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성(性)정치가 불러온 반문명적 퇴행들

프라이버시 장벽의 붕괴와 남성에 대한 인종주의적 혐오의 생산

sex에서 gender

오늘날 페미니즘은 젠더폭력, 젠더권력, 젠더정치, 젠더플루이드 등의 용어를 자주 사용한다. 사회에서 규정한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별을 해체하고, 인간을 생물학적 성(sex)으로 구분하는 제도와 관습에 저항한다는 의미이다.

페미니즘은 생물학적 성(sex)에서 사회적 성(gender)으로 여성이라는 개념의 위치를 이전시키는 데 주력했다. 고유한 여성성, 남성성이란 없으며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것은 모두 정치적인 것이고, 꼴리는 건 본능이지만 만지는 건 권력이라는 여성운동의 구호들도 사회적 성의 개념을 뒷받침한다.

젠더라는 개념은 얼핏 듣기에 여성과 남성이라는 성별 모두의 억압을 깨고 해방시키려는 운동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는 젠더폭력이나 젠더정치라는 개념을 명료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여성폭력방지기본법이 국회 여성가족위원회와 법사위원회에 상정되었을 때의 회의록을 보면, 이 법안을 입안한 여성가족부 차관도, 장관도, 여성운동가 출신 국회의원 누구도 젠더개념을 설명하지 못한다. 결국 “그러니까 여성폭력 방지하자는 것 아닙니까?”로 귀결되었고, 법안 이름도 젠더폭력방지기본법에서 여성폭력방지기본법으로 바뀌었다. 여성폭력이라는 개념은 법조문에 “성별에 기반한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 정의된 채 통과되었다.

젠더폭력방지기본법은 결국 여성폭력방지기본법이 되었고 이 법에 근거해 여성폭력방지위원회가 만들어졌으며, 남녀모두가 가해자가 될 수 있는 데이트폭력이나 스토킹도 오직 여성폭력으로 정의되었다. 젠더폭력의 하나라고 주장하던 데이트폭력 방지 공익광고에 남성과 여성 모두가 가해자로 등장하자 페미니스트들은 반발했다. 여성이 가해자로 묘사되면 이들은 젠더개념을 이해하지 못한다며 비난한다. 반면 남성을 나쁜짓의 행위자나 상징으로 묘사하는 표현에는 어떤 페미니스트도, 남성 자신들도 문제제기 하지 않는다.

페미니스트 진영에서 이러저러한 설명을 시도함에도 오늘날 ‘젠더’라는 개념은 ‘여성만의 이익에 복무하는 페미니즘 운동의 다른 이름’ 정도로 받아들여진다. 젠더라는 개념을 내건 운동들이 결국 생물학적 여성의 이익에 기여하는 쪽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gender에서 다시 sex

생물학적 성차를 기준으로 한 제도적 차별이 존재했을 때는 sex to gender 운동이 주효했다. 여자는 참정권이 없었을 때, 여자는 유산 상속권이 없었을 때, 여자는 운전면허를 발급받을 수 없을 때, 여자는 공공장소에 입장할 수 없을 때에는 생물학적 성차를 해체하는 운동이 필요했다.(지금도 이 단계의 운동이 필요한 국가들이 존재한다.)

제도와 별개로 관습적 억압에 대해서는 사회적 성(gender) 논리로 맞섰다. 교육과 고용에서의 노골적인 배제관습이 존재하기 때문에, 또 여자는 순결해야 하고 순종적이어야 한다는 등 여성성에 대한 사회적 억압 때문에 고유한 개인으로서 사람이 아니라 사회에서 원하는 ‘여성’으로 길러진다는 주장이다. 젠더개념은 이러한 관습을 바꾸는 데 동원되었다.

그러나 제도적 차별이 사라지고 관습적 억압도 희미해진 지금 페미니스트는 운동의 성공을 자축하며 종료를 선언하지 않는다. 지구상에서 가장 성평등한 국가라는 북유럽에서도 페미니즘 운동은 종료되지 않는다. 오히려 더 많은 억압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너무나 교묘하고 미세해서 공기처럼 보이지 않고 미처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페미니스트들은 제도적 차별은 없다해도 여전히 남성은 더 많은 임금을 받고, 여성은 소수만이 고위직에 도달하며, 여성적으로 되기(코르셋, 성상품화, 성적대상화, 성적도구화)에 시달린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들은 곧잘 데이터와 논리로 반박되지만 데이터가 아닌 감각의 영역에서 주장되는 피해는 과학으로 설득되지 못한다. 아마도 이 운동은 남자와 여자라는 성별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지속될 것 같다.

 

꼴리는 건 본능이지만 만지는 건 권력이라는 구호

 

통계로 입증되는 여성들의 퇴사사유 1위는 수년 째 결혼이고 그 다음이 육아와 출산이다. 결혼과 동시에 남성이 주생계부양자가 되고 여성은 전업주부를 택하거나 비상시적 노동으로 전환하는 삶의 형태가 여성들이 선호하는 선택지로 존재한다. 남성에게 능력이 있다면 여전히 많은 여성들은 직장생활을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여성들의 이러한 욕구는 비난받을 일도, 문제적 상황도 아니다. 성별임금격차에는 이러한 진실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는 여성들의 개인적인 선택인 결혼으로 인한 자발적 경력단절 문제는 거론하지 않는다. 전업주부의 삶을 살고 싶어 퇴사를 선택한 여성들은 구조의 피해자가 아니다. 그러나 이들이 다시 경제활동을 하고 싶어한다면 국가는 사회구성원 누구라도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받을 수 있도록 노력할 의무가 있다. 애초부터 성차별의 문제로 가져가지 않고도 충분히 풀어갈 수 있는 사안인 것이다.

sex to gender를 주장했던 페미니스트는 이제 성기 중심의 생물학적 성차(sex)를 내세운다. sex와 gender를 상황마다 선택적으로 적용한다. 적용방향은 늘 여성에게 이익이 되는 쪽이다. 일정한 신체능력이 요구되는 직종에서 여성에게는 체력검증 기준을 차등화 하라고 요구한다. 신체능력의 차이를 동등하게 적용하는 것은 여성의 본래적 특질을 고려하지 않은 차별적 조치이며 기회의 평등 면에서 여성을 배제한다는 주장이다. 공기업, 사기업을 막론하고 직업 영역에서 여성은 야간 당직업무나 험지 순환근무에서 제외되며 여성들은 이러한 열외를 당연히 여긴다.

한 페미니스트 변호사는 TV방송 토론회에서 하위직은 시장 자율의 채용 질서에 맡겨도 되지만 고위직에는 여성할당제를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성운동 진영의 공통된 주장이다. 여성할당제는 공정하고 합리적인 평가에 따른 임명이 아닌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성별(sex)이 수혜의 조건이다. 노동시장에서 여성은 여전히 결혼, 출산, 육아 등의 이유로 경력이 단절되는 경험이 많기 때문에 고위직일수록 분포가 적다. 페미니스트들은 이 자체가 성차별의 결과라 주장하며 고위직에 여성할당제를 강제하라고 요구한다.

성범죄 사건에서 여성의 주체적 결정력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때면 여성은 그루밍과 가스라이팅에 취약한 정서적 연약체임을 내세우거나, n번방 사건의 수사에 전원 생물학적 여성들만을 투입하라고 요구하기도 한다. 숙명여대의 페미니스트들은 남자에서 여자로 성전환한 여성은 여성이 아니고, 남성이라는 본래적 성별은 바뀔 수 없다며 트렌스젠더 학생의 입학을 막았다.

 

성범죄는 여자검사가 수사해야 한다는 청원

 

성범죄를 포함한 성폭력은 특히 남성들이 방어할 수 없는 영역이 되어가고 있다. 페미니스트 진영은 성범죄가 성차별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사회의 변화와 범죄양상의 추세들을 과학적으로 분석해 예방과 대처에 주력하기보다는 유해한 남성성(toxic masculinity)을 공격한다. 여성에 대한 폭력의 기저에 ‘유해한 남성성’이 있다는 것이다. 공격적, 폭력적, 충동적이며, 타인을 억압하고 지배하려는 속성들이 유해한 남성성으로 규정된다. 남성도, 여성도 그렇게 태어나는 것은 없으며 사회적 압박으로 길러진다던 주장은 이제 여성에게만 해당되는 듯이 보인다. 남성 일반이 그러하다면 우리는 남성을 태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 외에 어떤 해결책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페미니스트는 성평등 교육, 또는 페미니즘 교육 의무화를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전 생애에 걸쳐 페미니즘 교육(페미니스트가 주장하는 성평등 교육과 페미니즘 교육은 다르지 않다)을 받게 해 내재화된 유해한 남성성을 교정하면 해결된다는 것이다. 유해한 남성성을 해결해야 성폭력과 성범죄가 사라진다는 전제에서 남성은 존재 자체로 교정하고 개조해야 할 대상이 된다. 인종차별주의와 우생학의 뿌리 또한 이러한 논리에서 시작한다. 이것은 근대 인권의 논리에서 매우 엄중하게 다뤄야 할 위험한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을 거침없이, 어떠한 제약도 받지 않고 공공연하게, 심지어 매우 선진적인 운동인 양 말할 수 있는 토대는 여성들이 성범죄의 희생자이며 상시적 성폭력의 대상이라는 피해자의 지위를 점유했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는 이 유리한 지위를 놓을 생각이 없다. 피해자가 되면 상대를 가해자로 규정하고 비난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게 된다. 설사 주장의 내용이 취약하고 비윤리적이거나, 태도마저 무례하다 해도 피해자의 지위 덕에 면책된다.

숙명여대 트렌스젠더 학생의 입학이 무산되고 페미니즘에 대한 비난여론이 일자 진보진영은 페미니즘은 여전히 정당하다며 엄호했다. 페미니즘은 혐오와 배제를 용납하지 않으므로 이념 자체의 모순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들 진영 스스로 내세워 왔고 번복한 적 없는 ‘n개의 페미니즘’ 논리로 부인된다. 즉 그 또한 페미니즘인 것이다. 이들이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규정할 권한은 없다. 같은 이념을 공부하고 받아들인 집단이 상반된 행동을 한다면 본질적인 구멍이 무엇인지 점검해보는 게 순서이지만, 그동안 페미니스트들은 그러한 제기를 모두 페미니즘에 대한 공격이라 치부하며, ‘백래쉬’, ‘이해 안 되면 공부할 것’, ‘n개의 페미니즘’ 등의 논리로 무시해 왔다.

페미니즘에 대한 선의에서 비롯된 혼란은 페미니스트들이 현실에서 실천하는 행위를 기준으로 정리가 가능하다.  사회적 성이든 생물학적 성이든 페미니즘은 여성에게 이로운 것을 선택적으로 취한다. 제도적, 문화적 차별이 사라진 사회에서 이들에게 유용한 도구는 생물학적 성(性)이다. 여성과 남성이라는, 힘과 성본능, 기질적 차이를 지닌 다른 성별이 존재해야만 페미니즘은 이를 동력으로 삼아 권력을 가질 수 있다. 제도적 평등이 자리한 나라에서도 페미니즘이 운동의 종료를 선언하지 않는 이유다.

 

()적 통제권을 쥔 페미니스트들이 붕괴시킨 프라이버시 장벽

페미니스트는 “모든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라며 사적 영역을 정치의 영역으로 포섭해왔다. 인간의 모든 행위와 사회구성원들 사이의 상호작용은 모두 구조화된 억압(가부장제) 아래 놓여있으므로 온전히 개인적인 행위란 없다는 것이다.

정치의 영역이 되는 순간 모든 행위에는 정치적 압력과 권력 논리가 작동하고, 공적 규제의 명분이 주어진다. 성은 인간의 가장 내밀한 영역이었으나 페미니스트에 의해 현재 가장 뜨거운 공적 권력투쟁의 장이 되었다. 이 장에서 승자는 페미니스트와 여성들이다.

리얼돌 반대 사례를 보자. 리얼돌은 성인을 위한 합법적 섹스도구이다. 페미니스트들은 리얼돌 제작과 유통을 반대하기 시작했다. 대법원은 리얼돌의 수입유통은 합법이라는 판결과 함께 ‘개인의 사적이고 은밀한 영역에 대해서 국가의 간섭은 최소화되어야 한다.’고 명시했다. 그러나 여성가족부와 경찰청은 여성단체와 페미니스트의 반발을 수용해 수입을 금지하고 있다. 사법부의 최종 판단도 페미니스트의 위력을 이기지 못하는 형국이다. 성(性)을 매개로 한 권력투쟁의 장에서 페미니스트는 절대적 우위를 점하며 승리의 기록을 쌓고 있다.

리얼돌을 금지하라는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은 명료하다. 리얼돌 사용은 곧 강간연습이라는 것이다. 연습은 실천으로 이어질 것이므로 리얼돌을 허용하는 것은 여성에 대한 강간을 용인하고 장려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는 아무런 권리논증도 없다.

페미니스트들이 도입하고자 노력하는 비동의강간죄 또한 마찬가지다. 강간의 정의를 ‘폭행과 협박을 이용한 강제성교’가 아닌 ‘동의받지 않은 섹스’로 바꾸겠다는 것이다. 지금도 물리적 폭행과 위협이 없었다 해도 미성년자와 장애인, 지배적 신분 관계에서 섹스는 형사처벌의 대상이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들은 더 많은 섹스를 강간으로 정의해 처벌하라고 요구한다.

폭행과 협박이 없고, 신분상의 권력관계도 없는 성인남녀 사이에 비동의 의사를 표현할 수 없는 항거불능이란 어떤 경우를 말하는가? 결국 남는 요소는 남자와 여자라는 생물학적 조건의 차이다. 성별 자체가 위력이라는 성별 신분 논리를 펴는 것이다.

관계라는 상호작용에서 상대방을 불쾌하게 하지 않으면서 거절하려는 마음, 직설적인 말로 상처주지 않으려는 선의는 소중한 태도다. 그러나 이제 배려, 은근함, 자연스러움, 무드와 같은 단어는 성관계의 스펙트럼에서 설 자리가 없다. 여성의 신호를 알아채지 못함이 눈치 없음이 아닌 성범죄로 단죄되는 세상에서는, 여성은 예스 또는 노라고 정확하게 말하고, 남성은 예스와 노 외에 어떤 신호도 예단하지 않아야 하는 성관계시 행동준칙만이 남을 뿐이다.

그러나 이 준칙을 어겼을 때 맞닥뜨릴 결과는 여성과 남성이 같지 않다. 남성 앞에는 형사처벌이라는 위협이 기다린다.

 

콘돔사용은 정치의 문제라는 페미니즘

 

오늘날 페미니즘은 개인의 가장 프라이빗한 영역에 국가권력의 개입을 요구한다. 주체적 행위자이며 권리의 단위인 근대적 개인은 사라졌다. 더 나아가 강간범죄와 성인물 소비를 구분할 줄 알고, 리얼돌과 실제 사람을 구분할 줄 아는 근대적이고 이성적인 인간에서 남성을 배제한다.

남성뿐 아니라 문명화된 법치국가에서 살아가는 시민들은 범죄행위와 판타지를 구분한다. 강간이 판타지로 존재할 수 있는 자체가 문명화의 증거이며, 이를 판타지라 명명할 수 있는 것도 우리가 문명화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라면 국가가 집집마다 카메라를 설치해 강간범죄를 감시하고 적발해내는 일은 왜 허용할 수 없는가? 프라이버시의 쇠락은 위선과 전체주의의 토양이 된다. 이는 우리가 일군 문명의 퇴행이다.

 

남성에 대한 혐오: 유해한 남성성(toxic masculinity)

근대적 자유와 권리를 쟁취하는 투쟁에서 해방의 동반자였던 남성은 오늘날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제도적 평등이 자리 잡은 근대법치국가에서 여성들의 권익을 위한 운동이 힘을 발휘하는 영역은 범죄와 문화이다. 특히 성범죄는 여성들의 피해 가운데 극단적 사례들이 존재하므로 규제와 처벌에 손쉽게 대중적 동의를 구할 수 있다. 성범죄의 특수한 부각은 남성 일반을 잠재적 가해자, 잠재적 성범죄자로 규정하는 오류를 범한다. 남성성이라는 특질은 유해한 것으로 규정돼 욕구 자체가 혐오와 규제, 교정과 억압의 대상이 되며 이를 당연시한다. 이 결과 남성을 반문명적인 존재로 혐오하는 문화가 자리 잡았다. 남성의 욕구에 대해서는 어떠한 타협도 하지 않으려 하며, 남성의 욕구를 수용하는 것은 곧 남성지배의 강화라 비난한다. 남성의 성적 욕망은 방어하기 힘든 영역이 되었다.

젠더감수성, 성인지감수성, 성상품화, 성적대상화, 피해자중심주의와 같은 개념은 문화적으로 여성운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으나 사실상 명확하게 개념화할 수 없고, 권리로서 논증되지 않은 개념들이다. 그럼에도 이를 명문화된 처벌과 규제의 영역에 기준으로 적용하려는 데서 갈등과 진통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한국은 유교 바탕의 문화적 규범과, 해방 후 들어온 기독교의 청교도적인 문화 규범이 한 번도 도전받지 않아 왔다. 성적 자유의 물결은 잠시 불었다 사라졌다. 성적인 것을 죄악시하고 비천하게 보는 금기의 감정 위에, 여성을 가부장적 사회에서 성적 착취 피해자로 규정하는 페미니즘이 만나게 된다. 유교, 기독교, 페미니즘이라는 세 영역의 금기가 연합해 성윤리의 기풍으로 자리 잡았다. 셋 중 어느 하나만 받아들여도 성적 규제에서는 같은 결론을 지지하고 실천하게 되므로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

여성의 주체성을 외쳤던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을 보호의 대상으로 규정하고 성적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없는 주체로 묘사한다. 빅팀 페미니즘(victim feminism)은 여성운동의 강력한 무기로 사용되며, 극단의 사례들을 부각해 개인의 자유권을 축소하고 규제의 정당성을 옹호한다. 거역할 수 없는 사례들 앞에서 자유의 견해는 위축된다. 자유의 제한은 오직 자유의 확대를 위해서만 허용된다는 오랜 원칙이 권리 논증 없이 왜곡되고 있다.

오늘날 페미니즘이 주도하는 성정치는 우리에게서 자유의 감각을 앗아가는 중이다.

 


10월 29일 광화문 갤러리 에무에서 진행한 “성의 정치학” 심포지움 발제문을 보완정리했습니다.

이선옥TV에서 심포지움 발제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