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는 왜 부패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은가?(2): 석진환과 신학림의 사례를 들어

이선옥 승인 2023.09.13 18:28 | 최종 수정 2023.12.15 19:37 의견 0
지난글: 단상] 진보의 부패는 왜 더 해악인가?: 석진환과 신학림의 사례를 들어(1)에 이어

진보의 인식구조는 반독재투쟁시대에 생성된 '절대거악에 맞서 싸우는 정의로운 나'에 멈춰있다.

시대는 변하고 대중도 독재시대의 대중이 아니지만 '거악'의 자리만 계속 대체해가며 이 틀 안에서 사고한다.

정의로운 행위를 해서 정의를 구현하는 게 아니라 악에 맞서 싸우는 나 자신을 언제나 현재진행형 정의로 규정하는 방식이다.

이 사고체계가 부패와 타락의 가운데에서도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근본적 원인이다.

PC주의자들이 부패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은 이유도 선악 이분법적 사고 구조에서 나온다.

민주 대 반민주 구도가 희미해지고 자본가 계급을 향한 투쟁 또한 시들해지자 거악의 자리를 대체할 존재가 마땅치 않아졌다.

세상의 구조는 변했고 대중들이 의식도 바뀌었다.

그러한 혼란기에 '우리 안의 파시즘'같은 성찰적 구호가 잠시 등장하기도 했지만 진보는 성찰의 제스처조차 거악 기득권에 대한 투항이나 주류화에 대한 욕망으로 규정했다.

여전한 거악의 존재를 가리는 모든 시도는 결국 거악에 복무하는 것이라는 탈레반스러운 논리는 진보진영 안에서는 상당한 도덕적 우위를 차지한다.

그러나 독재정권과 자본을 거악으로 상정한 투쟁은 변화한 사회구조에서 유효하지 않아졌다.

이제 진보의 지형은 인권과 소수자, 다양성, 페미니즘 등 PC주의 어젠다로 바뀌었다.

이러한 어젠다는 주로 문화의 영역에 해당되므로 가해자의 역할이 모호하다.

하지만 진보에게는 언제나 구조적 거악이 필요하다.

그래서 찾은 구조적 거악과 지배계급이 바로 '가부장제'와 '남성'이다.

공고하여 좀체 바뀌지 않는 본질적 지배구조라는 진보의 사고체계에서 가장 적절해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면에서 진보는 부패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은 것일까? 첫째, 현실권력의 획득이다.

86세대는 이미 우리사회를 통치하는 정치권력을 가져봤고, 현재 광범위한 영역에서 권력과 부를 가진 기득권 세력이 됐다.

털릴 곳간이 있어야 도둑도 드는 법이다.

곳간을 가진 사람과 접촉하고, 스스로 곳간을 만들기도 하면서 권력에 따르는 유무형의 부를 쌓았다.

많은 걸 가진만큼 유혹에 노출될 확률 자체가 높아졌다.

이는 페미니즘 진영도 마찬가지인데 여성몫의 할당과 배려를 정책적으로 추진하면서 여성운동가 출신들이 온갖 자리에 진출했다.

인사, 금전, 횡령 등 보도가 되고 있지 않을 뿐 이들의 부패 또한 계속 증가한다.

이러한 사실은 여성이라는 성별이나 시민(인권)운동 이력이 딱히 부패와 반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기회(곳간)가 없어서 못했던 것일 뿐, 여성이나 운동가가 특별히 더 도덕적이지는 않다.

서는 곳이 달라지면 풍경도 달라지는 법이다.

인간이란 존재는 본래 불완전하고 부조리하다.

둘째, 진보의 선악이분법 의식구조가 부패라는 감각을 무디게 한다. 자신이 정의롭다는 걸 의심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을 일단 선한 것으로 규정한다.

그들은 권력과 자본이라는 거악과 싸우기 위해 악한 강자 대 선량한 약자라는 단순한 도식으로 무장했다.

자신들은 선량한 약자 혹은 약자의 편에 선 선량한 존재라는 도식을 한 번도 재구성한 바가 없다.

이러한 선악구도에 익숙해지면 상대의 미약한 선량함이나 나의 미약한 악랄함을 일절 고려하지 않게 된다.

강자에게도 나름의 선의가 존재할 수 있고 약자에게도 사악함이 존재할 수 있다는, 인간사에 만연한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 언더도그마에 빠진다.

현재 자신이 어떠한 지위에 있고 어떠한 권력을 가졌는지에 대한 객관적 이해를 하는 대신, 언제나 거대 악에 저항하는 약자이자 피해자인, 선량하면서 각성한 민중으로 자신을 정체화한다.

주요 일간지의 간부는 대통령도 함부로 하지 못하고 어떠한 권력자든 만날 수 있는 권력자다.

강남 아파트를 꿈꿀 수 없는 가난한 처지라고 스스로를 비하한들 그는 사회적 약자가 아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이 가진 강자포인트는 셈하지 않고 약자로 취급되는 포인트만 계산한다.

한겨레 석진환 기자의 칼럼

이러한 인식이 현실에서 어떻게 구현될까? 내가 법조 브로커에게 돈을 받는 것은 실제로 필요해서 사인간에 오간 금전거래이지만, 조선일보 간부가 돈을 받는 것은 부패권력의 카르텔에 복무하는 부정부패가 된다.

조선일보 간부가 급전이 필요해 지인에게 빌릴 수 있다는 가능성은 애초 배제하지만 자신은 그렇지 않다.

돈을 받더라도 빌린 것이고 아무런 대가성 기사를 써주지 않으면 되니까, 라고 생각하도록 사고체계가 작동한다.

내가 책값으로 받은 억대의 돈은 시장의 논리로 책정된 게 아니므로 부패가 아니게 된다.

실제로 그런(그렇다고 믿는)상황이므로 타인의 눈에 이게 어떻게 평가되는가는 애초 의미가 없다.

석진환 기자가 2021년 4월에 쓴 "[편집국에서] 선배들이 저 모양이란 걸 잘 봐두시라"라는 글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나는 안착했으니, 이제 진입장벽이 높아지길 은근히 바라는 기성세대의 ‘아파트 욕망’과도 한몸이다.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일찌감치 대형 로펌을 예약한 ‘금수저’는 이런 갈등에서 벗어나 있다."
그는 자신의 강남아파트 취득을 위해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수억원을 수수하는 와중에 기성세대의 아파트 욕망을 질타한다.

이것이 진보의 윤리감각이다.

출처: 미디어오늘 한겨레라는 진보매체의 기자들은 대체로 PC주의에 동조할 가능성이 높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편에 서겠다고 줄곧 선언해 왔고, 페미니즘과 PC주의 이슈에서 어떤 매체들보다 앞장서 이슈를 선도했다.

그들은 페미니즘과 PC주의를 고수하고 지지하는 것이 곧 정의라 생각하고, 이는 자신들의 주장이 곧 정의이므로 스스로를 정의의 투사 내지는 정의의 사도, 정의로운 존재라 생각하는 의식 속에 살게 한다.

이러한 의식이 내면화되면 자신들의 기사를 비판하는 시민을 정의에 반대하는 불의 혹은 악으로 규정하기 쉽다.

한겨레의 페미니스트 기자들이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곧장 여성혐오나 극우로 몰고가는 것의 예를 들 수 있다.

석진환 기자와 같이 86세대 언저리의 진보남성 지식인들은 페미니스트 여성기자들과 또 다른 면이 있다.

이들은 민주화운동에 복무한 일이 자부심으로 남아있는 집단이다.

'정의로운 나'라는 정체성을 유지하여야 존재의 의미를 평가받는다.

이들은 진영에서 도태되지 않고 여전한 정의로움을 입증하기 위해 PC주의와 페미니즘에 무지성적으로 합류한다.

또 한 가지 이들의 집단적 특성은 자신들이 당대의 가장 힙하고 쿨한 감각을 지녔었던 '섹시한' 존재라는 걸 여전히 인정받고 싶은 욕구다.

더 나은 페미니스트가 되겠다며 지면에 간증을 하는 그 세대 남성기자들-여성들에게 어필하고자 하는 욕망이 분명해 보이는-의 반성문과 자아비판에는 그러한 인식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셋째, 진보는 새로운 도덕을 만들어 정당화한다.

진보가 채택한 PC주의는 새로운 도덕을 추구한다.

새로운 도덕은 PC주의자들이 만든 도덕이다.

이들은 기존의 도덕관념에 자신들의 행동이 맞지 않으면 새로운 도덕을 만들어 정당화한다.

미러링이 그 예다.

정치적 올바름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지고 있는 욕망과 습속, 그로 인해 발현되는 생활상의 모든 행위를 자신들이 새롭게 만든 도덕질서(정치적 올바름)에 맞추도록 통제하려 한다.

방식은 훈계와 낙인이다.

PC주의자들의 공통적 특성은 도덕적 우월감'이다.

도덕적 우월감을 가진 이들이 PC주의에 빠지기 쉽고, PC주의에 빠질수록 도덕적 우월감은 강화된다.

이들은 도덕적 우월감으로 무장하고 동료시민에게 끝없이 훈계질을 한다.

약자감수성이 부족하다, 차별감수성이 부족하다, 인권감수성이 부족하다, 젠더감수성이 부족하다, 성인지감수성이 부족하다, 혐오와 배제에 빠져있다, 불편하다, 틀렸다가 이들이 훈계에 동원하는 말들이다.

이런 행동을 통해 그들이 얻는 것은 새로운 질서로 창출되는 제도권력을 차지하는 정치권력과 경제적 이득의 동시 획득, 그리고 통제권력이 가져다주는 우월감과 만족감이라는 정신적 이익이다.

출처: 뉴스A 현재 진보블럭을 이루고 있는 이들은 대부분 과거 민주화운동과 그 자장 안에 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진보적인 노선과 이념이 아닌 '부패한 악에 대항하는 도덕적이고 선한 나'를 무기로 싸웠다.

이러한 내력으로 인해 도덕적 우월감이 장착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들 또한 부패할 수 있다는 감각이 없으며, 불리한 상황이 되더라도 새로운 도덕개념을 만들어 정당화하면 그만이다.

무슨 짓을 해도 나는 저들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뿌리깊은 사고는 부패와 타락을 새로운 도덕이라 우기는 걸 가능하게 한다.

석진환과 신학림의 '명분' 또한 이렇게 만들어진다.

다음 글에서는 현재 진보의 부패와 타락을 보여주는 류호정과 같은 PC주의자와 페미니스트 진영의 사례를 들어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한다.(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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