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정 전 지사 대법판결을 앞두고: 신분은 곧 위력이 아니다.

이선옥 승인 2019.09.08 22:29 의견 0
안희정 전 지사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내일(9월 9일)로 다가왔다.

안 전 지사는 1심에서는 무죄를, 항소심에서는 3년 6월의 중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보도에 따르면 항소심에서 검찰측이 새롭게 제시한 증거는 없었다.

특히 성인지감수성이라는 개념이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1심과 2심 모두 성인지감수성을 언급하고 이를 고려한 판결임을 명시했다.

같은 상황과 진술을 두고 정 반대의 결과가 나온 이유는 ‘감수성’이 관점과 해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증거와 법리에 따라야 할 사법적 판단에 성인지감수성을 사실상 새로운 증거법칙으로 전격 도입한 대법원은, 증거재판주의와 의심스러울 때에는 피고인의 이익으로와 같은 형사법의 대원칙이 훼손되고 있다는 비판에 책임을 느껴야 한다. 정국은 온통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자 지명 사안에 쏠려있지만, 나는 안희정 전 지사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가늠할 중요한 사건이라 생각한다.

페미니즘 바람이 불고, 미투 운동이 시작된 최근 4년 동안 우리 헌법기관들인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는 모두 위헌적인 행위를 앞다퉈 실행했다.

약자(여성)를 위한다는 이유는 하나하나 위헌 여부를 따져봐야 할 정책들을 밀어붙이는 명분이 됐다.

특히 사법부는 판결 즉시 개인의 권리를 제한하고 삶에 즉각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어떤 기관보다 신중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럼에도 성인지감수성을 판결에 도입한 과정처럼 적정절차에 대한 숙고조차 없는 모습은 위험한 신호다.

적어도 성범죄에 한해서는 남성과 여성의 법률적 지위가 동등하지 않다고 느끼는 국민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안타까운 현실이다. 신분은 곧 위력이 아니다 늦은 감은 있으나 성인지감수성에 대한 비판은 몇몇 법률가들을 통해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그러나 안희정 전 지사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법리적 쟁점인 ‘위력’의 구성요건해당성(범죄가 성립하기 위하여는 구성요건해당성과 위법성 및 책임이 있어야 한다.

이를 범죄의 성립조건이라고 하며, 이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갖추지 못한 때에는 범죄는 성립하지 않는다.(이재상, <형법총론> 제5판, 박영사, 2004, 69면)
)에 대한 문제제기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번 판결이 판례로 남는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법리적 쟁점인데 1심부터 별다르게 주목받지 않아왔다.

1심의 재판부도 ‘위력은 있었으나 자유의사를 억압할 정도로 행사하지 않았다'는 판결을 했고, 안희정 전 지사의 변호인단도 김지은씨 증언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데 주력하면서 위력의 구성요건해당성을 안이하게 판단한 것 같다. 범죄는 행위의 존재를 요건으로 한다.

형법이 적용되기 위해서는 구성요건에 해당하고 위법하고 유책한 ’행위‘를 하여야 한다.

행위는 모습을 갖는다.

부드러운 모습, 강한 모습, 빠른 모습, 느린 모습 등이다.

예를 들어 폭력적인 모습을 갖는 행위를 폭력의 행사, 즉 폭행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위력의 행사는 ‘위력적인 모습을 갖는 행위’를 말한다.

이는 행위가 있든 없든 자체로 존재하는 속성인 ’신분‘과는 중첩되지 않는다.

어떠한 신분이 곧 위력적인 ‘행위의 모습’을 가진다는 주장은 논리적으로 이미 틀렸다.

행위가 없으면 행위의 모습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안희정 전 지사의 유죄를 주장하는 이들은 도지사라는 신분과 지위만으로 위력을 행사한 것이라 주장한다.

해악을 고지하거나 불이익을 주겠다는 식의 언동이 없었어도 이미 도지사직에 있는 것만으로 상대방의 자유의사를 제압하는 모습을 지닌 행위를 한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뜻이다. 만일 이런 법리 해석이 적용된다면, 위력간음죄는 ‘상급자라는 신분’과 ‘간음’이라는 행위 두 가지 요소만으로 성립한다.

법률조항에 따라 원래 추가로 입증되어야 할 위력의 행사, 즉 위력적인 모습을 지닌 행동을 했다는 사실을 검사가 입증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결국 하급자가 자신은 진정한 자유의사로 간음한 것이 아니라고 일관되게 주장하기만 하면, 위력간음죄 유죄는 필연적인 귀결이 된다. 형법 제303조는 아래와 같다. 제303조(업무상위력 등에 의한 간음) ①업무, 고용 기타 관계로 인하여 자기의 보호 또는 감독을 받는 사람에 대하여 위계 또는 위력으로써 간음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개정 1995.

12.

29., 2012.

12.

18.>
②법률에 의하여 구금된 사람을 감호하는 자가 그 사람을 간음한 때에는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개정 2012.

12.

18.>
안 전 지사에 대한 유죄판결이 확정되면 우리 사법부는 형법 303조 1항과 2항이 굳이 분리되어있는 의미를 없애게 된다.

오로지 의회가 명시적으로 제정한 법률에 따라 범죄행위를 처벌해야 한다는 죄형법정주의에 따른 국민의 기본권을, 단순한 판결행위로 명백하게 침해하는 행위다.

이러한 판례의 성립이 가져올 혼란과 변화가 과연 더 공정하고 합리적인 법치국가의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인가. 약자라는 비판의 성역 또 하나, 앞으로 우리사회의 변화에 중요한 시금석이 될 법리적인 쟁점을 법률가들이 논쟁적으로 이야기 하지 않는 자체가 지금 우리사회의 편향과 억압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진보적 법률가단체인 민변여성인권위원회는 2심 재판부에게 유죄판결을 압박하는 입장문을 내며 성인지감수성을 더 확고한 증거법칙으로 적용하라 주장한다.

안희정 전 지사의 무죄를 주장하거나, 김지은씨 증언의 신빙성을 의심하는 사람들은 반여성주의자에 2차 가해자라 매도당한다.

행정부와 입법부는 공공연하게 안희정 전 지사를 유죄라 단정하고, 여성운동가들은 사안을 공정하고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공론장을 막아선다.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반대한다는 오명을 감수하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특히 남성들은 스스로를 기득권을 가진 강자로 규정한 후, 여성은 약자이므로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자기검열의 덫에 빠져 입을 다문다.

전문가로서나 양심적 지식인으로서 책무보다 성별 정체성을 우선에 둔 판단은 무지를 기반으로 한 비겁으로 나타난다.

다수대중과 진영에서 비난받을 위험과 대세에 역행한다는 부담을 회피하고 싶은 마음은, 약자를 위하려는 선한 마음과 만나 결국 헌법기관들의 위헌적 행위가 무리 없이 진행되도록 하는 토대가 됐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성범죄에서 증거법칙의 변화와 유죄추정 판결추세에 대한 비판은 그동안 성역이었다.

오히려 성인지감수성에 따른 판결은 공공연하게 사법 트렌드라 불리며, 안희정 전 지사에 대한 판결도 이 트렌드에 따라 유죄로 내려질 거라는 예상이 우세하다. 더 덧붙일 말 없이, 법리에 따라 공정하고 합리적인 판결이 내려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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