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퉁불퉁한 PC운동의 잣대가 불러올 미래는?

2018년 고양시 저유소 화재 사건의 용의자로 풍등을 날린 스리랑카인이 체포됐다는 기사가 나간 후 진보언론들을 중심으로 자성과 비판이 일었다. 스리랑카라는 국적을 언급한 보도가 혐오를 부추긴다는 이유였다. “풍등보다 무서운 제노포비아” 라는 제목의 기사도 실렸다.
 
코로나 국면에서도 “바이러스보다 무서운 혐오”라는 말을 흔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초반 우한발 감염소식 때문에 중국인이나 조선족에 대한 혐오를 부추기지 말라는 (주로) 인권운동 진영의 주장에서 시작된 혐오반대 운동은 신천지 교인들에 대한 강력하고 광범위한 인권침해와 마녀사냥 국면에서는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러다 이태원 클럽발 감염사태 때 게이클럽이라는 단어가 부각되면서 일제히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다시 높아졌다. 고 박원순 시장은 검사과정을 정비해 성소수자의 신변을 보호했다. 성소수자 인권은 혐오반대 운동가들이 주력하는 분야이고, 조직화된 세력도 있으며 적어도 진보진영 내에서는 합의된 운동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온국민의 공분을 산 신천지 교인들과는 달랐다.
2018년 스리랑카인을 기사에 명시해 혐오를 조장했다며 비판하는 기사들
 
오늘 도심에서 난투극을 벌인 ‘고려인’들 수십명이 체포되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영화 <범죄도시>의 실사판이라며 화제가 되고 있다. 나는 풍등을 날린 스리랑카인 기사를 읽었을 때 스리랑카인에 대해 미움이나 연민, 분노 등의 감정적 동요가 없었다. 범죄도시를 보고 조선족에 대해 공포나 혐오가 생기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 기사를 보고는 고려인이 우리나라에 이렇게 많이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고, 조금 무서운 감정이 들었다.
 
그렇다면 내게는 고려인 난투극 기사가 오히려 외국인에 대해 부정적 감정을 가져온 것인데 스리랑카인 보도에 분노했던 운동가들과 기자 친구들 중 이 기사에 대해 나무라는 사람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허구인 영화에는 적용하는 혐오유발 혐의가 실제 범죄사실에는 선택적으로 적용되는 현실에서 보듯, 이 울퉁불퉁한 잣대는 누가 정하는 것인가? 스리랑카 국적을 보도하면 안된다던 인권보도 준칙에 ‘고려인’이라는 국적 표기는 해당되는가, 되지 않는가? 
나는 스리랑카인, 고려인 모두 문제없는 보도라고 생각한다. 사건사고 보도의 형식으로 사실관계를 나열했고, 해당 사건에서 외국인이라는 자체가 일상적이지 않은 요소였다. 뉴스에 달린 댓글들로 혐오유발을 판단한다면 댓글란을 없애는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어떤 보도가 혐오를 유발하고 피해자에게 재차 가해를 한다는 주장은 더 정교한 논증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지금과 같이 자의적이며 선택적인 2차가해 논리는 국가보안법처럼 양심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나쁜 칼로 쓰인다.
 
신천지에 대한 마녀사냥은 용인되었으나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는 용납하지 않고, 스리랑카인은 안 되고 고려인은 되는 울퉁불퉁한 PC운동(정치적 올바름)의 잣대는 선택적 분노와 선민의식, 진영논리, 구성원들 사이의 갈등과 대결을 심화시킨다.
늘상 ‘혐오가 만연한 사회’라는 전제를 기본값으로 두고 혐오반대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은 많지만, 운동의 부정적 결과에 대한 우려를 감지하고 이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하는 사람을 그 운동 안에서 발견하기는 어렵다. 공동체에 대한 진중하고 사려깊은 책임의식을 가진 사람들의 목소리가 나오기를 바라지만 언제나 극단주의자들이 운동을 대표한다.
 
아래는 미국 드라마의 한 장면이다. PC운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조용할 날이 없는 우리에게 어떤 미래를 시사한다.
 
경찰서 앞에서 한 여성이 내 아들을 죽인 살인자들을 수사해서 처벌해달라는 피켓을 들고 날마다 시위를 벌인다. 아직도 해결이 안되었느냐고 묻는 경찰에게 이 여인이 한 맺힌 태도로 답한다.
 
“네. 내 아들은 지금 이 나라에서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백인에 중산층 남자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 아들이 흑인이나 히스패닉이었다면 당신들은 벌써 수사에 나섰겠죠”
 
불균형을 시정하기 위한 장치가 또 다른 불균형이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앞선 나라들에서 찾아야 하는데, 그런 것엔 관심도 책임감도 없는 사람들이 PC운동을 주도하는 현실을 보면 우리의 미래가 밝지 않으리라는 예감이 차곡차곡 쌓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