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범죄 재판의 피고인은 권리대상으로 적시하지도 못하는 사법부

이선옥 승인 2022.12.30 19:17 의견 0
  12월 30일, 대법원이 <성범죄사건심리개선연구반>을 만들어 결과를 내놓았다며 홍보를 했다.
"성범죄피해자 증인신문, 어떻게 해야할까? [지금 알려드립니다!]
사회적 공분을 자아내는 아동,청소년 대상 성폭력 사건들..
재판은 형사재판 관여자들에 대한 권리를 보호하는 동시에
피해자의 권리 역시 두텁게 보호해야 합니다.
성범죄사건심리개선연구반에서는 미성년대상 성폭력범죄 재판 절차가
어떻게 운용되어야 할지를 연구했습니다.
그 내용, 영상을 통해 간략히 살펴보겠습니다."
  이 짧은 문장과 영상 안에 오늘날 성범죄를 대하는 사법부의 편견과 오류가 응축되어 있다. https://www.facebook.com/scourtkorea/videos/1252697278618141   몇 가지로 요약해보자.

1. "사회적 공분을 자아내는 아동, 청소년 대상 성폭력 사건들"

어떠한 범죄가 사회적 공분을 자아낸다는 이유로 더욱 특별하게 취급된다면 사법부가 여론재판의 장으로 변질되기 쉽다.

어떠한 범죄들은 잔인하고 극악무도해서 미디어에 선정적으로 노출된다.

그 결과로 더 국민적 공분을 자아내기도 한다.

그러나 정상적인 사법부라면 여론의 압박이라는 일시적이고 감정적인 요소에 휘둘리지 않아야 할 것이다.

재판절차의 변화를 연구하는 것은 당연한 업무이나 그 이유로 사회적 공분을 내세우는 것은 사법부 스스로 균형감각 면에서 우려를 자초하는 일이다.

2.

"형사재판 관여자"는 대체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사법부가 정의조차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용어를 공식적으로 쓰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

위 문장에서 '관여자'는 문맥상 '피고인'을 지칭하는 것으로 읽힌다.

그렇다면 왜 '피고인의 권리를 보호한다'고 말하지 못하는가? 피고인과 피해자의 권리가 다 보호되어야 한다는 말을 적시하는 게 잘못된 일인가? 성범죄 혐의로 기소된 형사재판의 피고인은 권리를 보장받아야 할 국민이 아닌가? 대체 누가 피고인 대신 '형사재판 관여자'라는 용어를 생각해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얼마전 사법부는 사회적 약자가 이해하기 쉬운 판결문을 도입했다고 자찬했는데, 평균적인 수준의 성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를 쓰는 것에도 문제의식을 가져주면 좋겠다.

3.

교묘한 말장난

'형사재판 관여자'라는 용어는 생각없이 쓴 말이 아니다.

해당 영상에서는 "형사재판 피고인은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다.

동시에 아동, 청소년 피해자의 권리 역시 두텁게 보호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피고인과 피해자(이 사안과 별개로 피해자라는 용어를 유무죄를 다투는 재판에서 선제적으로 적시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할 수 있으면서 글에는 관여자와 피해자라는 기이한 개념을 등치시켜 놓은 것이다.

굳이 이러한 말장난으로 얻고자 하는 결과가 무엇인가.

사법부가 사회적 공분을 자아내는 성범죄자의 권리를 보호한다는 인상을 주고싶지 않아서인가? 이러한 행위는 자칫 사법부가 성범죄 재판의 피고인에 대해 유죄추정을 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어떤 면에서든 부적절한 말장난이다.

4.

기울어진 권리보호

위 영상에서 피고인에 대한 권리보호의 '내용'을 언급하는 대목은 한 군데도 없다.

또한 성범죄사건심리개선연구반의 연구결과라 나열한 것들을 보면 현재 시행중인 사항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아동과 청소년, 장애인에 대한 재판과정에서의 보호는 현재도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를 더 두텁게 보호하기 위해 연구했다는 내용이다. 나레이터인 조정민 판사가 언급한 헌법재판소의 결정(2018헌바524)은 피고인의 반대신문권을 보장해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형사재판 관여자라는 두루뭉수리한 용어를 쓰면서 정작 해당 영상에서 피고인의 권리보장에 대한 언급은 단 한 대목도 없다.

연구보고서에는 포함됐는지 알 수 없지만 요약본에서 형식적인 균형으로라도 언급되지 않는 것을 보면 과연 피고인 권리 보장 방안이 연구가 되었을지...신뢰가 가지 않는다.

5.

성인지 감수성 재판 강조

해당 영상에서 피해자 권리보호를 주장하기 위해 예시로 든 박정화 대법관의 판결은, 대법원이 판결문에 성인지 감수성을 적시한 두 번째 사례다.

최초 권순일 대법관이 판례를 만든 이후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개념이 사실상 증거법칙으로 도입됐다.(이선옥닷컴 기사 링크참조) 사법부가 증거 대신 감수성으로 재판을 하느냐는 비판이 제기되는 상황에서 해당 판결을 예시로 든 자체가 이 연구반이 이미 증거와 법리 대신 '젠더감수성, 피해자 중심주의, 2차 가해론'등에 입각해 성범죄 사건을 대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들 수밖에 없다.

6.

신뢰관계인 동석이라는 제도의 허점은?

나레이터 조정민 판사는 피해자 보호를 위해 신뢰관계인 동석과 진술을 보장하겠다고 한다.

성폭력범죄 재판은 피해자의 진술이 중요한 증거이기 때문에 피해자가 안정된 상태에서 진술해야 한다고 한다. 조정민 판사는 '증인이 당황해서 한 증언은 진실과 부합하다고 하기 어렵다'고 한다.

어떻게 단정할 수 있는가? 당황 속에서도 진실을 증언할 수 있고, 침착한 상황에서도 거짓을 말할 수 있는 게 인간이라는 존재다.

어떠한 위협도 없는 안정된 상태라고 해서 진실만을 말한다는 공식은 성립할 수 없다. -해바라기 센터의 예를 들어보자. 조정민 판사는 진술조력을 위해 해바라기 센터에서 증언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이러한 조력기관에서 벌어지는 무고의 위험은 어떻게 예방할 것인가? 해바라기 센터 상담사가 미성년 장애인에게 유죄 진술을 유도해 무고한 남성이 6년형을 선고받은 사건이 있다.

신뢰관계인으로 동석한 장애여성의 고모 또한 남성의 유죄를 주장하고 미성년장애인인 조카에게 유죄를 증언하도록 종용했다.

사법부는 해바라기 센터에서의 증언을 중요한 증거로 인정했다. 재판부는 네 차례나 진술을 번복한 장애여성에 대해 "만약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허위로 꾸민 것이라면, 피해 장소와 횟수, 숙박업소 상호를 번복함으로써 진술의 신빙성을 의심받을 이유가 전혀 없다.

그럼에도 지적 능력이 부족한 피해자가 피해 장소와 횟수, 업소 상호를 번복하였다는 것은 실제 피해를 입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고 판결하면서 6년형을 선고했다. (기사1: 장애인은 거짓진술을 하지 않는다고 확신한 재판부와 강간사건의 반전) (기사2: 여가부의 자랑 해바라기 센터의 실태: 유죄추정으로 가해자 만들기) 그러나 결국 장애여성이 거짓말을 시인하고 그녀를 사주한 고모가 구속되면서 남성은 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이 사건에서 유죄의 진술을 유도한 해바라기센터는 어떠한 책임을 졌는가? 이런 제도의 구멍을 어떻게 보완할 것인가에 대한 연구는 진행되고 있는가?

7.

성범죄 피해자와 가해자에 대한 편견의 강화

해당 영상에 피해자로 묘사되는 대상은 일관되게 여성이다.

아동이나 청소년 대상 성범죄는 여자 아이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러한 영상에는 피해자를 늘상 여성으로 묘사해 언제나 여성만이 피해를 입고, 남성은 언제나 가해자라는 편견을 강화한다.

성별고정관념을 강화하는 모든 표현에 비판을 가하는 여성단체들은 여성만을 피해자로 묘사하거나, 남성을 가해자로 묘사하는 것에는 비판을 가하지 않는다.   대법원에서 홍보하는 위의 영상은 정작 별다른 내용이 없다.

성범죄 피해자를 보호하겠다는 사법부의 의지는 이해한다.

그러나 사법부는 피해자를 선제적으로 규정하는 기관이 아니다.

형사재판은 근본적으로 국가 대 개인이라는 극단적인 불균형 구도에서 이뤄지는 절차다.

그래서 절대적 약자인 국민 누구라도 이 절차 안에서 부당한 권리침해가 없도록 보호받아야 한다. 성폭력 피해를 호소하는 피해자도 국가의 보호가 필요하고, 형사재판의 피고인으로 국가라는 상대와 다퉈야 하는 피고인 또한 취약한 지위의 국민이다. 변화하는 현실에 맞게 사법부도 계속 발맞추겠다고 하는데 현재 성범죄 재판에서 새롭게 고려되어야 할 현실은 어떤 것일까? 지금의 성범죄 재판은 오히려 유죄추정, 증거 대신 성인지감수성, 여론재판 등으로 기소 전 단계부터 피고소인들의 권리가 제대로 보장받지 못한다는 문제제기가 늘고 있는 상황이다. 사법부가 변화하는 현실을 인지한다면 피해자 보호를 두텁게 하기 위해 고안해 낸 여러 제도들의 부작용도 살피고, 그로 인한 또 다른 피해는 어떻게 예방할 수 있는지, 피해자는 어떻게 구제할 수 있는지, 성인지 감수성이 재판관들에게 오히려 피고인에 대한 유죄의 편견으로 작동할 우려는 없는지에 대해서도 함께 연구해야 할 때다. 오늘의 사법부가 성범죄 사건에서 공정한 판결을 내리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지, 국민들의 신뢰를 받고 있는지 돌아보는 작업이 필요하다.

부디 <성범죄사건심리개선연구반>의 연구결과가 편견에 기대지 않은 것이기를 바란다. *나레이터인 조정민 판사가 한 언론의 인터뷰에서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내놓은 것을 보았다.(기사링크) 우려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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