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가 섭외를 마치고 티저영상까지 찍은 이준석 후보의 출연을 취소했다. 젠더데스크 등 내부 구성원의 반발을 접한 지도부가 내린 결정이라고 한다. 한겨레는 이준석의 출연으로 그간 쌓은 성평등 기조에 대한 신뢰가 무너질 것이라는 이유를 내세웠다.

매체가 누군가를 섭외하고 말고야 자유이지만, 섭외를 취소하는 과정에서 오간 논리가 최고 지성인들이 모였다는 언론사의 수준이라기엔 처참할 정도로 한심하다. 젠더데스크, 저널리즘책무실장, 대표이사, 편집인, 편집국장, 영상국장, 논설실장, 노동조합까지, 한겨레의 지성이 집단으로 모여 논의한 결론은 이준석에게 마이크를 줘서는 안 된다는 파시즘적인 결정이다.

이준석과 반대되는 견해의 출연자를 섭외해 논쟁시키자는 의견마저 용납하지 않는다.
 
  한겨레는 인종적, 성적 다양성에 대해 누구보다 앞장서 주장하지만 이념적 다양성만은 거부한다.

자유민주주의는 이념적 다원성을 생명으로 하는데, 한겨레는 자기가 동의하지 않는 견해에 대해 아무런 입증없이 혐오라 규정하고 마이크를 줘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마이크를 뺏는다. 한겨레는 이념적 다양성을 거부하는 것으로 스스로 전체주의적 사고에 빠진 매체임을 입증했다. 이런 수준의 언론이니 같은 펜으로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는 자기모순에 대해 자각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이준석을 안티페미니스트이자 네오파시스트로 몰아가고자 하는 진보매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준석은 연령과 성별 모두 고른 분포로 지지를 받고 있다.

애써 이대남 현상을 외면하고 젠더갈등이란 없다는 공허한 아집을 부리다, 이대남 지지를 넘어 이준석 돌풍이라는 현실을 마주한 한겨레의 우왕좌왕이 우스울 따름이다. 이제 이준석이 당선이라도 된다면 '극우화된 우매한 대중'을 탓할 것인가? 한 때 가장 신뢰받는 언론 1위였고, 진보의 맏형(혹은 큰언니)으로서 진보적 의제를 견인했던 한겨레는 이제 페미니즘을 끌어안고 침몰하는 중이다.

자신들이 침몰 중인 것을 모르는 것마저 구질서들의 퇴장모습과 똑같다. 이준석 후보가 앞으로 <한겨레>와 모든 인터뷰는 거부하는 것으로 대응하면 좋겠다.

한겨레 말고도 매체는 많다.

한겨레는 계속 이준석에 대한 취재와 인터뷰를 거부하고 '성평등' 기조를 유지할 일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것과 낡은 것, 다양성과 편협성, 부상과 침몰 가운데 한겨레와 이준석이 대중적으로 어떤 기호를 상징하는지 지켜보는 일도 지금 시절에 의미있는 관전 포인트다.  
  • 한겨레의 전체주의적 행위를 비판한 글에 대해 한 독자께서 예리한 비판을 보내주셨습니다.

    옳은 지적이며 이를 반영해 보론으로 남깁니다.

    독자 여러분도 함께 오류를 확인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원글은 두고 따로 보완합니다.

    지적인 피드백은 언제나 좋은 자극이 됩니다.

    비판해주신 독자께 감사드립니다.
  보론 한겨레의 행위가 국가보안법을 반대하는 논조와 모순된다는 견해는 수정되어야 한다.

국가가 사상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과 사기업이 특정 사상을 지지하는 건 다른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겨레가 이준석의 출연 약속을 일방적으로 취소한 것은 계약위반의 책임을 지는 문제이지 이준석의 표현의 자유라는 기본권을 침해한 것은 아니다.
국가는 국민들의 이념적 다양성을 보장하고 사상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아야 할 의무가 있지만, 사기업이나 집단이 특정 이념을 다른 이념에 비해 더 지지한다고 해서 즉각 전체주의자로 규정하는 것은 부당하다. 물론 한겨레가 그간 진보언론임을 자처해온 근거인 표현의 자유, 사상의 자유 지지와 국가보안법 반대라는 기준에서 스스로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행위는 옹색하다.

그러나 특정 이념을 지지하면서도 국가가 사상의 자유를 탄압하는 행위에는 반대할 수 있으므로 자기모순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페미 진영이 행한 질낮은 행위 중 하나가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면밀하게 구분하지 않고 모두 같은 악덕으로 취급하거나, 근거가 부족한 논리를 대강 엮어 싸잡아 비난해온 것이다. 같은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으려면 부단히 지적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한 번 지적해 주신 독자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