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남성연대 채널 폭파에 축배를 드는 이들을 보며

이선옥 승인 2021.09.09 23:01 | 최종 수정 2024.02.05 12:11 의견 0

한 때의 진보좌파들은 아래의 경구들을 즐겨 인용했다.

비단 좌파나 진보만은 아니었지만 국가권력이 가진 통제와 억압의 속성을 견제하는 것은 좌파의 본래적인 의무같은 것이었기에 주로 그들의 즐겨찾기 인용구였다.

"그들이 처음 공산주의자들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에.
이어서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에.
이어서 그들이 유대인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에.
이어서.
.
.
그들이 내게 왔을 때.

그때는 더 이상 나를 위해 말해 줄 이가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했다(They Thought They Were Free)》

“나는 당신의 말에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의 말할 권리를 위해서라면 죽을 힘으로 싸우겠다"(I disapprove of what you say, but I will defend to the death your right to say it’ / 볼테르의 말로 알려져 있지만 역사학자 이블린 홀이 볼테르가 이러한 태도를 보였다고 인용한 것이 볼테르의 말로 잘못 공유되고 있다고 한다. 여전히 사람들은 볼테르의 말로 즐겨 인용한다.)

위 경구들이 주는 교훈은 권리의 침해를 방관하거나 간과할 때 그 억압은 결국 나에게로 돌아온다는 것, 즉 자유와 권리에 대한 부당한 탄압이 존재한다면 그것이 누구든, 내 의견과 같든 다르든, 설사 내가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견해를 가진 자일지라도 그 탄압은 부당하다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와 적대적인 진영의 사람에게는 발언 자체를 막는 것이 정의 구현이고, 내 편의 사람이 제재를 당할 때는 부당한 탄압이라 여긴다면 결국 우리 모두의 권리는 우리 자신에 의해 점점 축소된다.

과거 국가권력의 통제와 억압에는 선명한 전선이 보였다. 국가가 불온하다 여기는 견해들을 온갖 강제적 수단을 동원해서 억압할 때 우리는 맞서 싸웠다. '말할 자유'야말로 민주주의 사회를 지탱하는 본질적인 요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로운 사회에 살고 있다고 믿고 민주주의가 안착했다고 믿는 오늘날, 국가권력은 점점 교묘하게 말할 자유를 빼앗는다.


거기에 더해 이제는 국가권력의 직접 탄압이 아닌 다양한 명분으로 자유의 제한이 정당화되고 심지어 시민들이 이를 요구하고 환호하기까지 한다. 극우, 혐오조장, 가짜뉴스, 공동체 규약 등과 같은 명분이 우리의 말할 자유를 점점 통제한다.

신남성연대라는 유튜브 채널이 영구삭제 됐다고 한다. 어떠한 이유인지는 모르겠다. 유튜브의 정책을 위반했다고 하는데 3번의 경고가 누적되면 영구삭제라는 원칙이 이 채널에는 지켜지지 않았다고 한다. 3번이 누적되지 않아도 삭제할 수 있는 원칙이 또 존재한다고 한다. 내가 '한다'라는 말을 반복하는 이유는 유튜브의 정책을 투명하게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레거시 미디어들이 속속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듯 이제 미디어권력은 유튜브와 같은 기업으로 넘어왔다. 유튜브를 운영하는 구글 뿐 아니라 페이스북, 트위터와 같은 소셜미디어 플랫폼 기업들은 이미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미디어그룹이 됐다. 이들은 새로운 권력이고, 막강하고 절대적인 힘을 가진 권력이고, 이윤이나 기업의 도덕적 책무, 사적 계약과 같은 명분으로 개별 미디어들을 간단하게 통제하는 일방적인 갑의 지위다.

그러나 국가권력과는 다른 기업이라는 존재형태 때문에 이들의 검열행위에 대해 딱히 자유의 전선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나는 페미니즘은 정신병이라고 말하는 채널이 존재하는 사회보다, 페미니즘은 정신병이라는 말이 삭제되는 사회가 더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국가권력의 처벌을 두려워하는 시대는 아직 저물지 않았는데, 이제 공동체 질서유지를 명분으로 자본의 통제까지 자유로운 시대가 됐다. 유튜브의 '커뮤니티 정책 위반'은 모호한 말이다. 누가 기준을 만들고 적용시키느냐에 따라 자의적인 규정과 통제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견해는 공동체의 평화를 해치는 해로운 말이므로 삭제해야 한다'고 할 때 '해로운 말'이라는 판단을 누가 하는가? 통제권력을 가진 자(세력)가 한다. 지금의 통제권력은 기업이다.

시민들의 자유로운 논평과 합의를 통해 나쁜 말은 걸러지고 좋은 말은 권장되는, 자유를 통한 질서의 구축이 아닌 자의적인 질서를 위해 시민들의 자유를 통제하는 사회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을 감지하고 견제해야 할 전통적 진보좌파는 오히려 통제권력의 편에 서 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제재를 당하는 건 자유와 권리의 침해라 여기는 이들이, 내가 싫어하는 말이 제재를 당할 때는 당연하고 마땅한 일이라 축배를 든다. 스스로를 민주주의자라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들이 그러하다. 미디어 기업이 시민들의 언로를 자의적으로 차단하는 점에 대해서는 문제의식이 없다.

세상에 내가 동의하는 목소리만 존재해야 한다는 생각, 쓰레기같은 말은 없애는 것이 정의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좌에도 있고 우에도 있다. 이들이 세를 얻고 권력을 잡았을 때 다른 점은 좌파식 전체주의냐 우파식 전체주의냐의 차이일 뿐이다.

나는 예전에 '빨갱이'로 취급되어 보았고 지금은 '극우'로 취급된다. 빨갱이이던 시절에는 불온한 말을 하는 데 두려움이 적었다. 나와 함께 싸워줄 동지들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극우 취급을 받고 공론의 장에서 사실상 퇴출된 상황에 처해 있지만 나의 '말할 자유'를 위해 싸워줄 동지는 없다. 빨갱이에 대한 탄압에 저항하던 사람들은 대부분 극우에 대한 처벌에 동의하거나 심지어 요구하기까지 한다.

내게 힘만 주어진다면 저들의 입을 막고 싶다는 생각, 증오하는 집단을 이 세상에서 없애버리고 싶은 충동, 그러한 정념의 폭정을 제어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자가 되기 위한 수련의 길이다.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야말로 민주주의 그 자체라는 걸, 그들의 말할 자유를 관용하는 것이 곧 내가 말할 자유를 확보하는 길이라는 걸, 한참 뒤에도 우리는 깨닫지 못하리라는 생각에 씁쓸한 날이다. 자유의 축소를 기뻐하는 축배는 독배가 되어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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