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시작한 미국드라마 FBI 시즌1, 12화 "새날이 밝는다"에서 안티파(Anti-Fa)로 추정되는 조직의 사례를 에피소드로 다뤘다. 안티파는 안티-파시스트의 줄임말로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활동하는 반파시스트를 표방한 극좌 조직을 일컫는다.
안티파는 최근 미국 내 좌우 대립이 격렬해진 상황에서 백인 주류 기득권 세력에 대항하는 좌파진보진영의 전위부대 같은 역할을 담당한다. 버클리대학교에 벤 샤피로 등 우파 인사들이 초청돼 강연회가 잡혔을 때 방화를 비롯한 극렬한 폭력시위가 벌어졌는데 이 때에도 안티파가 주동세력으로 지목되었다.
이들의 폭력성과 극단주의적 사고 때문에 리버럴 진영 내에서 비판을 받기도 한다. 안티파는 검은 복면과 검은 복장으로 통일해 조직적으로 움직이지만 대표자와 간부를 둔 일반적 형태의 조직과는 달리 신원을 노출하지 않는다고 한다. 사제 무기로 무장하고 경찰과 우파세력에게 린치를 가하는 활동방식 때문에 그럴 것이다.
필자는 안티파 조직원의 인터뷰를 본 일이 있는데 "파시스트들은 사회에서 어떠한 직업활동과 발언도 하게 해서는 안되며, 말로 해서는 이들의 행동을 막을 수 없기 때문에 직접 행동으로 타격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인터뷰였다.
파시스트에게는 표현의 자유가 없다는 것이 이들의 기본적 원칙이며 그들의 입을 막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는 극단성이 특징이다. 이들의 사고야말로 바로 자신들이 반대하는 파시즘적 행태와 같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드라마에서 묘사된 좌파단체 조직원들의 사고방식도 비슷하다. 이번 FBI 12화에서는 극좌단체 이름을 '새날이 밝는다'를 줄여 '새날'로 등장시켰다. 한 대학의 진보적 학장이 유명한 우익인사 베인을 초청한다.
그는 강연에서
"미국은 오늘날 평등의 목표치를 한참 넘어 젠더, 인종, 정체성 정치에 빠져 안전지대니 성중립 화장실에 몰두하고 있다"
고 비난한다.
"우리는 중산층의 번영과 기쁨을 궁리해야 하며, 더 이상 백인남성이라는 이유로 미안해하지 않아야 한다"
고 대중을 선동한다.
강연이 끝난 후 그가 쉬고 있던 대기실에 누군가 폭탄을 던지는 테러를 감행하고 불길에 휩싸인 베인은 사망한다. 사건을 수사하게 된 FBI는 새날이 연관된 걸 알아내 잠입수사를 한다. 새날에 가입한 대학생들은 극단적 좌파이자 선동가인 한 교수를 추종하다 폭탄테러 계획까지 세운다. FBI 요원들이 베인의 장례식이 열리는 교회에 자살폭탄테러를 감행하려는 여학생을 설득해 결국 해결하는 내용이다.
이 에피소드에서 재미있었던 지점은 극 중 FBI 간부와 요원의 대사들이다. 베인이 사망하자 그에 대한 프로파일링이 시작된다. 원한을 가진 사람이 있느냐는 질문에 프로파일링을 담당한 젊은 흑인여성요원은 베인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말한다.
"당연히 많죠. 그는 정치적 올바름과 페미니즘을 욕하면서 백인 민족주의를 주창하고, 성차별에 인종주의자니까요."
그녀의 비아냥에 상사인 여성은 따끔한 지적을 한다. 미국적인 말이다.
"여기는 자네의 정치적 견해를 밝히는 곳이 아니야. 우린 표현의 자유를 지켜야지.
재단하지 말고."
베인 사망사건으로 캠퍼스는 다시 갈등에 휩싸인다. 혐오를 배격하는 진영과 말의 자유를 주장하는 쪽이 격렬하게 대립한다. 주인공인 남녀 요원(백인 여성과 무슬림 남성의 조합이다)은 이 장면을 보며 뼈 있는 대화를 나눈다. 미국의 오늘을 드러내는 말들같다. 폭탄만 없을 뿐 한국사회도 비슷한 상황이라 더 와닿는 말이다.
"모두가 온갖 일에 분노해. 말, 견해, 꼬리표 하나하나"
"임계점을 넘은 느낌이야. 예전엔 의견이 다르다고 폭탄을 던지진 않았는데"
베인의 장례식이 열리는 교회, 새날 조직원인 여자대학생 헤더는 품속에 기폭장치 스위치를 안고 긴장상태에 있다. 요원 둘이 헤더를 설득하는 장면에서 가장 미국적인 대화가 오간다.
"니가 그걸 누르면 무고한 사람 300명이 타버려"
요원들이 설득해보지만 헤더는 강고하다.
"이 사람들은 무고하지 않아요. 증오와 독설을 설파하죠. 베인 추종자는 고통받아야 해요. 우리가 살려면 저들이 죽어야죠"
그녀는 혐오주의자들이 이 땅에서 사라져야 한다는 신념에 빠져있다. 그것이 진정한 정의라고 믿는다. 요원 매기는 단호하게 헤더의 신념이 틀렸다고 말한다.
"아니, 틀렸어. 우리와 저들이 함께 살아. 그게 이 나라의 핵심가치야"
결국 스물한살 어린 여학생의 극단적 신념은 실패로 막을 내린다. 그러나 요원들이 말한 미국의 가치에 설득된 건 아니다. 자신이 추종하던 교수가 알고보니 매우 비열하고 무책임한 사람인 걸 알게됐고, 스물한살밖에 안 된 너의 인생을 이렇게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설득이 마음을 움직였다.
이 드라마는 안티파로 추정되는 좌익극단주의자 사례를 다뤘지만 우파의 가치를 설파하는 드라마는 아니다. 이어지는 회차에서는 미투운동에 반감을 가진 주류 남성들을 조롱하는 에피소드도 다룬다.
그러나 그런 회차에서도 어떤 운동이 급격하게 사회의 질서를 바꿀 때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반작용에 대해서는 묘사한다. 새날을 다룬 에피소드는 현재진행형인 민감한 이슈를 드라마로 만든 자체가 재미있고, 미국적 가치를 설파하는 캐릭터들의 치우침 없는 태도가 매력적이다. 상사로서 또는 선배나 어른으로서 가장 미국적으로 극단주의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품위 있는 '말'들이 좋다.
한국사회 또한 정치적 올바름이 진보진영의 대표적인 운동으로 자리잡으면서 권력과 자본같은 고전적인 '악'의 자리를 혐오와 증오가 대체하는 추세다. '말'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이 어느때보다 심각한 상황이다. 우리가 살려면 저들이 죽어야 한다는 신념에 사로잡혀 반대세력에게 혐오와 증오를 내뿜는 사람들을 쉽사리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공적 영역에서 일하는 사람은 개인적 신념에서 비롯된 편견을 배격하고 헌법적 가치를 지켜야 한다는 원칙, 자신의 정치적 견해가 편견으로 작동해 공정성을 해치면 안 된다는 원칙, 견해가 다르더라도 물리력으로 억압해서는 안되며,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공존해야 함을 말하는 품위 있는 어른은 찾아보기 어렵다.
혐오와 증오를 배격하는 운동이 힘을 가질수록 혐오과 증오의 총량 또한 비례하는 현상은 어떻게 봐야할까? '혐오가 만연한 사회'라는 레토릭을 사용하면서 혐오주의자들을 처벌하고 단죄하면 혐오 없는 세상은 가능해질까? 알 수 없다.
그러나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하지 않는 한, 우리가 바라는 세상은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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