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이 원하는 성폭력 통념에 휘둘리지 않기

결국 웃는 것은 페미니스트와 페미-비즈니스

성문제를 정쟁의 도구로 삼아 범죄화하면 모두 추악한 성추행 범죄라 규정할 수 있다. 그 결과는?

결국 낮은 성인지감수성이 원인으로 지목되고, 남성(의원)들은 성폭력 가해자가 되며, 어디에서도 안전하지 못한 여성들, 고통받는 여성들이라는 레토릭이 등장한다.

이 프레임을 깨지 못하는 한 어떤 진영이든 성폭력 가해자라는 낙인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웃는 건 결국 여성단체와 페미-비즈니스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정의당 소속의 창원 시의원이 민주당 소속 시의원에게 명예훼손을 한 혐의로 벌금 3백만원 처분을 받았다. 정의당 의원은 이에 불복해 정식재판을 청구했다. 민주당 측은 반발하고 나섰다.

민주당 의원들은 정의당의 노창섭 의원이 민주당의 A의원에 대해 성희롱성 허위사실을 유포해 명예를 훼손한 범죄사실이 인정됐다며, “A의원은 재선의원으로서 활발한 의정활동과 함께 활발하게 활동해 왔으나 사건의 충격으로 몇 달째 대인기피증과 우울증으로 고통의 시간을 보내왔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여성 정치인에 대한 성희롱성 허위사실 유포는 모든 여성 의원들의 의정활동을 위축시킬 뿐만 아니라 해당 의원의 정치적 생명까지 위협하는 심각한 범죄라 주장했다.

정의당 창원시 의원단은 반박에 나섰다.

 

정의당이 무죄추정의 원칙을 말할 자격이 있느냐며 조롱 당하는 성명서

 

정의당 창원시 의원단은 성희롱이라는 악의적 낙인찍기를 중단하라며 반발했다. 정의당 의원측에서 했다는 ‘말’은 보도를 통해서는 알 수 없다.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정의당 의원이 동료 의원에게 A의원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이 이야기가 A의원 본인에게 전해졌는데 그 내용이 명예를 훼손한다고 판단한 A의원 측에서 고소를 한 정황이다.

정의당 노창섭 의원은 공인으로서 더 조심하고 처신을 잘하자는 취지의 말을 한 것일뿐 비방이나 명예훼손의 의도가 아니었다고 해명하면서, 민주당이 자의적으로 사건을 성희롱성 명예훼손으로 규정하고 있다며 반발했다. 이는 오히려 정의당과 자신에 대한 명예훼손이며 정치공세이므로 정식재판을 통해 시비를 가리겠다는 입장이다.

정의당 창원시 의원단은 보도자료 마지막에 “악의적 낙인찍기를 중단하고 재판이 진행 중인 사안에 대해 무죄추정의 원칙에 입각하여 객관적인 보도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 말 때문에 정의당은 다시 조롱의 입길에 올랐다.

그간 성범죄 관련한 사안에서 정의당은 무죄추정의 원칙을 지켜왔을까? 모두가 알듯 정의당은 여성의 폭로는 곧 사실로 받아들이며 오히려 유죄추정의 입장을 견지했다. 재판 중인 사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안희정 전 지사가 1심에서 무죄를 받았을 때는 사법폭력이라 비난한 바 있다. 정의당은 모든 미투를 지지하며 미투 폭로는 곧 진실로 인정해왔다.

자의적이고 악의적인 낙인 또한 정의당이 해왔던 일이다. 김남국 의원이 낙태죄 관련한 자신의 발언을 왜곡해 논평한 정의당 조혜민 대변인에게 전화를 걸어 항의하자 정의당은 어린 여성정치인에 대한 성차별적 갑질이라며 비난했다. 기성 정치를 진보적으로 변화시키겠다며 청년여성 정치인들을 자산으로 내세웠던 정의당은, 젊은 남성 초선의원의 전화 한 통화에 고통을 호소하는 연약한 모습으로 청년여성정치인을 정체화했다. 그런 프레임을 위해 상대방에게 성차별 갑질 낙인을 씌웠다.

‘의도’ 또한 마찬가지다. 정의당 의원단은 명예훼손이나 비방의 의도가 없었다고 항변한다. 아마 실제로도 그런 의도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정치공방이 일어난 현장도 아니고 사석에서 한 이야기이니 상대방의 오해일 수 있다. 그러나 자신들이 당할 때만 악의적 낙인이라 항변하는 정의당의 말은 인정받기 어렵다. 정의당이 언제 타인의 선한 의도를 용인해 왔던가?

모친상을 당한 옛 동료와 동지의 빈소에 조문을 했거나 화환을 보낸 행위도 2차 가해라 비판하고, 좋아하던 정치인의 비극적인 죽음에 대한 애도조차 비난하던 정의당을 기억하고 있다. 성범죄와 연루된 사안에서는 어떤 인간적 고려도 용납하지 않고 2가 가해라 비난해왔던 대표 세력이 정의당인데 이제 와 내 선한 의도는 고려해 달라고 한들 먹힐리 없다.

 

정의당의 내로남불 비판에 앞서 생각해 볼 일

여기까지는 쉽게 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정의당의 내로남불은 여러 차례 지적된 바 있고 대중적으로도 비난받으며 탈당과 정당지지율의 하락으로 이어졌다. 우리가 한 발 더 나아가 생각해 볼 지점은 이것이다.

의회 내 ‘말의 공방’을 성적 폭력문제로 취급했을 때 벌어지는 일, 성희롱부터 강간까지 아무런 차등 없이 고통의 일률적 극대화에 익숙한 우리의 모습에 대한 이야기이다.

민주당은 말에 의한 명예훼손 사건을 왜 굳이 ‘성희롱성’ 명예훼손이라 강조했을까? 그냥 명예훼손보다 성범죄의 영역으로 포함시키면 더 엄중한 범죄로 규정되고 대중들에게도 심각하게 받아들여질 것이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본래 이런 프레임을 유도해 온 진영은 페미니스트 세력이다.

이번 사태에도 여성단체는 예의 같은 레토릭으로 개입에 나섰다. 경남여성단체연합은 “디지털 성착취, 성폭력, 교제폭력, 여성혐오폭력, 직장내 성희롱 및 성차별 등으로 여성들은 여전히 일상이 보장되지 않는 안전 문제로 인해 이중, 삼중고로 불안하고 불편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며 말문을 열었다.

 

여성단체연합의 대표는 박원순 시장 고소인의 고소사실을 사전에 박시장측에 유출했으나 여성단체는 후속처리를 발표하지 않고 있다.

 

의원 사이에 일어난 말의 다툼에 디지털 성착취, 성폭력, 교제폭력, 여성혐오폭력을 들고나온 것이다. 명예훼손 논란에 디지털 성착취를 왜 언급할까? 이러한 프레임이 그들이 즐겨 사용하는 고통의 일률적 극대화 공식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성’이라는 단어만 나오면 극단적 사례들을 모두 같은 일인양 엮어 심각하게 보이도록 만든다. 그런 후 고통을 선정적으로 이용하면서 이 모든 게 연결되어 있다는 논리를 편다. 결론은 이 모든 일이 성인지감수성이 없어서 벌어지는 일이므로 성인식을 개선하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하고, 그 교육을 하는 건 결국 여성단체 몫으로 돌아온다.

이들은 모든 사안에 개입해 자신들에게 그럴 자격이 있는 듯 모두를 비난하며, 성차별, 여성혐오, 저출생, 성평등, 성인지감수성, 민주주의 완성과 같은 단어를 활용한 레토릭을 구사하며 결국 여성단체의 권력화와 페미-비즈니스로 연결시킨다. 우리가 의회 내 ‘말의 공방’을 성적 폭력문제로 취급했을 때 벌어지는 일이다.

결국 웃는 건 페미니즘 진영과 페미-비즈니스라는 사실이다. 경남여성단체연합은 박원순 시장 고소인의 형사고소 사실을 사전에 유출한 단체의 산하 지부이지만, 이들이 그 뒤 직무배제한 대표에게 어떤 처벌과 책임을 물었는지는 알려진바 없다.

‘카르텔’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며 모든 남성을 범죄의 공범자이자 가해자로 엮는 일을 반복해온 여성단체들은 정작 자신들의 대표가 저지른 일에 대해서는 연대책임을 지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타인을 향해서는 여전히 고압적으로 비난하고 책임을 묻는다. 지금껏 보아온 어떠한 운동세력도 페미니즘 진영처럼 자기책임에서는 자유롭고 자신 외 모든 타인에게 책임을 물으며 유체이탈식 화법을 쓰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

 

고통의 일률적 극대화를 유도하는 페미니즘 진영에 휘둘리지 말아야

민주당 의원단은 해당 여성의원의 고통이 심각하다면서 이렇게 표현했다. “A의원은 재선의원으로서 활발한 의정활동과 함께 활발하게 활동해 왔으나 사건의 충격으로 몇 달째 대인기피증과 우울증으로 고통의 시간을 보내왔다”. 또 “여성 정치인에 대한 성희롱성 허위사실 유포는 모든 여성 의원들의 의정활동을 위축시킬 뿐만 아니라 해당 의원의 정치적 생명까지 위협하는 심각한 범죄”라고도 주장한다.

이러한 상태가 거짓이라는 주장은 아니다. 다만 반복되는 같은 유형의 사건들을 보면서 한 번쯤 숙고해 볼 일이 있다는 이야기다.

어떤 이는 말에 상처받고 고통을 당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인이라는 직업은 말을 하고 듣는 일을 업으로 삼은 직종이며 온갖 추문과 정치공세를 주고받는 일이 일상인 전문영역이다. 나쁜 말은 말로 되받아치고, 별 것 아닌 일로 만들어 상대에게 돌려주는 모습 또한 당당한 여성이자 정치인으로서 필요한 자질이다.

어떤 정치인이 부정적인 말을 전해들은 끝에 우울증과 대인기피증에 걸려 의정활동에 차질이 일었다면 유권자들에게는 부정적 영향을 줄 것이다. 개인적 불행을 공적으로 슬기롭게 해결하면서 강인함과 용기, 역경을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공포의 일률적 극대화가 다반사인 요즘 필요한 정치인의 모습이라 하겠다. 비단 정치인 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특히 여성들에게 이런 덕목이 필요한 시절이다.

피해사실의 극대화, 고통의 극대화는 결국 성범죄에 대한 특별한 취급을 강화시키며 이후 벌어지는 성 관련한 사안에서 결국 다른 진영에도 똑같은 취급을 적용시켜야 하는 에스컬레이터가 된다. 나와 내 진영에 당장 유리하게 쓸 수 있는 상황이라 해도 성문제를 정쟁화하는 일은 좀 더 본질적인 문제의식으로 접근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성폭력 영역에서 경미함과 중함을 구분하지 않는 극단적 공포의 표현은 페미니스트 진영에 좋은 먹잇감이다. 말(직접적 말, 간접적 말)에 의한 명예훼손과 강간은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피해 사실과 고통을 표현할 때 가장 극단적 공포와 피해로 이 둘 사이의 차별성을 없앤다. 이러한 행동은 대립과 갈등의 전선에서 때로 이롭게 작동한다.

누구나 피해사실을 좀 더 적극적으로 표현해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를 지니고 있다. 이를 감안한 후 상황과 맥락을 고려해 합리적 판단을 하는 일이 필요하다. 전자의 호소에만 귀기울이고 후자의 판단을 포기할 때 우리 사회는 피해의 각축장이 되고 결국 이 상황에서 이득을 얻는 세력의 힘만 커지게 된다.

성폭력은 다른 어떤 폭력보다 심각하고 고통을 주는 악질적인 범죄라는 통념을 원하는 건 페미니스트다. 여성들 사이에 벌어진 폭력 문제에 페미니스트 진영은 반응하지 않는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학교폭력은 어떤가? 아동 폭력은? 사기범죄의 피해로 전재산을 날린 사람도 목숨을 끊는다. 어떠한 피해가 한 개인에게 더 특수한 영향을 끼치는 건 처한 상황과 기질적 차이 등 복합적인 문제이지 폭력의 종류 때문이 아니다.(성폭력이 문제가 아니라는 이야기가 아님을 부연해둔다.)

모든 폭력은 피해자에게 고통을 주지만 오로지 성폭력만이 여성운동세력에게 권력과 사업의 자원이 된다는 이야기다. ‘성폭력이 만연한 사회’가 될수록 이들의 입지는 넓어지고 위상은 높아진다. 그러므로 성폭력이 만연한 사회임을 입증하기 위해 모든 사안에 성문제를 결부시키려 한다.

예를 들어보자. 문희상 전 의장이 임이자 의원의 뺨을 감싼 행위가 엄중한 성추행일까? 내 편에서는 비웃지만 상대편에서는 성추행이라 주장한다. 주호영 국민의 힘 대표 사례도 마찬가지다. 해당 영상을 보면 의도적인 성추행이라 단정할만한 신체접촉 정황이 드러나지 않는다.

임이자 의원과 문희상 의원 사이의 장면, 주호영 대표 일행과 한 여성이 엘리베이터에서 찍힌 장면을 두고 합리적인 판단을 시도해보자. 니편 내편의 유불리함을 떠나 우리는 이런 행위를 성폭력이라 칭해야 하는가? 사법적 영역으로 가져가 형사처벌 해야할 일로 취급해야 하는가?

페미니즘이 원하는 성폭력의 통념에 따르면 모두 성추행 범죄가 된다. 결국 낮은 성인식이 원인으로 지목되고, 남성 의원들은 성폭력 가해자가 되며, 어디에서도 안전하지 못한 여성들, 고통받는 여성들이라는 레토릭이 등장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전국민은 페미니즘 교육을 받아야 한다.

이 프레임을 깨지 못하는 한 어떤 진영이든 성폭력 가해자라는 낙인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웃는 건 결국 여성단체와 페미-비즈니스다.

 

“직장 동료가 귀찮게 할 때에는 따귀를 한 대 올리는 것이 법으로 처벌하는 것보다 낫다고 여성들에게 충고해 줍시다”

프랑스의 페미니스트 엘리자베스 바댕테르가 쓴 페미니즘 비판서 <잘못된 길>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1990년대에 들어서서 프랑스에서도 미국의 영향을 받아 성폭력과 강간에 대한 규정이 확대되고 처벌 수위가 높아졌다. 프랑스에서도 이전의 ‘권력남용’ 관련 법을 성희롱에 대한 새로운 법으로 제정했는데 극렬 페미니스트들은 모든 경우의 처벌을 요구했으나 최종 법안은 상하 계급 관계에 한해서만 처벌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당시 프랑스 여성권리처 장관은 “직장 동료가 귀찮게 할 때에는 따귀를 한 대 올리는 것이 법으로 처벌하는 것보다 낫다고 여성들에게 충고해 줍시다.”라고 발언했다. 여성(혹은 남성)이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이 방어력이 전혀 없는 사람으로 치부하는 것보다 낫다는 프랑스적인 생각이었다.

 

필로소픽에서 재출간한 <잘못된 길>. 독자들에게 추천드린다.

 

우리 사회에도 위와 같은 말이 통용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성범죄를 다른 어떤 범죄보다 특수하게 취급하고, 성희롱부터 강간까지 고통의 서사를 일률적으로 극대화 하는데에만 급급할 뿐, 위와 같은 말을 하는 페미니스트는 없다. 문제는 페미니스트가 아닌 우리 또한 그러하다는 사실이다.

이성과 합리의 작동이 필요한 시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