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단상

생활상의 일을 해결하느라 연령대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됐다. 그러면서 느끼는 게 늙음이란 정말 인간에게 형벌이라는 것. 노인은 외모, 신체능력, 협동이 필요한 일 등 모든 면에서 호감을 주지 못하는 존재가 된다. 불가항력이다. 나름 노인에게 관대하려고 노력하지만 내 일과 맞물리면 호의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게 된다.

노인은 우선 두뇌회전이 느리고 의사소통이 어렵다. 필요한 신식 장비가 없거나 다룰줄 모른다. 합리적이고 기능적인 해결책보다는 자신의 경험을 과신하고, 아집이나 상대방의 선의에 기대어 해결하려고 든다.

장부에 침을 묻혀 넘기면서 상황 파악을 하는 장년노인과 일처리를 하다가, 휴대폰으로 재고를 바로 파악하고, 장비를 들고 다니며 의뢰인의 궁금증을 현장에서 즉각 처리하는 젊은이를 만나니 다시는 노인과 일하기 싫어진다.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라고 박범신은 말했지만 벌은 벌일 뿐 어찌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젊은이라고 해서 일머리가 다 같은 것도 아니다. 착하고 어리버리한 젊은이를 만나 효율성 없이 장황한 설명을 듣느라 지친 차에, 다소 깍쟁이 같은데 일을 엄청 빠릿하게 하는 젊은이를 보니 사람 좋은 것보다는 일처리를 제대로 해주는 게 낫다. 빠릿한 사람을 다시 찾게 된다.

머리의 좋고 나쁨도 내가 선택할 수 없는 벌과 같다. 머리가 좋으면 좋겠지만 뛰어난 사람은 어차피 소수고 노력에도 한계가 있다. 같은 업종에서도 일머리 좋은사람이 성공할 수밖에 없다.

의사가 머리가 좋아야 하느냐, 인성이 먼저냐 같은 말은 유의미한 논쟁으로 보이지 않는다. 중요한 건 머리좋은 소수에게 돌아가는 보상의 수준보다,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다수의 사람들이 어지간히 먹고살수 있는 사회가 되는 데에 치중하면 좋겠다. 일머리가 다소 떨어지는 젊은이도, 생산성이 한참 떨어지는 노인도 그럭저럭 먹고살수 있으면서, 뛰어난 사람은 능력과 성과에 맞게 보상을 가져가는 사회. 평범한 수준으로 생활을 영위하고, 늙은 후의 삶에 공포를 느끼지 않을 정도의 세상이면 좋겠다.

아둥바둥 타고난 한계 이상의 벽을 넘으려다 좌절하고, 부모를 원망하고, 동료시민을 증오하고 저주하는 지금같은 사회는 상한선에 대한 제한보다 하한선에 대한 보완이 필요하다.
심상정의 살찐 고양이법같은 발상에 동의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