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주의 운동의 해악: 동료시민을 손쉽게 혐오주의자로 만드는 일 (1)

이선옥 승인 2022.05.06 02:58 | 최종 수정 2024.04.17 00:55 의견 0

3년전쯤까지 나는 PC주의 운동에 대해 사회의 긍정적 발전에 기여한 요소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주관적 피로함과 동료시민을 통제하려는 위헌적 발상들에 대한 경계심 수준의 헐거운 반대에 머물렀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PC주의 운동에 대해 고찰할수록 이 개념에 대한 이해를 제대로 하지 않은 상태에서 한 판단은 틀렸으며, 이 운동은 공동체의 결속보다는 분열과 갈등을 일으키며, 이익보다는 해악을 끼치는 운동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오늘날 우리사회에 일고 있는 문화적 변화와 남녀갈등의 기저에는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와 PC주의(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 혹은 정치적 교정주의)가 자리한다.

정체성 정치란 성별, 젠더, 종교, 장애, 민족, 인종, 성적지향, 문화 등 공유되는 집단 정체성을 기반으로 배타적인 정치 동맹을 추구하는 정치 운동이자 사상을 말한다.

PC주의는 말의 표현이나 용어의 사용에서 인종·민족·언어·종교·성차별 등의 편견이 포함되지 않도록 하자는 운동으로 정체성 정치가 구현되는 한 방식이다. 단지 '미개'하고 '시대착오적'인 표현을 퇴출시키자는 운동이었다면 문명화의 수준이 높아지는 것과 비례해 이 운동은 자연스럽게 소멸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사회 전체의 교육수준이 높아져 평균적 교양과 인권의식이 발달한 사회일수록 PC주의 운동은 사그라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3년전쯤까지 나는 PC주의 운동에 대해 사회의 긍정적 발전에 기여한 요소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주관적 피로함과 동료시민을 통제하려는 위헌적 발상들에 대한 경계심 수준의 헐거운 반대에 머물렀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PC주의 운동에 대해 고찰할수록 이 개념에 대한 이해를 제대로 하지 않은 상태에서 한 판단은 틀렸으며, 이 운동은 공동체의 결속보다는 분열과 갈등을 일으키며, 이익보다는 해악을 끼치는 운동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예의와 PC주의의 차이

PC주의는 흔히 인간에 대한 예의와 혼동된다. 타인에게 무례해서는 안된다는 법칙은 이미 사회에 안착되어 있다. 그러나 어떤 사회든 예의라는 공동체의 규칙을 모르거나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공동체는 이를 계속 상기시켜 이들을 규칙 안으로 포함시킨다.

이러한 노력은 생활상의 사소한 일들부터 공적 영역과 인간관계까지 매우 촘촘하게 포진되어 있다.

예를 들어 타인의 부탁으로 어떠한 자료를 메일로 보내줬는데 이를 받고도 답이 없는 상대가 있다. 답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무신경한 사람이거나 혹은 깜빡 잊었거나 했을 것이다. 이런 경우 '누군가에게 부탁해 자료를 받았을 때는 감사하다는 답메일을 보내는 게 예의다'라는 글을 포스팅할 수 있다. 당사자에게 직접 말할 수도 있고, 다시 메일을 보내 자료를 잘 받았는지, 도움이 되었는지를 물으며 에둘러 감사의 답을 유도할 수도 있다.

우리는 이러한 행동을 통해 공동체에 예의의 코드가 단절되지 않도록 학습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러한 예의의 코드는 공동체 안에 무형의 규칙으로 안착이 되어있다.

만나면 반갑게 악수를 하는 것, 상대의 연배에 따라 공손하게 두 손으로 악수를 하는 것 등은 누가 정색하고 가르치지 않아도 사회 구성원들 사이의 상호학습을 통해 습득한다.

그러나 사회가 빠르게 변화하면 예의의 코드 또한 단절되거나 균일하지 않게 습득될 수 있다. 이를 사회적으로 균질하게 안착된 코드로 계속 통일시켜 나가는 작업이 필요하다.

미풍양속, 예의, 질서, 교양과 같은 개념은 이러한 상호학습의 전통으로 만들어진다. 그러한 작업이 없다면 문명사회를 유지할 수 없다. '다름'이 기본인 문명사회에서 존중의 코드를 안착시키는 일은 필수적이다.

누군가를 속속들이 안다는 일은 언제나 스트레스를 수반한다. 나와 정치성향이 정반대라거나, 내가 미워하는 사람과 절친이거나, 증오하는 이념을 추앙하거나, 이단이라고 생각하는 종교의 신도이거나, 싫어하는 행동을 습관으로 가졌다거나 하는 부정적 요소들을 파악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계의 삐걱거림에 윤활유의 기능을 하는 것이 바로 안착된 존중의 코드다.

예를 들어 집 옆 편의점의 점주가 갈 때마다 내가 너무나 싫어하는 극단적인 정치유튜브 채널을 큰 음량으로 시청하고 있다. 나는 즉각 불쾌한 감정이 들 것이다. 그의 정치성향을 비난하고 싶은 마음과, 사고 수준을 비하하는 마음도 들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존중의 코드가 안착되어 있으므로 오가며 인사를 하고, 점주 또한 고객을 응대하는 기본 태도에 더해 가끔은 단골에 대한 친근함 코드를 더하기도 한다.

이는 문명생활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PC주의는 안착화된 존중의 코드와 어떻게 다를까? 몇가지 다른 특성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인간에 대한 예의와 PC주의의 본질적인 차이는 안착과 동요에 있다.

PC주의는 존중의 규칙으로 안착화된 코드가 아니라 오히려 문명사회의 안착화된 코드중 일부를 문제삼고 동요시키는 운동이다.

PC주의 운동은 이렇게 전개된다. 우선 아무도 그것을 비존중 또는 존중의 결여, 의도적인 무시의 뜻으로 쓰지 않던 표현에 대해 그러한 의도로 귀속시키는 수사적 작업을 퍼붓는다.

그다음 그러한 작업이 이뤄진 세계에서는 더이상 예전처럼 부정적 의도가 아니더라도 언어를 쓰지 못하도록 통제한다. 예를 들어 PC주의가 동요시키기 전 미국에서 'man'이나 'he'는 인류, 인간, 사람 등 그냥 인간을 가리키는 대명사로 쓰였다. 그러나 왜 남성이 인간을 대변하느냐는 비판에 따라 man/woman을 쓰게 됐다.

그러나 맨/우먼이라는 대명사도 이분법적 성별분류라는 동요에 따라 다양한 성을 지칭하는 대명사가 만들어졌다.

이러한 동요가 수차례 일어나면서 이제 사람을 가리키는 대명사는 온갖 PC주의적 표현으로 범벅이 됐다. 새로운 표현의 목록은 PC주의자들 조차도 습득하기 어려울만큼 많고, 이러한 표현은 불투명한 글을 만들어내므로 안착하기 어렵다.

그러나 PC주의자들은 안착이 아닌 동요 자체가 목적이므로 끝없이 동요를 만들어낸다. 맨을 인간의 의미로 쓰면 비난이 퍼부어지는 사회에서는 그저 맨이 익숙해서 계속 쓰고 싶은 사람은 마치 해당 쟁점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 반동적인 입장으로 취급될 뿐 아니라, 여성은 인간이 아니라거나, 남성만이 인간을 대표한다거나, 여성은 하등한 존재라는 입장을 표명하는 것으로까지 귀속된다.

둘째, PC주의는 모든 일상의 정치화를 통해 운동세력의 정치권력을 획득한다.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시민은 타인과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해 삶에서 정치의 영역을 어느 정도 분리시킬 줄 안다. 정치를 연루시키지 않고 함께 게임을 하거나, 드라마를 시청하거나, 카페에서 담소를 나누기도 하고 때로는 음주가무를 즐긴다.

예의규범은 이러한 사회적 상호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의도된 탈정치적 규범이다.

그러나 PC주의는 일상의 비정치적 영역을 용납하지 않는 것 자체를 전략과 목표로 삼고 있다. 그래야만 자신들의 정치적 의제를 눈에 띄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다양성 추구를 천명한 글로벌 커피 체인에서 음료 제공시 고객에게 무지개컵과 일반컵 중 선택의사를 묻겠다고 한다. 단순히 커피를 마시기 위해 카페에 간 어떤 고객은 무지개색이 취향이 아니라 그냥 흰 컵에 먹고싶다.

그러나 두 선택지를 제시하는 순간 커피를 마시는 행위 자체는 불투명해지고 졸지에 성소수자에게 연대하느냐 마느냐는 정치적 선택이 부상한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어느 유명인(혹은 약간 유명인일지라도)이 '그냥 흰 컵에 주세요'라고 말하는 순간 온라인 공간에 호모포비아로 아우팅되는 일을 겪을 수 있다.

단지 흰색이 좋아서 흰컵을 선택하는 행위가 혹여 성소수자의 권리에 반대하는 것으로 비칠까 하는 노심초사의 장으로 변질된다. PC주의자들이 노리는 효과가 바로 이러한 공포다.

일상적 휴식의 공간이었던 카페가 갑자기 첨예한 정치의 장으로 바뀐다. 이처럼 PC주의의 실제 목적은 끊임없이 일상생활에서 PC주의 의제를 상기시켜 분투의 장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미 안착된 매듭을 풀어 '동요'시킨 후, 자신들이 새롭게 주장하는 작위적인 코드를 따르지 않으면 나쁜 사람이라는 공세를 퍼부음으로써 일상적인 모든 행동에 정치적 의미를 투영시킨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표현목록을 결정하는 권력이야말로 사회를 통제하는 권력이 된다.

셋째, PC주의는 예의와 달리 도덕적 우월감을 성장동력으로 한다.

예의범절을 권하거나 확인하는 것은 내가 우월한 지위에 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다. 예의의 전수는 상대방도 존중의 코드를 찾고 있고 계승해야 하는 공동체 구성원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보육교사가 아동에게 인사법을 가르치고, 부모가 자녀에게 타인에 대한 예의를 가르치는 것은 도덕적으로 우월한 존재여서가 아니라, 먼저 이 코드를 습득한 사람으로서 혹은 안착된 존중의 코드를 잊지 않고 있는 사람으로서 사회적 계승을 위해 전수하는 행위이다.

'여자의 웃음소리가 담장을 넘으면 안 된다'는 말을 예로 들어보자. 이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이제 통용되지 않는 규칙이다. 만일 어떤 노인이 이러한 발언을 여전히 한다면 친구나 가족 중 누군가가 교정해 줄 수 있다.

예의범절을 전수하는 사람은 문화적 지체자가 이를 습득하지 못해 비난을 받거나 구시대적 예의관이 계승되는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의의 핵심은 존중이다. 새로운 예의규칙을 습득시켜 사회적으로 존중의 코드를 안착시키는 목적에서 변화를 가르친다.

반면 PC주의는 분쟁을 일으켜 너는 어느 편이고, 어떤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라는 낙인을 부여해 문화적 지체자가 아닌 여성혐오자로 규정한다. 이는 정치적 계몽행위이므로 자신은 도덕적으로 우월하고 정의롭다고 믿는다.

이들은 이 우월감을 기반으로 PC주의 규칙을 이행하지 않거나 못하는 사람을 차별주의자, 혐오주의자, 정의로운 변화를 거부하는 반동으로 규정하는 행위를 지속한다. 이러한 우월감은 이들에게 상당한 만족을 준다. 이는 권력욕구와도 연결되어 있다.

넷째, PC주의는 예의의 규칙과 달리 모든 상황을 정의와 불의의 대립으로 규정한다.

예의는 전수의 결과를 정의와 불의로 나누지 않는다. 만일 어떤 이가 특정한 예의의 코드를 거부한다면 무례한 사람이라는 평판이나 인간관계의 단절을 감수하면 된다.

그러나 PC주의는 모든 것을 정치화된 운동으로 만들어서 자신들의 규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불의로 규정한다. 무례한 사람과 정치적 반동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하다고 규정된 사람은 직업영역에서 퇴출시키고 공적인 사회활동을 금지시킨다. 밥줄 뿐 아니라 사회적 생명과 정치적 생명을 끊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폭력

예의는 다른 사회적 규칙들처럼 조정의 문제다. 좌측통행을 할지 우측통행을 할지 정하는 것은 서로 부딪히지 않고 원활하게 통행하기 위함이다. 공통된 지표가 없다면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으려는 선의를 가진 사람이라도 부딪힐 수밖에 없고 통행에도 비효율적인 상황이 만들어진다.

기본적으로 선의를 가진 인간들이 효율적으로 소통하도록 하는 것이 예의의 규칙이다. 또한 예의는 문명사회에서 서로 거리를 두게 하는 매우 중요한 기능이기도 하다.

예의는 타인에 대해 속속들이 들추고 알아내서 철저히 평가하겠다는 태도가 아니라, 각자의 삶을 진행시키다가 접촉하는 순간 최대한 충돌이 없도록 거리를 두게 한다.

타인의 정치성향, 추구하는 이념, 특정 사안에 대한 견해를 알아내거나 평가하는 행위를 지양하고, 내가 좋아하지 않는 언어나 행동습관을 명시적으로 지적하며 반대하는 것을 금한다. 예의의 규칙은 그래서 존중의 코드로 안착된다.

반면 PC주의는 타인의 속성을 최대한 많이 드러내게 해서 양심의 추지(推知), 사상과 의견의 추지장치를 발견하도록 한다. 즉 인간의 내심에 있는 견해를 행동으로 끄집어내도록 강제하는 운동이다.

이는 인간 삶의 전 영역에 '십자가 밟기'를 전방위적으로 시행하는 것과 같은 행위이다. PC주의자들은 정치적 올바름을 들이대고 이에 반대하거나 동조하지 않는 사람을 비난하고 압력을 넣어 자신이 원하는 인간으로 개조하려 한다.

이들은 규칙의 개선이 목적이 아니라 인간 내면에 자리잡은 인식-나도 모르게 뿌리깊이 박혀있는 차별의식, 혐오의식, 배제의식 등-을 고쳐야 아무 생각없이 행하는 불의를 바로잡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내면의 인식은 표면적 행동규칙을 규율하는 예의의 코드로는 드러나지 않는다. 선량해 보이는 차별주의자를 가려내려면 끝없이 십자가 밟기 장치들을 뿌려놓아야 한다.

드러내야만 불의로 귀속시켜 몰아붙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PC주의자들은 끝없이 성차별 언어, 인종차별 언어, 약자 차별 언어 등 금지의 목록을 만들어 뿌린다. 금지의 목록을 어기는 사람을 색출하고, 고발하고, 공개적으로 참회하게 하고, 개조의 확인을 받아내려 한다.

PC주의자들은 예의, 존중, 존엄과 같은 말을 자주 쓴다. 많은 이들이 이러한 말 때문에 PC주의 운동에 대해 호의를 갖게 된다. 존중의 코드가 안착된 문명사회일수록 구성원들에게 타인에 대한 존중이라는 예의의 규칙이 기본적으로 장착되어 있기 때문에 '존엄', '존중', '예의' 등을 내세운 PC주의 운동이 잘 자랄 토양이 마련되어 있다.

그러나 거리두기와 조정이라는 예의의 코드와 본질적으로 다른 PC주의의 정치적이며 폭력적인 속성은 곧 충돌을 일으킨다. 보편적인 예의의 규칙으로 가능한 일에도 다종다양한 상황과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들의 PC준칙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속성 때문에 표현의 자유와 충돌하고 양심의 추지를 금지하는 헌법과도 충돌한다. 미러링처럼 불의를 행하며 정의를 참칭하기도 한다.

PC주의자들은 보편적인 예의의 규칙으로는 약자와 소수자의 보호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안착된 예의의 규칙으로 포섭하지 못하는 영역을 해결하는 PC적 규범은 무엇인가?

미러링을 정의로운 행위라 옹호한 페미니스트 진영이 내세운 논리는 여성에게는 존중의 코드가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미러링이라는 방법을 쓸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었다.

과연 그러한가?

누구도 혐오해서는 안 된다는 규칙은 존중의 코드로 안착되어 있다. 미러링은 이를 동요시켜 남성혐오는 혐오가 아니라는 PC주의 규범을 새롭게 만들어냈다. 그러나 미러링은 여성에 대한 혐오를 없애지 못했을 뿐 아니라 혐오의 총량마저 증가시켰다.

PC주의에 대한 대중적 반감은 '프로불편러', '피씨충'과 같은 용어를 만들어냈고 비공식적 영역에서 상당한 공감을 얻고 있다. 그러나 공적 영역에서는 PC주의 운동이 권력을 가지고 있다. 이 운동은 주로 진보진영과 페미니스트가 주도한다.

전통주의자들은 힘없는 사람들에게 상처 주지 않는 말을 쓰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가 하는 도덕적 관심과, 문화적 지체자로 취급받을 두려움 때문에 PC주의를 수용한다.

정치적 올바름 운동에는 논리적 비판을 가하는 조직적 대항세력이 없다. 최근 장애인 운동단체와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 사이에 벌어진 혐오논란으로 PC주의가 담론의 영역에서 공적 의제로 끌어올려졌다.

대중들은 일상적으로 PC주의 운동에 노출되어 있지만 그것이 정치적 올바름 운동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혐오표현에 대한 보도는 많지만 PC주의 자체를 다루는 담론의 장이 없기 때문이다.

이준석 대표의 발언을 둘러싼 여러 반응은 한국사회의 PC주의 운동의 현재를 드러낸다.(다음 글에 계속)

저작권자 ⓒ 이선옥닷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