했다.

그 여파로 성범죄 사건의 하급심 판결들이 무죄에서 유죄로 속속 바뀌었다.

미디어는 ‘피해여성의 목소리가 증거’라며 검증 없이 미투 사건을 보도하고, 교육청은 스쿨미투 사건에서 가해자로 지목된 교사들의 진술권을 보장하지 않는다.

학생들이 적어낸 피해 사실을 검증하는 과정은 생략된 채 피해자 보호의 명분으로 교사들은 즉각 ‘분리’된다.

무죄추정의 원칙은 스쿨미투 앞에서 멈춘다.   2018년 3월 2일 JTBC 소셜라이브.

가해자도 피해자도 입증하지 못할 때 피해자의 목소리가 증거라 주장하는 기자.

(JTBC유튜브 캡처)
  경험 안에서 사실로 입증된 믿음이라 해도, 형사적 처벌이 따르는 사안에 경험칙을 근거로 삼는 일은 위험하다.

과학에 기반하지 않은 믿음은 정념에 휘둘리기 쉽고, 입증책임을 외면한 믿음은 권리행사의 오남용을 불러온다.

아마도 경험에서 기인했을 여성운동가들의 오래된 믿음은 사실에 근거한 반례들로 흔들리는 중이다. 광주 D여고에서 성폭력과 아동학대 가해자로 지목된 교사들은 자신의 온 생을 돌아보며 무엇을 잘못했는지 하루 수백 번을 자책한다.

가해지목 즉시 학교에서 쫓겨나 1년 6개월을 떠돌았으며, 학생들의 피해사실 증언 일부는 재판과정에서 거짓으로 밝혀졌다. 이처럼, 어떤 믿음은 사실과 다르다.   사소한 일도 다 써라 “저는 전수조사가 제일 문제였다고 봐요.

사소한 것까지 다 적어내게 한 뒤 이걸 근거로 성비위자라 판명했습니다.

D여고 말고는 어디에도 없는 사례였어요.

만약 전수조사 방식이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남교사 39명 중 22명이 가해자로 지목되어 형사처벌과 징계를 받고 있는)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가해자로 기소되어 재판중인 교사 B씨는 이런 방식이라면 걸려들지 않을 교사가 거의 없을 거라고 했다.

D여고의 사례를 취재하면서 나는 그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를 대상으로 사소한 일도 다 기억해서 써내게 한 후 범죄자를 색출하는 전수조사는 저인망 방식과 닮았다.

거대하고 촘촘한 그물로 가장 밑바닥의 수산물을 싸그리 걸려들게 하는 저인망 방식은 물고기가 많이 잡히는 대신 바닷속 생태계를 초토화시킨다.

필요한 물고기 외에 엉뚱하게 잡혀든 수산물은 결국 폐기처분 된다.

D여고는 저인망식 조사방식을 두 차례나 진행하면서 공정하고 합리적인 후속조치는 마련하지 않았다. 무기명 전수조사라는 방식은 이 모든 비극의 시작점이었다. “수업 시간에 갑자기 반장들이 설문지를 나눠줬어요.

‘성비위와 관련된 학생 설문조사지’였는데 솔직하게 적으라고 했어요.

처음에는 급식 설문지처럼 가볍게 생각했죠.

직접 당한 일을 쓰라고 해서 (당한 일이 없는)나는 쓰지 않았어요.”(D여고 학생 C양)
2018년 7월 23일 교장 A씨가 성비위 설문조사를 전격 시행했을 때만 해도 학생들은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간 해왔던 급식 설문처럼 가벼운 일이라 생각했다.

신고자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교장밖에 없었고, 학교 전체가 성폭력 문제에 휘말린 상황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교사들도 몰랐던 일인만큼 심각함보다는 의아함이 먼저였다. 직접 당한 일이 없는 C양은 설문지에 아무 내용도 쓰지 않았다.

하지만 8백명 넘는 학생들 모두가 직접 당한 성적 피해 사실만을 써야 한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지하지는 못했다.

이 정도 규모의 설문에서 설계자가 의도한 준칙을 모두 따른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무기명 설문을 돌릴 때는 이런 가능성을 감안한 후속 조치가 마련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D여고의 교장은 진실과, 모호한 사실, 거짓이 뒤섞일 수밖에 없는 대규모 설문을 진행하면서 응답 내용이 모두 진실이라는 전제만을 두었다.

만들어진 가해자가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상정하지 않았다.   8백명 넘는 설문조사를 분석한 단 한사람, 교장 A 1차 전교생 설문조사를 진행한 후 교장 A씨는 혼자서 8백장이 넘는 설문지를 분석해 A4용지 19장에 정리했다고 한다.

학교의 공적 체계를 가동시켰어야 하는 사안을 독단적으로 처리한 것이다.

성비위 행위를 엄격하게 판단하고 처리를 논의하는 중요한 일에 교내 성고충위원회나 다른 기구들은 가동되지 않았다.

전문가를 참여시켜 설문내용을 분석하는 시도도 없었다.

지금까지도 의문으로 남은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이다. 설문이 이루어진 이틀 후인 7월 25일, 혼자 분석한 결과를 가지고 교장 A씨는 임시부장회의를 소집했다.

그는 “7월 18일에 신고자의 제보를 받았으나 시험기간이라 즉시 경찰에 신고하지 못하고 교육청 변호사와 상담하고 고민하다가, 시험이 끝난 7월 23일(월)에 학교 자체 설문을 실시했다”고 했다.

왜 그는 신고자의 피해 사실을 즉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을까? 교장의 말처럼 신고자가 있었다면 해당 신고내용에 집중해 사실관계 확인에 들어가는 게 정상적인 진행이다.

그 후 소명의 기회를 주고 징계 절차를 밟거나 수사기관에 의뢰하는 게 통상적인 처리 과정이다.

그러나 A씨는 특정사건 처리가 아닌 전수조사를 진행했다.

그가 제보를 받았다는 사건은 설문조사에 포함되어 처리했는지, 만일 제보자가 설문조사에는 써내지 않았다면 해당 사건은 어찌 해결됐는지 알 수 없다.

그는 왜 갑자기 전수조사를 했을까? 그리고 왜 혼자만 설문결과를 분석했을까? 교장은 “교감도 배제하고 설문결과를 나 혼자 정리하면서 참담함을 느꼈다.

이 학교의 문화가 왜 이런가? 남교사들은 아무도 이번 성비위 문제에 대해 자유롭지 못하다.”고 화를 내며 교사들을 윽박질렀다.

1차 전수조사에 대해 학내 구성원들 아무도 내용을 공유받지 못했는데 사안은 갑자기 광주교육청으로 넘어갔다.

다음날인 7월 26일 목요일, 교육청에서 파견했다는 여성 10여명이 D여고에 나타났다.

장학사와 상담원들이라고 했다.

이들은 3학년 학생들부터 1:1 면담으로 전수조사를 벌이기 시작했다.

전문가의 심층 진단이 필요했다면 교장 혼자서 판단했던 설문지에 대한 분석을 다시 하거나, 문제가 된 사안들만을 추려 대응을 진행했어야 할 일이다.

왜 다시 교육청이 전수조사를 반복하는지 모른 채 면담조사가 시작됐다.

상담원들이 어떤 전문가인지도 확인하지 못했다.

그때까지도 교사들 대부분은 상황 파악을 하지 못했고 이 학교에 엄청난 일이 닥치리라는 예상 또한 하지 못했다.

사건은 점점 불합리한 방향으로 커져갔다.

  "사이가 안 좋은 선생님을 일부러 신고했다고 한 아이도 있었어요."  교육청의 1:1 면담조사는 위험한 방식으로 진행됐다.

당시 3학년에 재학 중이던 C양이 증언하는 그 날의 풍경이다. “학교에서는 설명을 듣지 못했어요.

면담 조사는 한 반 단위로 움직였는데 반 전체가 이동해 빈 교실에서 기다리다가 한 명씩 자기 차례가 되면 들어갔어요.

교육청에서 나온 직원이라는 남자 두 명이 대기하는 학생들에게 미투 때문에 면담하는 거라고 하면서 빨리빨리 하라고 했어요.

대기하던 중에 기억을 서로 공유하면서 같이 쓴 아이들도 있고, 명단을 학생들끼리 만들기도 했어요.

사이가 안 좋은 선생님을 일부러 신고했다고 한 아이도 있었어요.

대부분 10분도 안 돼서 끝났어요.

시간 없으니 빨리빨리 하라고 재촉했어요.”
첫날 벌인 1:1 면담조사는 3학년 전체도 끝내지 못했다.

교육청은 다음날인 7월 27일 금요일, 조사원을 20명으로 늘려 3학년의 남은 4개반과 1,2학년 17개반 전수조사를 마쳤다.

1:1 전문가 면담조사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불과 4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1차 설문 결과 피해 학생이 다수 나타났다는 교장의 말대로라면 이해할 수 없는 대처다. 교장의 말처럼 아이들의 상황이 참담한 수준이었다면 어느 때보다 신중하고 사려 깊게 후속 조치를 취했어야 한다.

모두 줄을 세워두고 10분 이내의 시간에 불쾌한 경험을 적어내라는 면담 조사에는 합리적인 해결 의지도, 전문가적 소양이 발휘될 기회도, 교육적 효과도 기대할 수 없었다.

다음 순서의 아이가 기다리고 빨리빨리 재촉을 당하는 불안정한 상황에서 신중하고 정확한 답변이 나오기는 어렵다.

C양의 증언처럼 오히려 아이들의 충동적인 담합이나 불순한 동기가 반영될 수 있는 방식이었다. D여고의 전수조사는 형식 뿐 아니라 내용도 문제였다.(⓷-2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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