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범죄: 페미니즘적 해결방식은 답이 될 수 없다

오직 성범죄만이 우리가 합의한 근대적 원칙과 가치를 거꾸로 돌리고 있다

 

2차 가해의 범주가 무한확장되고 있다

2차 가해는 성범죄 피해자에 대한 조사나 수사, 재판 과정에서 발생하는 또 다른 폭력적 상황을 방지하고자 나온 개념이다. 고소인(피해주장자)이 곧 피해자이거나 약자라서가 아니라 내밀하고 수치스러운 부분을 공개해야 하는 성범죄의 특성이 고려되지 못한 채 다른 범죄들처럼 무신경하게 처리하는 데서 오는 피해를 막자는 게 핵심이다. 그러나 좋은 의도와 관계 없이 지금 2차 가해는 다른 의견을 반대하는 도구로 쓰이고 있다.

박원순 시장의 비극적 죽음 이후 다시 한번 2차 가해와 피해자 중심주의가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다. 미래통합당과 페미니스트 진영은 서울특별시장으로 치르는 5일장을 2차 가해라며 반대했다. 자살 자체가 2차 가해라는 주장부터, 추모와 애도, 대대적인 장례 자체가 피해자를 억압하는 2차 가해라며 중단을 요구하거나, 피해자의 편에 서기 위해 조문하지 않겠다는 국회의원들도 나타났다. 고소인의 법률대리인은 2차 가해에 대해 침묵하는 것도 2차 가해라는 초유의 발언까지 하고 있다. 2차 가해자라는 올가미에서 벗어나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2차 가해와 피해자 중심주의의 문제는 기준이 무엇인가, 누가 그 기준을 정하는가와, 진실규명을 위한 모든 의견을 묵살하는 도구로 활용되는 데에 있다. 피해자 중심주의는 페미니스트들도 제대로 정의하지 못하고 상황에 따라 자의적으로 적용되어 혼란스러워한다. 내부에서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2차 가해 오남용자들은 피해를 주장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불편한 혹은 피해자와 감정적 공감자인 자신들이 불편하다고 느끼는 모든 언행을 금지한다. 피해자가 감정적으로 위축되거나 불편하거나, 압박을 느끼면 가해라는 것이다. 피해자의 ‘감정’ 대리인들은 당사자보다 더 엄격하게 모든 상황을 통제하려 한다.

박원순 시장에 대한 장례와 애도는 불가피하다. 5일장이 아니었다면 2차 가해라고 하지 않았을 것인가? 통제할 수 없는 대중적 추모는 어떤가? 통제권 밖에 있는 대중의 극단적 언사를 부각해 합리적 의문이나 견해표명을 모두 2차가해로 금지하는 행위가 규범으로 작동하고 있다. 신상 캐기나 근거 없는 비난은 그 자체로 권리의 침해여서 문제다. 그건 2차가해라 엄단해야 할 행위가 아니라 본디 처벌받는 행위다.

2차가해와 피해자 중심주의는 약자를 위한 정의가 가동되도록 하겠다고 만든 개념인데, 여기서 약자란 피해를 입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지, 신분 자체로 약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피해는 상황이지 고유한 정체성이 아니며, 실체적 진실이 규명되어야 피해자와 피해사실이 확정된다. 즉, 정의를 위한 진실규명의 과정이 없이는 약자를 위한 정의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해야 한다.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

이 사태는 성범죄에 대한 페미니즘적 해결방식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필연적 결과이다. 미투운동 이후 우리 사회는 성폭력, 성범죄에 대해 페미니즘이라는 이념과 그에 따른 운동을 제도와 문화로 급진적이고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다. 여성단체는 정치권과 공직사회에 만연한 위력 성폭력을 확인했다며 전수조사와 제도정비를 요구한다. 성인지감수성을 다시 점검하고 성교육을 강화하고 더욱 엄벌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치권 모두 이에 호응하고 있다. 과연 이것이 해결책인가? 그렇게 하면 불행한 사태를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박원순 시장은 성희롱 사건의 유죄 판결을 끌어내고 여성운동을 지원한 수준이 아니라 그 자신이 여성운동가였던 사람이다. 지금 활발하게 활동하는 여성단체들 대부분 박원순 시장의 서울시에서 다방면의 지원을 받아 사업을 해왔다. 그런데 성교육의 부재나 성인지감수성 부족으로 이번 사태가 일어났다고 할 수 있을까? 한국에서 성인지감수성이 가장 높은 사람이었다. 왜 이런 사람마저 목숨을 버리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가를 생각해볼 때다. 범죄만큼 죽음 또한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페미니스트들은 잊고 있다. 그녀들도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이 살아있기를 원한다. 그렇다면 왜 죽는지에 대해 차분히 분석하는 게 순서다. 그런데 오직 가해자로 단정하고 범죄의 재발 방지만을 이야기한다.

이런 식의 페미니즘적 해결방식은 비극을 막을 수 없다. 성범죄에 대한 페미니스트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해온 해결방식을 멈추고, 본래 우리가 합의했던 원칙을 규범으로 작동시켜야 한다. 심판의 권한을 여성단체가 아닌 규범으로 가져와야 한다. 여성단체에게 제도보다 우위에 선 공적 권한을 주어서는 안 된다.

 

페미니즘이 아닌 본래 우리의 규범으로

근대법치국가에서 범죄와 범죄자에 대해 합의한 규칙은 이런 것들이다.

  • -사적 제재를 허용하지 않고
  • -적정절차에 의해 처벌을 행하며: 무죄추정의 원칙, 증거재판주의, 형사법 등
  • -처벌 후에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복귀하도록 사회가 돕는다.
    두 번째 기회를 주는 것이 우리가 합의한 근대적 인권의 원칙이었다.

오직 성범죄만이 우리가 합의한 근대적 원칙과 가치를 거꾸로 돌리고 있다. 미투운동은 폭로라는 방식 자체가 근본적으로 사적 제재에 해당한다. 태생적으로 적정절차 위반을 내포한 방식인데다, 증거가 아닌 폭로가 진실을 대체하고, 진실규명에 대한 견해는 2차 가해 압력과 피해자 중심주의에 막힌다. 피해자에 대한 연민만이 강요되고, 다른 연민은 비인간적인 것, 범죄행위, 가해행위로 규정되고 매도된다. 성범죄와 관련해서 페미니즘은 인간적인 고려의 공간을 일체 용납하지 않아왔다.

박원순 시장의 죽음 이후 남윤인순, 정춘숙, 권인숙 의원 등 내로라 하는 페미니스트들은 모두 당황했다. 피해를 주장하는 여성의 편에 즉각 서기보다 침묵했다. 침묵한다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침묵했고, 추모는 2차 가해라는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에도 추모의 메시지를 올렸다. 이들의 반응은 충분히 납득 가능하다. 가해자로 지목된 고인과 맺은 인간적 관계가 있고, 삶의 궤적을 잘 알기 때문에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들이 직접 겪어보니 그간 가해자로 지목된 이에게 침묵하거나, 비난하지 않은 사람들이 왜 그랬는지 알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녀들이 보인 태도는 그간 페미니스트들이 비난해왔던 것들이다. 즉각 비난에 동참하지 않거나, 침묵하거나, 가해 지목자에 대한 미온적인 반응은 모두 가해자의 편에 선 2차 가해로 규정됐다. 이들은 이런 분위기가 성범죄의 재발을 장려하고 피해여성을 위축시키는 남성중심 카르텔이라며 맹비난했다. 인간적 고려의 공간을 일체 용납하지 않는 페미니즘적 해결방식이다. 이런 운동을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 모두 제도와 문화로 수용하고 있다.

성범죄는 전자발찌, 신상공개, 심지어 신체훼손형까지 존재한다. 재범률이 높은 다른 범죄자에게는 하지 않는 조치가 오직 성범죄자에게는 가능하다. 성범죄는 단 한번이라도 원 스트라이크아웃으로 재생의 기회가 없다. 공동체에서 영원히 추방당하고 평생을 낙인찍힌 채 살아가야 한다. 적정절차가 무시된 해결책을 헌법기관들이 다 정의라 인정했다. 미투법안은 여전히 대기중이며, 행정부와 정치권은 엄벌과 회생불가를 여전히 외치고 있다. 사법부는 성범죄는 유죄추정이라는 비난 속에서도 성인지감수성을 증거법칙으로 삼는다. 운동가들은 그렇게 하더라도 적어도 헌법기관들은 그 위험성과 위헌성에 대해 말하고, 제도적 해결을 모색해야 하는데, 모든 국가기관들이 미투를 지지하고 옹호하고 장려했다.

고인을 포함해서 민주당 정부의 정치인들이 적극적으로 수용한 성범죄 불관용 정책이 비극으로 돌아온 것이다. 만일 성비위에 연루되었다 하더라도 우리 사회의 시스템과 문화가 정당한 방어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고, 행위의 경중에 따라 정확한 책임을 지고, 변화와 회생의 기회가 주어진다고 믿었다면 과연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 성범죄에서는 그게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아셨을 것이다. 오히려 페미니스트가 아니었다면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실체적 진실은 경악스러울 수도 있고, 갸웃할 수도 있고 알 수 없다. 둘 다 존재하는 가능성이다. 그러나 실제 어떤 행위를 했든 죽음을 택한 것은 페미니즘적 논리를 잘 알기 때문이다. 그 논리에서는 어떤 짓을 했든 방어할 방법이 없다. 이를 부인하려면 평생 뱉은 말을 다 부인하고 자신의 삶을 부정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

 

인간의 삶은 제물이 아니다

이 정부는 성평등이나 약자보호와 같은 좋은 가치라 여기고 페미니즘 정책과 해결방식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해 왔다. 이제 그 과오를 반성하고 성범죄에 대해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을 수용해온 해결방식을 멈추고 본래 우리가 합의했던 원칙을 규범으로 작동시켜야 한다. 보수정당도 마찬가지다. 미래통합당은 성범죄는 공소권 없음을 적용하지 않는 박원순법을 만들겠다고 한다. 형사법의 근간을 흔드는 위헌적인 법률을 해결책이라 제시한다. 사안의 본질을 보기보다 정치적 반대진영을 공격하기 위한 도구로 쓰이는 한 이런 비극은 그들의 진영에서도 반복될 수 있다.

이 사안은 진보와 보수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모두의 권리의 문제다. 민주당의 지지자들 또한 반대 진영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 때 어떤 태도를 보였을지 돌아보는 태도가 필요하다. 민주당은 재발방지를 위해 엄격한 조치를 마련하겠다고 한다. 범죄의 재발만이 아니라 죽음의 재발도 막아야 하는데 그에 대한 숙고는 보이지 않는다. 여성단체에게 해결과 심판의 권한을 주어서는 안 된다.

조문 논란도 성범죄에서만 일어나고, N번방 관련 사건을 수임했다는 이유로 공수처장 후보 추천위원을 사퇴한다. 오직 성범죄에만 이런 과민한 논란이 따라붙는다. 성범죄에 대한 특수한 취급과 엄벌주의는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이번 비극은 돌출적으로 일어난 불행한 사건이 아니라 이런 해결책이 지속되는 한 얼마든지 반복될 수 있는 일이다.

성추행 누명을 쓰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부안의 故 송경진 교사는 어떤 호소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무력감과, 평생의 낙인을 견디지 못해 극단적 선택을 했다. 박원순 시장 사건의 실체적 진실은 알 수 없으나 두 사안 모두 근대적 원칙이 통하지 않는 페미니즘적 운동과 해결방식의 문제라는 공통점이 있다.
올바른 사회로 가기 위한 과도기의 진통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고인의 삶도, 지금 고통을 겪고 있을 고소인의 삶도 시대를 위한 제물로 바쳐져서는 안 된다. 한사람 한사람의 삶에 과도기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