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숙과 남편은 별개다

정의의 일관됨을 생각하며

신경숙과 남편은 별개다.

2015.09.01 03:18   조회 수 3482

혁명의 시기가 왔을 때 회사 사장인 자신의 아버지를 어떻게 할 것인지 토론하던 대학생들이 있었다. 치열한 토론 끝에 봉건적 혈연주의를 타파하고 인민의 고혈을 빤 자본가는 당연히 심판대에 세워야 한다는 결의를 다진다. 혁명의 전사라면 마땅히 도달해야 할 원칙이었다.

안타깝게도 부모까지 기꺼이 혁명의 재단에 바칠 각오가 되어 있던 이들에게 혁명은 오지 않았다. 오히려 등대와 같았던 소비에트가 무너졌다. 고작 스물 몇 살이던 전사들도 충격으로 무너졌다. 이들은 소비에트의 운명처럼 폐허가 된 가슴을 부여잡고 지하에서 지상으로 나왔다.

햇살은 눈부셨고, 혁명의 순간을 기다리며 품었던 결기들은 햇살 안으로 초라하게, 산산이 부서졌다.

지상의 그들은 다시 졸업장을 따고, 사법고시를 치고, 아버지의 사업체를 물려받아 살며 어느덧 체제의 수호자가 된다. 스물 몇 살의 결기는 뜨거운 청춘이기에 가능했던 낭만적인 치기로 소환된다.

무너진 건 현실의 소비에트일 뿐 모순 속에서 고통받는 인민의 삶이 아니라며 흔들리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지하의 그들이 학교로, 고시원으로, 기업체로 들어갈 때 그들은 공단에, 야학에, 거리에 남아 어제 하던 일을 계속 했을 뿐이다. 그리고 십 수년이 지난 지금 이들은 진보정당에서, 노조에서, 강단 밖 강단에서 소비에트와는 다른 혁명을 꿈꾼다. 대척점에 선 예전의 동지들과 민망하게 마주치기도 하면서, 여전히 체제의 균열자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의 부모를 인민의 심판대에 세우리라 결의했던 그 시절을 비극으로 기억한다. 원칙만 있을 뿐, 인간을 이해하지 못했던 시절. 정말 혁명이 왔더라면 어떤 생지옥을 만들었을 것인가. 돌아보면 아득하다.

낭만과 비극. 현재의 삶에 따라 과거를 소비하는 태도는 이렇게 달라진다.

노조활동을 하다가 협동조합, 사회적 경제 분야에서 일하는 어느 활동가한테 저 이야기를 들으면서 살짝 한기가 돌았다. 총을 쥐어주며 사랑하는 사람을 쏘라고 하는 영화의 장면이 떠올랐다. 아마 나 같으면 그 자리에서 오줌을 싸거나 졸도했을 것만 같다.

갑자기 저 얘기가 생각난 건 신경숙의 표절 사건에 대해 남편인 남진우는 왜 한마디도 안 하느냐는 공격을 보아서다. 그가 평소에 다른 작가의 표절에 대해 혹독한 비판을 해 온 이력이 있다는 거 알겠다. 그런데 가족에게 닥친 불행한 일에 냉정하게 논평을 요구하는게 정의로운 일인지 모르겠다. 그게 정의로운 일이라 해도 동참하지는 못하겠다.
남진우가 “내 아내이지만 신경숙은 표절을 했으며 이는 작가로서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다”고 말하면, 올곧은 평론가라 박수를 쳐줄텐가. 어차피 답정너인 물음과 공격들.

표절시비에 오른건 작가 신경숙이지 그 남편이 아닌데.. 가족에게 닥친 불행한 일에 냉정하고 객관적인 비평을 요구하는 공격들이 가혹하다. 그게 누구든, 어떤 사람이든, 책임은 잘못을 한 개인이 지면 되는 거다. 연좌제를 그토록 비난하면서 왜 어떤 사안에서는 일관되지 않은 기준을 강요하는 것일까.

이번 신경숙 표절 사건으로 여러 사람들의 여러 모습을 본다. 최근에는 백낙청 선생의 발언 이후 창비와 문동을 거세게 비난하는 글이 또 많아졌다. 한국문학의 위기, 문단권력의 폐해, 거기에 기생하는 자들의 비겁함 등등 원색적인 말이 많다.

권력의 자장이 미치지 않는 사각지대에 살고 있어선지 나는 문단권력의 존재를 그닥 인식하지 못한다. 수혜를 입은 일도 없지만,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한 적도 없다.

몇몇 출판사를 알고 친한 직원들도 있지만, 친하다고 꼭 책을 내게 되는 것도 아니고, 그닥 인연이 없었는데 책은 내게 되는 경우도 있고, 책은 안 내면서 그냥 친하기만 한 분들도 있고.. 그런 경험을 통해 책이란 건 제 인연이 닿는 곳과 내게 되는구나 생각하게 됐다.

창비에서 책을 낸 분들이 내 둘레에도 꽤 있다. 아마 그 출판사에서 책을 냈다는 이유로 지금의 사태에 마음이 불편할 거다. 어떤 사람은 작가들의 이름을 거론하며 창비에서 책을 냈으면서, 창비에서 하는 방송을 진행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고 비난한다. 모두가 마치 어떤 이익 때문에 침묵하는 양, 궁예가 되어 남의 속을 들여다본다.

내가 그 처지라면 거대한 불의에 부역한 자로 싸잡아 비난하는 이런 글을 보면 욱 할 거 같다. 그랬다가는 바로 출판사 쉴드 치는 행동이라고 욕먹을 테지. 복잡다단한 심경으로 그냥 침묵하고 있을 수밖에 없는 여러 작가들이 눈에 밟힌다.

한 시인은 창비와 문동의 행동이 탱크로 광주시민을 학살한 전두환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같다고 비난했다. 그 논리라면 세계의 모든 악행은 본질적으로 같을 것이다. 나치도, 전쟁도, 테러도, 모두 창비의 행동과 다르지 않다. 그런가? 섬세한 언어가 도구이고 사유의 최전방에 있는 시인의 비유 치고는 적절치 않다고 느꼈다. 그 비유에 호응하고 찬동하는 격한 글을 보며 나는 다른 본질을 떠올린다.

창비랑 책을 내지 않았기에 이런 글을 쓸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은 글. 어쨌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잘못은 잘못한 사람에게만, 그리고 잘못한 만큼만 책임을 묻자는 것.

정의의 일관됨이 필요한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