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무개다 VS 나는 아무개가 아니다

2015.01.23 01:10   조회 수 2504

희망버스가 한창일 때 시청광장에서 김진숙 가면을 나눠주고 “내가 김진숙이다”를 외친 집회가 열린 적이 있다. 김진숙이 떼로 모여앉아 얼굴만 동동 떠다니는 장면은 괴랄했다. 좋게 말하면 키치적이고 심하게 말하면 호러였다.
누구의 아이디어였는지 모르지만 혹시 성공적이었다고 자평하고 있지 않을까 걱정이다.

“내가 아무개다!”는 연대의 구호로 자주 쓰인다. 연대의 강도보다 농도에 의미를 둔 구호다.
상대와 내가 같을 수 없다는 출발선에서 시작하지만 상대가 겪고 있는 일을 해결하는데 내 힘을 보태겠다는 것과, 상대와 곧 나라는 동일시에서 출발하는 것은 다르다. 후자가 훨씬 농도가 짙다.

내가 아무개라는 구호는 아무개를 누구로 선택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기도 하고, 직관적인 울림만큼 위험도 함께 가지고 있다. 내가 아무개다, 하면서 구호를 외쳤던 그 아무개가 도중에 엉뚱한 행동을 해서 비판을 받는다면?

직관적이긴 하나 과학적이랄 수 없는 구호는 샤를리 엡도 사건에서처럼 어떤 사건과 사람이 가진 여러 결들을 무시하거나, 단순화시키는 부작용도 함께 가진다.

나는 해고자 000이 아니고 000이 아니다. 최대한 그 처지를 공감하고 힘을 보태려는 노력은 하겠지만, 나는 그들이 되고 싶지는 않다. 그(녀)의 가면을 쓰고 나를 그(녀)라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런 가면을 만들 돈을 차라리 싸우는 사람들에게 쓰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어떤 운동에 연대를 하더라도 나는 내가 백퍼센트 당사자의 마음을 이해할 수도 없고, 그들 자신과 똑같이 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냥 내 마음이 가고, 내 상황이 허락하는 최선을 다할 뿐이다.
연대의 강도와 농도는 구호로 표현될 수는 있지만 구호만으로 실현되지는 않는다. 중이스러운 구호를 들을 때마다 수많은 김진숙 가면이 너울대던 그 날의 시청광장이 떠오른다.

나는 나로 충분하고, 당신의 싸움에 연대한다로 충분하다. 이미 그건 내 싸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