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지방법원 정욱도 부장판사님께

변태적 욕망과 판결은 관련이 없습니다

판사님의 법정에 선 어느 남성은 강간 문화에 젖은 본래적 범죄자가 아닙니다. 헌법에 의해 동등한 법률적 지위를 보장받고, 법리에 따라 공정한 판결을 구하는 동료시민입니다. 판사님의 이 글이 위험할 뿐 아니라 헌법기관으로서 부적절한 이유는 성별을 이유로 남성이라는 공동체 구성원의 법률적 지위를 위협하기 때문입니다.

N번방을 포함한 많은 성범죄 사건에는 여성 남성 모두가 피해자와 가해자로 존재합니다. 피해는 상황이지 정체성이 아닙니다.

 

정욱도 판사님께.

“‘강간 문화’를 간과하는 나의 법관 동료들에게”라는 제목으로 <시사인>에 쓰신 편지를 보았습니다. 법관이 아닌 제가 굳이 반론을 쓰는 이유는 그 글이 판사님 개인이 아니라 사법기관의 공정성에 대한 신뢰를 훼손하며, 동료에 대한 예의는 차치하고 법관에 대한 모욕과 사회적 편견을 조장하는 위험한 글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면 판사님이 지금 성찰하실 지점은 강압적 성관계에 대한 판타지가 있고 ‘강간문화’에 젖어 살아온 판사님 자신이 그럼에도 지금 왜 강간범이 되지 않았는가 하는 점입니다. 당연히, 실제로 강간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남성뿐 아니라 문명화된 법치국가에서 살아가는 시민들은 범죄행위와 판타지를 구분합니다. 강간이 판타지로 존재할 수 있는 자체가 문명화의 증거이며, 판사님이 가지고 계신 ‘강압적 성행위에 대한 판타지’를 판타지라 명명할 수 있는 것도 우리가 문명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강간 문화라는 전제는 틀렸습니다

지난해 제가 토론자로 참여한 한 행사에 남성페미니스트인 86세대 남성 교수께서 판사님과 같은 발언을 하셨습니다. “남성들은 잠재적 가해자다, 집단으로서 남성은 가해자다, 어릴 때 여자애들의 치마를 들추며 아이스께끼를 하고, 집에까지 쫓아가서 번호를 따오던 행위들이 돌아보면 다 성범죄였다.” 남성들이 ‘강간 문화’를 공유하기 때문에 성범죄가 일어난다는 여성 페미니스트 패널의 주장을 지지하며 자신의 경험을 강간 문화의 근거로 증언하셨습니다. 이 발언에 달린 남성들의 댓글은 대부분 ‘어느 시대를 살다 오신 분이냐’는 항의였습니다.

판사님이, 남성 법관 동료들이 간과하고 있다고 주장하신 ‘강간 문화’는 여성운동 진영에서 들고나와 실체가 있는 개념으로 고착시키려 하는 용어입니다. 우리 형법 제297조는 강간을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을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법관인 판사님 뿐 아니라 시민들 누구나 강간은 엄중한 범죄행위임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성운동 진영은 강간이라는 명확한 개념에 문화라는 모호한 용어를 조합하면서 강간의 범주를 확장하는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남성이 불편하게 쳐다보는 것은 시선 강간이라고 하는 등 일상의 언어, 습관, 행동과 기호화된 모든 표현에 강간 문화가 만연해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를 규정하는 기준은 여성들이 느끼는 불쾌감, 불편함, 수치심 같은 주관적 감정입니다. 언어의 조작과 개념화를 통해 원하는 제도를 만들고 대중의 인식을 통제·개조하려는 운동의 전략입니다.

이 운동의 결과는 강간을 일부 범죄자의 반사회적 행위가 아니라 남성 일반이 일상적으로 저지르는 나쁜 행위로 격하시킵니다. 강간의 범주를 넓히면 강간범이 늘고, 강간범이 늘면 강간이 만연한 강간 공화국이라는 여성운동의 주장은 참이 됩니다. 세계 최고의 성평등 국가라는 스웨덴도 강간의 범위를 넓힌 결과 강간 범죄율이 높아져 강간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쓰기도 했습니다.

강간 문화가 강간범을 만든다는 논리는 객관적으로 입증된 바 없습니다. 입증할 수 없으니 둘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고 주장합니다. 판사님이 말씀하셨듯 문화는 힘이 셉니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사고방식에 침투하는 힘이 있습니다. 법리를 기본으로 사고하는 훈련에 익숙한 판사님조차 여성운동의 이데올로기를 문제의식 없이 습득하셨듯이 말입니다.

판사님이 성범죄의 ‘주적’으로 규정한 ‘남성들의 강간 문화’는 강간이나 성폭행같이 명확한 개념이 아니라 강간의 범주를 넓히고 남성 일반을 강간 범죄자로 규정하는 위험한 언어조합입니다. 강간 문화라는 용어의 정의가 무엇인가요? 우리는 이를 세밀하게 논의하여 명료화한 적 없습니다. 논증이 없는 권리 주장은 탄핵되어야 하듯, 규범과 가치를 혼동시키는 특정 이념의 전략적 운동용어에 우리가 시민권을 부여할 이유는 없습니다.

 

변태적 욕망과 판결은 관련이 없습니다

판사님의 글에서 우려스러운 또 한 가지는 남성성에 대한 자의적인 규정과 왜곡입니다. 판사님은 자신의 성적 판타지를 포함한 남성의 성적 욕망을 강간 문화와 결부시킨 후 악하고 반사회적인 것으로 전제합니다. 강간 문화를 떠받치는 근본적인 논리입니다. 이 논리가 위험한 것은 결국 남성 자체의 속성을 반사회적으로 규정하는 인종주의적 발상과 같은 구조라는 것입니다.

판사님은 남성의 악한 본성을 교정하는 답은 ‘진정한 남성성’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여성을 동등하게 존엄한 존재로 받아들이는 인지력, 자신의 행동이 어디까지 용인될지를 가리는 분별력, 옳지 않은 일을 자발적으로 거부하는 자제력, 본성의 판타지가 문명사회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걸 알고 실행에 옮기지 않는 힘, 지성과 자제와 통제의 능력’, 판사님은 이를 진정한 남성성으로 정의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규범은 남성만이 이행해야 할 덕목이 아니라 근대화된 법치국가를 살아가는 선량한 시민이 가져야 하는 당연한 미덕에 해당합니다.

판사님이 전제한 왜곡된 남성성과 해결책으로 제시한 진정한 남성성은, 남성이라는 종(種) 자체가 악한 본성을 지닌 존재이므로 이를 교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우생학적 발상이며 매우 위험한 논리입니다. 이런 주장이 공적 매체에 문제의식 없이 실리는 현실이 개탄스러울 따름입니다. 여성성이라는 생물학적 본질을 논하려 하면 여성운동은 이를 왜곡된 젠더 관념이라며 비난해 왔습니다. 그러나 역으로 남성을 비난할 때는 진화심리학 이론을 어설프게 가져다 쓰고 아무도 이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변태적 욕망과 판결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판사님이 스스로 입증하고 계시듯 내 안에 변태가 있건 없건 그게 판결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법관 하나하나가 곧 헌법기관입니다

“교육을 통한 문화 교체는 근본적이긴 하되 너무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여기서 단기적 해결책이자 실효적 억제 수단인 형사사법의 역할이 부각된다”

제가 반론을 쓰게 된 이유는 판사님이 쓰신 이 구절 때문입니다. 헌법기관인 법관이 형사사법을 개인적 신념과 가치지향의 실현 도구로 사용하겠다는 선언을 이토록 쉽게, 그것도 공개적으로 하시다니요. 국가가 부여한 형벌권을 대하는 판사님의 인식이 놀랍습니다. 더 나아가 개인의 경험을 동료 남성 법관들에게 강제 적용시키며 성범죄의 공모자로 규정하는 대목에서는 놀라움을 넘어 우려가 들었습니다. 저는 동료 법관들을 모욕하는 발언으로 느꼈습니다. 과연 우리 사법부를, 개인 개인이 헌법기관인 법관들을 믿을 수 있을지 판사님의 글을 읽으며 회의가 들었습니다.

판사님은 ‘법관은 범죄의 충격을 일단 피해자의 시각에서 느껴봐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을 포함한 남성 법관들이 강력한 편향을 가지고 있다며 강간 문화를 타파하자고 주장하십니다. 이를 현실의 법정에서 구현하기 위해 여성 피해자의 시각에서 느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법관은 선제적으로 피해자를 규정하지 않아야 합니다. 무죄 추정의 원칙은 형사법의 근간입니다. 법정은 피해를 가리는 곳이며 법관은 어떠한 예단이나 편향에 기대지 않고 공정하게 가해자와 피해자를 가려내고, 가해자에게 법리에 근거한 처벌을 내리는 일을 의무로 합니다.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또 다른 편향에 기대라는 요구는 해법이 될 수 없으며 오히려 사법기관에 대한 신뢰를 훼손합니다.

판사님의 법정에 선 어느 남성은 강간 문화에 젖은 본래적 범죄자가 아닙니다. 헌법에 의해 동등한 법률적 지위를 보장받고, 법리에 따라 공정한 판결을 구하는 동료시민입니다. 판사님의 이 글이 위험할 뿐 아니라 헌법기관으로서 부적절한 이유는 성별을 이유로 남성이라는 공동체 구성원의 법률적 지위를 위협하기 때문입니다. N번방을 포함한 많은 성범죄 사건에는 여성 남성 모두가 피해자와 가해자로 존재합니다. 피해는 상황이지 정체성이 아닙니다.

저는 만일 성범죄의 당사자로 연루된다면 판사님의 법정에 서고 싶을 것이며 판사님이 여성인 제게 유리한 판결을 내리리라 믿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남성이라면 이 글에서 드러난 판사님의 성별 편향과 위헌적 인식을 이유로 기피 신청을 할 것입니다. 판사님의 글은 강간범을 줄이는 데 기여하는 게 아니라 이처럼 사법부의 공정성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립니다.

판사님은 본인 뿐 아니라 동료들을 범행의 공모자로 묶으셨습니다. 스스로 강간 범죄의 공범이라고 자백하고 속죄하시려면 전자발찌를 차거나, 범죄자는 수행할 자격이 없는 법관직을 내려 놓으시는 방법도 있습니다. 실천이 따르지 않는 극적 참회로 나는 다른 남자들과 다르다는 도덕적 우월감 외에 무엇을 얻으셨습니까.

 

욕망해도 괜찮습니다

강간은 흉악한 강력범죄이며 입에 올리기조차 부담스러운 용어입니다. 그동안 우리 사회가 공유한 강간이라는 범죄에 대한 인식은 그래왔습니다. 그러나 강간 문화를 언급하면서 저는 이 단어를 무시로 써야 했습니다. 여성으로서 이 용어를 입에 올리기 싫지만 강간 문화가 이 단어를 아무것 아닌 듯이 쓰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용어의 오남용이 가져온 또 하나의 부작용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쁜 짓 하지 않고 살아야 한다는 규범을 준수하고, 실제로도 그렇게 살아갑니다. 판사님이 지금 강간범으로 살고 있지 않은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건 욕망을 죄악시하는 판사님의 인식에 대한 안타까움입니다. 저 또한 다양하고 강도 높은 성적 판타지를 가지고 있으며 이를 구현할 때면 다른 어떤 행위보다 강렬한 즐거움을 느낍니다. 판사님이 부끄러워하는 집요하고 강렬한 성적 욕망, 강압적 성관계의 실행이나 관찰을 원하는 그 본성은 악한 게 아니라 지극히 자연스러운 인간의 욕망 중 하나일 뿐입니다. 판타지라는 개념이나 상상 속의 욕구는 현실에서 범죄로 행하지 않는 한 처벌의 대상인 반사회적 행동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판사님의 욕망은 참회의 제단에 고해성사로 바칠 부끄러운 악이 아니라, 같은 욕망을 가진 파트너를 만나 즐겁게 실행한다면 삶을 풍요롭게 할 행복의 요소입니다. 존중받아 마땅한 개인적 취향이니 부디 부끄러워 하거나 죄악시 하지 마세요. 욕망해도 괜찮습니다.

이선옥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