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들이여 불공정 거래는 그만

여성의 모든 감정적 불쾌함을 남성처벌로 해결하려는 페미니즘의 문제

세상을 실제보다 더 위험하고 적의에 찬 곳으로 바라보고, 여성을 피해자의 지위에만 두고 온갖 면책을 합리화하는 불공정한 행동 이제 그만 좀 해야한다. 여성은 본래적 피해자가 아니다. 그리고 성인이란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사람을 말한다.

 

한 페미니스트 여성변호사가 데이트앱을 이용해 남성을 만난 여성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칼럼을 썼다.
소개팅앱으로 만나 진지한 관계를 기대하고 섹스했는데 남자쪽에서 연락을 끊어 마음에 내상이 생긴 여성들이 많다는 거다. 이 변호사는 묻는다.

“우리가 나쁘다고 말하는 행동들이 모두 범죄가 되거나 불법성이 있다고 인정되지는 않는다. 성인 기준 성범죄로 의율되는 간음은 폭행, 협박, 피해자의 항거불능상태, 업무상위력 등이 동원되었을 경우다. 여기에 상대의 마음을 악용하여 속여서 행하는 것은 들어있지 않다. 그런데 이 기준이 꼭 옳은 걸까? 성관계를 목적으로 관계성을 속이는 것이 덜 나쁘다는 것은 누구의 기준일까? 이런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받는 상처가 덜하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그건 누구의 기준인가?”

이 변호사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이런 상처를 주는 이들은 타인의 마음을 악용하는 것이 대단한 능력이라거나 속은 사람이 잘못이라는 궤변을 늘어놓는다. 궤변을 가능하게 하는 건 사회가 가해자에게 사뭇 관용적이었기 때문이다. 사회는 오랜 기간 그런 나쁜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며 은연중에 ‘속인 게 나쁘긴 한데 속은 게 더 문제’인 것처럼 한발 물러서 있었다. 그러니 이런 사건들에서 지금까지의 기준이 꼭 옳은 것인지는 단언하기 어렵다.”

그간 우리사회가 환심을 사서 섹스한 후 변심한 남성 가해자들을 능력자로 치켜세우고, 고통받는 여성들한테는 속은 니가 잘못이라는 궤변을 늘어놓았다는 것이다. 이 변호사는 이런 사건에서 지금껏 적용됐던 통념과 법적 기준 모두 옳지 않다고 주장하며 그게 부끄러운 일임을 가르쳐야 한다고 글을 끝맺는다. 물론 부끄러움을 알아야 한다는 가르침은 남성에게만 해당한다.

“어떤 경우 범죄가 되는지나 어떤 경우 범죄는 아니지만 인간을 훼손시키는 일인지, 타인의 진지한 마음에 기생하여 타인을 착취하는 일이 얼마나 비루하고 천박한지 가르쳐오지 않았다. 과거 범죄냐 아니냐, 부끄러운 일이냐 자랑스러운 일이냐를 나누는 기준이 가해자의 입장에 편향되어 있어 나타난 오류다.
상처 입을 수 있는 입장에서 미리 알아야 할 것들을 알려주고, 상처 주는 일이 부끄러운 일임을 가르쳐야 한다.”

이 칼럼은 법과 문화를 두루뭉수루하게 섞어서 마무리하고 있지만 글쓴이의 직업이 법률가인 이상 그냥 넘어가기엔 위험한 구절이 여럿이다. 이 페미니스트 여성변호사는 현행 성범죄는 상대의 마음을 악용하여 섹스하는 것은 포함되지 않는데 이게 과연 옳으냐고 묻는다.
성인여성이 소개팅앱으로 만나 실패에 이른 관계까지 국가가 나서서 범죄로 처벌하라는 주장인가. 이런 논리라면 합의하에 섹스한 후 여성의 기대대로 따라주지 않은 남성은 성범죄자가 되어야 한다.

고통을 호소하는 여성을 곧 피해자로 규정하고, 주관적 감정을 법적 처벌과 연결시키는 이러한 방식은 페미니스트들이 그간 자주 사용해온 전략이다. 여성의 모든 고통은 구조적이며 차별의 결과라는 게 이들의 인식구조이므로 가해자인 남성을 교정하거나 처벌해 해결하라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나 법률가인 필자는 주관적 공포와 불안, 분노를 법으로 해결할 수 없고, 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문화와 법을 교묘하게 섞어 주장을 흐린다.

비단 페미니스트들 뿐 아니라 고통의 감정을 명분으로 처벌과 제약을 가하려는 욕망은 운동집단에 흔히 존재한다. 그러나 다른 집단과 달리 페미니스트의 주장이 문제인 것은 고통의 원인이 된 선행 사건이 범죄의 영역으로 가져갈 수 없는 데에 있다. ‘사람이 죽었으니, 사람이 다쳤으니, 재산상에 손해를 입혔으니’와 같은 신체적, 금전적 권리의 침해라는 선행조건이 아니라, 이들이 내세우는 명분은 “고통스러움을 호소하는 여성”이다.

물론 개인에게 어떠한 일은 범죄의 피해보다 더 큰 마음의 상처를 남긴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은 인간관계에서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법률가라면 한 나라의 형사법을 여성의 감정처리 도구로 이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할 수 없다. 대체 이 나라의 페미니스트들은 어디까지 여성의 성적자기결정권을 국가의 형사처벌권에 맡길 셈인지 한심한 노릇이다.

 

미드 <성범죄전담반>의 에피소드. 자신의 신분을 속여 섹스한 남성을 경찰과 검찰은 강간범으로 기소했다. 법정에서 남성측 여성 변호사가 당신이 원하는 걸(자녀의 입학) 얻기 위해 섹스해 놓고 이젠 그것을 정치적으로 강간이라고 부르느냐고 추궁하자, 여성은 자신은 진정 원했던 게 아니라 목적을 위해 즐기는 척을 했을 뿐이라고 항변한다.

 

섹스했는데 기대대로 안됐다면 흑역사로 남겨 이불킥하고 말일이다. 남성에게 섹스를 제공하고 안정된 미래를 보장받아야 한다는 성역할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도록 조언할 일이며, 어떤 기대에서 섹스를 결정했든 그 순간 자신이 섹스를 ‘선택’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에 따른 책임 또한 성인인 자신에게 있음을 주지시킬 일이다.
반복된 상황에 빠지지 않도록 소개팅 앱을 이용하지 않을 수도 있고, 기대가 충족되지 않으면 큰 고통을 받는 자신의 성향을 파악해 이후에는 섹스에 신중하거나, 자신의 가치관을 이동시켜 미래의 기대와 연결짓지 않는 자유로운 섹스를 지향할 수도 있다.

여성에게는 해결할 방법이 있다. 수많은 주체적 선택지, 성적자기결정권을 두고 성인여자들을 금치산자에 감정처리 불능자로 취급하는 이런 말은 피로할 뿐만 아니라 위험하다.


용맹한 여성들은 다 어디로 갔나

여자들 제발 불공정거래좀 그만하자. 자기의 삶에 책임이란 것도 질 줄 알아야 한다. 페미니스트라는 사람 중에서 여성의 주체적인 판단과 그에 따른 책임을 말하는 사람을 보기 어렵다. 위 칼럼에서 변호사는 말한다.

“사랑과 연애를 목적으로 디지털 어플을 이용했던 여성들이 단순히 육체적 교류를 목적으로 하는 남성들을 만나 어려움을 겪는 일들이 적지 않다.”

맞다. 그리고 반대의 경우 또한 무수히 존재한다. 독점적 연애를 기대하고 재산도 주고, 선물공세 펴고, 순정 바쳤다가 고통받는 남자들 사례 얼마나 많은가. 그 남성들에게 금전적 이득만 취하고 연락두절한 여성들 또한 상대의 마음을 악용하여 섹스했으니 성범죄자의 혐의를 두어야 옳은가. 사람의 마음을 속이는 건 가해행위이고 부끄러운 일이라고 가르쳐야 하는가.

사랑과 연애가 목적인 만남과, 육체적 교류가 목적인 만남은 관계의 어긋남이지 선악의 문제가 아니다. 육체적 교류는 악이고 사랑과 연애는 선인가. 데이트앱에서 만나 섹스한 관계에서 피해자 가해자가 어디 있나. 관계의 온도가 달라서 갈등하거나 상처받는 건 비단 남녀관계 뿐 아니라 우정의 농도, 동료애의 농도, 심지어 부모자식 사이에서도 늘상 있는 일이다. 모든 인간관계에는 감정의 비대칭이 존재하며 우리는 비대칭을 곧 피해나 가해라 하지 않는다.

이러한 시각이 심각한 것은 육체의 교류는 타락한 것이고, 연애와 사랑은 온전한 것이라는 관념에서 나온 사고이기 때문이다. 청교도적인 성관념에 육체적 교류를 죄악시하는 이런 논리가 21세기 개명한 세상에 페미니스트들의 입에서 나오고 있다.

라떼는 페미 언냐들이 남자들이 찝적대거든 부랄을 걷어차라했다. 남자랑 똑같이 담배 피고, 자유롭게 섹스 하고, 내가 너 따먹은 거다 이렇게 말하고 생각해라, 섹스는 그냥 섹스다 한 번 잤다고 인생 망하는거 아니라고 가르쳤다.

그 언니들은 다 어디로 가고 요즘 페미니스트들은 실패한 연애에 대한 복수로 SNS폭로를 이용하고, 이 모든 일은 구조적 차별때문이라며 공론화와 공개사과를 요구한다(실패한 연애를 왜 만인 앞에 공개하고 사과해야 하나). 여성의 행동은 그루밍에 가스라이팅 당해서 어쩔수 없었다 면책하고, 돌아보니 불쾌함으로 남은 성관계나 성적 접촉은 성폭력이라 주장하는 사람들만 남았다.

세상을 실제보다 더 위험하고 적의에 찬 곳으로 바라보고, 여성을 피해자의 지위에만 두고 온갖 면책을 합리화하는 불공정한 행동 이제 그만 좀 해야한다. 여성은 본래적 피해자가 아니다. 그리고 성인이란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사람을 말한다.

모든 인간관계에서 감정처리는 셀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