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옥의 눈] 약자 대신 취약성으로

이선옥 승인 2020.01.22 10:29 | 최종 수정 2024.01.29 19:49 의견 0

누구나 생애주기와 사회·경제적 조건에 따라 취약한 상황에 처한다.

중요한 건 개인의 정체성이 아니라 사회구성원의 취약한 상황을 해결하는 일이다.
고통과 권리에 서열을 매길수록 불행을 경쟁하게 된다.

주간경향 연재-12(원본링크)

‘약좌(弱座)의 게임’을 시작해보자.

명절 독박 노동에 스트레스를 겪는 임산부 며느리.
아내와 엄마에게 비난당하는 실직상태의 큰아들.
공무원시험 낙방 후 알바를 전전하는 20대 작은딸(아들).
성적압박 때문에 자살하고 싶은 고3 막내.
명퇴 후 퇴직금을 털어 넣은 창업에 실패하고 우울증에 걸린 아버지.
청소일로 생계를 감당하면서 직장 갑질에 시달리는 어머니.
아들의 창업에 노후자금을 지원했다가 폐지를 줍게 된 할아버지.
치매를 앓고 있지만 방치된 할머니. 일하다 사고를 당해 장애인이 된 작은아버지.
일용직으로 일하며 무시로 성희롱을 당하는 베트남 출신 작은어머니.


명절에 모인 이들 가족구성원 가운데 누가 최고 약자의 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있을까?

‘약좌의 게임’은 최근 자주 볼 수 있는 피해자 되기 현상을 인기 시리즈 <왕좌의 게임>에 빗댄 표현이다. 저마다 가장 피해가 큰 약자라고 믿으며 지지와 보상을 요구하는 세태를 꼬집은 말이다.

명절마다 돌아오는 ‘약좌의 게임’에서 전통의 승자는 며느리(여성)였다. 요즘은 여성과 청년이 경합을 벌이는 추세다.

‘평등한 명절’, ‘청년에게 취업·결혼 질문 금지’는 명절의 단골 현수막이 됐다. 그럼 나머지 가족구성원의 불행은 어떤 순서로 취급하면 될까? 판단과 해결의 기준을 강자와 약자,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분법으로 재단하는 사회에서 약자 되기는 생존과 복지를 위한 필수 전략이 된다.

문제는 약자 규정과 배려가 본래 목적대로 공동체의 결속을 강화하고 있는가이다.

명절을 앞두고 찾은 동네 미장원에서 주부대상 토크쇼 성토대회가 벌어졌다. 할머니들은 ‘시어머니는 악마, 며느리는 피해자’로 묘사하는 방송 때문에 스트레스라고 입을 모았다. 부모 부양을 당연히 여기고 자식을 위해 희생했지만 그들에게 기대는 건 불가능한 세대다. 보상은 막혔는데 사회적 지탄의 대상마저 되니 시어머니들 또한 명절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기 다른 이유로 불행하다는 말이 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위의 사례 가운데 하나쯤은 명절에 만나는 가족 중 누군가 겪고 있는 현실이다.

모든 며느리가 명절증후군에 시달리지 않고, 건물주의 자식은 취업경쟁에서 열외일지라도 누구나 생애주기와 사회·경제적 조건에 따라 취약한 상황에 처한다. 부자 노인도 질병에는 취약하고, 건강한 청년일지라도 실직 상황은 고통이다.

여성과 청년 모두 집단적으로 불행하지는 않지만, 누구나 임신·실업·사고·장애·질병·빈곤·이주노동과 같은 문제를 한 번쯤은 겪는다.

중요한 건 개인의 정체성이 아니라 사회구성원의 취약한 상황을 해결하는 일이다. 고통과 권리에 서열을 매길수록 불행을 경쟁하게 된다.

대결보다는 해결을 중심으로, 약좌의 게임 대신 취약성을 대응의 기준으로 삼는 전환이 필요한 이유다. 명절만이라도 서로의 취약성을 보듬고 보완해주는 날이었으면 한다.

독자 여러분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를, 그리고 우리 모두 한 가지라도 취약함에서 벗어나는 한 해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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