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명의 정치- 피해자와 폭로자

2015.07.19 01:58   조회 수 4433

5.18의 공식명칭은 5.18광주민주화운동이다.

5.18기념재단은 광주라는 호칭을 빼고 사용한다. 민주화운동의 정신이 광주라고 하는 지역성에 갇히는 것을 우려해서다. 5.18은 광주항쟁, 광주민중항쟁으로 불리기도 하고, 여전히 5.18광주민중봉기라고 부르는 이도 있다. 세월호 참사, 세월호 사건, 세월호 학살 등 한 가지 사건을 두고 누가 어떻게 명명하는가는 중요한 문제가 된다. '명명'은 사안의 정체성을 사회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므로 이해 당사자 뿐 아니라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도 연결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중요한 정치가 된다. 학살로 명명하면 학살의 책임자를 규명해야 하고, 마땅한 처벌을 해야 하는 사회적인 과제가 생긴다. 국가의 적극적인 가해행위로 생긴 피해와 우발적인 교통사고에 같은 배,보상이 적용될 수는 없다. 가해자, 피해자, 책임자, 연대책임자, 후속 대책, 사후 기록 등 모든 것은 공식 명명에 따라 정해진다. 최근 데이트폭력 폭로 사태에서 흥미로운 명명의 정치를 본다. 나는 데이트폭력 폭로 사태라고 지금 쓰고 있지만, 어떤 이는 이를 데이트폭력 '공론화'라고 명명한다. 피해자/가해자가 아닌 피해주장자/가해지목자, 피해자처자/가해지칭자라 불러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폭로자란 가치판단 없이 폭로 행위자를 단순 지칭한 것인데, 가치판단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판 당하기도 한다. 명명의 정치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한 사람의 일방적인 주장만으로 즉각 피해자/가해자라 규정할 수 있는가? 사태의 진실을 알기 전에 그렇게 규정할 권한이 누구에게 있고, 폭로자의 주장과 밝혀진 사실이 다를 경우 이를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가해자로 지목된 이가 평생 받아야 할 낙인은 어떻게 보상받을 수 있는가? 폭로가 곧 공론화인가? 공론화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어떻게 구성하느냐도 명명의 정치다. 많은 물음이 제기됐지만 구조적 약자로 분류되는 여성 폭로자를 비난하고, 폭로의 순도를 훼손하는 공격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도 제기가 터져 나오는 것 또한 주목해 볼 문제다. 폭로자는 즉각 피해자라 명명되고, 피폭로자는 가해자로 규정되던 그간의 관행과 다른 양상을 보이는 건, 폭로라는 방식의 신뢰성에 대한 반작용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최근 노동당 서울시당은 데이트폭력 피해자라 폭로한 여성의 대리인을 맡으면서, 가해자로 지목된 이를 '성폭력 가해자'로 명명했다가 사과문을 썼다.

이례적인 일이다. 성폭력 가해자라는 낙인을 벗기 위한 가해지목자의 노력은 절박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최적의 이름을 공식 명명으로 만들기 위한 정치는 어느 사안에서나 진행중이다.

관전자들에게는 흥미로운 구경에 불과할 수 있지만, 당사자에게는 삶과 명예를 건 절박한 싸움이다. 개인들이 제기해서 시작된 일이지만, 이 사건의 진행 과정은 이미 사회적이다. 폭로가 터져나온 후 명명을 둘러 싼 싸움을 지켜보면서 해당 사안에 대한 내 명명은 무엇이고, 어떤 사고의 과정을 거쳤는지 한 번 쯤 돌아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특히나 이 사안에 분노를 보탠 사람들이라면 더 그랬으면 좋겠고, 그것이 마땅한 책임감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