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키즈존,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진짜 문제는?

권리는 서열의 문제가 아니다.

2017.12.01 16:55  조회 수 4844

이 글은 노키즈존에 대한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를 통해, 다른 사회적 갈등 사안에도 적용 가능한 보편의 사고체계와 판단 근거를 제시하기 위해 쓴 것이다. 함께 읽고 고민을 확장해주셨으면 한다.

 

인권위의 발표: “노키즈 구역은 아동 차별이며 합리적 이유가 없다”

11월 24일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는 “노키즈 식당은 아동 차별이며 진정의 대상이 된 해당 식당이 13세 이하 아동의 출입을 전면 금지한 행위는 합리적 이유가 없다”고 발표했다. 인권위의 권고는 이행하지 않는다 해서 법적인 제재가 따르지는 않지만, 노키즈존에 대한 관심이 높은 상황에서 처음 발표된 국가기관의 가이드라인이라 화제가 됐다.

많은 매체가 이 발표를 보도했다.

“인권위 ‘노키즈 존’ 식당 운영은 아동 차별 행위”, “인권위 “노키즈(No Kids) 식당은 합리적 이유 없는 차별” 등 인권위의 발표를 전하거나,

“’노키즈존’ 확산에 제동 걸리나”, “인권위 “‘노키즈존’은 차별 행위…아동 배제 말라” 제동”,처럼 인권위의 발표가 어떤 의미로 작용하는지 강조한 기사도 있다.

“인권위 “노키즈존은 차별”…시민들 반응은 글쎄”, “인권위 “노키즈존, 아동 차별 행위”…누리꾼들 찬반 의견 ‘팽팽’”, “정부 첫 ‘노키즈존 가이드라인’…찬반 의견 분분”, “학습권·영업권보다 인권이 더 중요”… 인권위 ‘일방 질주’에 사회 곳곳 ‘아우성’”등과 같이 갈등 양상을 전하거나 일방 질주, 아우성 같은 단어로 불만을 드러낸 매체도 있다.

대체로 진보성향의 매체는 인권위원회의 결정을 충실하게 전달하는 반면, 중도나 보수성향의 매체들은 찬반 대립을 부각하거나 부정적인 뉘앙스로 비판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이번 발표는 노키즈존 사안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소비자 우선주의 문제로만 이를 바라보거나, 맘충, 노아재존, 처럼 성별 대립과 혐오로 확산되는 문제를 차별, 평등, 권리의 원칙으로 판단하도록 유도한다. 계속 확대될 수밖에 없는 구성원 간 권리의 충돌 문제에서 국가가 지향하는 방향성을 제시한 면에서도 의미가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인권위원회의 발표 기사와 후속 보도를 보면 매체들 대부분 차별인가, 아닌가라는 결과 자체에만 집중하거나, 권리 충돌에서 어떤 권리가 ‘우선’인지를 가려낸 판정이라는 의미로 요약한다.

“‘아동이 차별받지 않을 권리’가 영업의 자유보다 우선”(한겨레). “학습권·영업권보다 인권이 더 중요”(한국경제)”

 

권리의 서열과 우열에 집중하는 위험

이런 요약은 틀렸을 뿐 아니라 사회적 쟁점을 해결하는 데 필요한 도움을 주지 못한다. 이번 인권위의 권고를 위와 같이 해석한다면 “과외금지는 위헌”이라는 판결에 대해 부모의 사적교육권이 평등의 원칙보다 우선이라는 요약이 나오게 된다. 과외금지 위헌은 당연히 그런 문제가 아니다. 인권위원회의 결정은 발표 그대로 “노키즈 식당은 아동 차별이며 그 행위는 합리적 이유가 없다”는 판단이다. 이는 ‘차별이므로 나쁘다, 인권이 영업권보다 우선이다’ 와는 다른 의미를 갖는 말이다. 이를 제대로 해석하지 않는다면, “여성 전용 가게를 ‘남성 차별’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데 노키즈 구역을 ‘아동 차별’이라고 보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거나, “쾌적하게 서비스를 누릴 권리, 업주들이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이윤을 득할 권리는 어떡하느냐”는 여전한 의문에 답하지 못한다. 국가가 아동권리가 우선이라고 했잖아, 라는 말로 방어할 수밖에 없다.

이런 식의 정리는 권리에 대해 논증의 과정을 통해 합리적인 판단을 도출하는 사고체계를 교란시킨다. 다른 사안에도 누구의 권리가 우선인지 권리의 서열 규정에 집중하거나, 자신이 원하는 결론을 먼저 정한 뒤 끼워 맞추는 방식으로 사고하게 된다. 선언적으로 약자, 소수자, 피해자의 타이틀을 앞세운 후 정당함을 주장하는 방식을 반복한다. 이는 사회의 갈등을 해결하기 보다는 증폭시킨다. 노키즈존을 둘러싼 갈등에서 우리는 권리담론의 확장 과정에 어떤 오류가 있고, 권리 논증이 왜 필요한가를 중요하게 다룰 필요가 있다. 어떤 오류들이 합리적인 판단을 방해하는지 살펴보자.

약자나 소수자, 피해자의 권리 보장 관점으로는 해결 할 수 없다.

어떤 사안을 판단 할 때 우리는 흔히 약자/강자, 피해자/가해자, 선한 시민/악인을 규정하고, 전자의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아동은 약자이고 소수자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보호해야 한다는 논리가 이에 해당한다. 이는 정의를 수행한다는 믿음과 연관되어 있다.

노키즈존 사안에는 권리 주체가 셋이다.

1. 아이와 함께 원하는 서비스를 얻을 권리가 있는 부모와 아동

2. 지불한 비용만큼 쾌적한 서비스를 누릴 권리가 있는 고객

3. 이윤획득의 기회를 부당하게 침해받지 않을 권리가 있는 업주

세 주체는 모두 합당해 보이는 권리와 자유를 가지는 동시에 자신의 그것이 침해당했다고 주장한다. 업주는 아동에게, 아동은 고객에게, 고객은 아동과 부모에게 가해자가 된다. 모두가 강자이면서 동시에 약자이기도 하다. 불만을 제기하는 고객 앞에서 업주는 약자이고, 출입을 제한당하는 아동과 부모 입장에서 업주는 강자다. 같은 업주라도 전담 변호사와 같은 대항력을 가진 업소는 유리하지만, 테이블 몇 개로 영업해야 하는 소규모 가게의 업주는 고육지책이다. 이 문제는 누가 약자인지, 소수자성을 가졌는지를 규정하는 방식으로는 해결 할 수 없다. 그렇게 접근하면 권리주장의 아수라장이 되고, 모두가 피해자 되기라는 영겁의 악순환에 빠져든다. 사람들이 갸우뚱 하는 것도 이 관점으로 문제를 바라보는 틀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차별은 모두 나쁜 것이라는 관점으로는 해결 할 수 없다.

인권위의 권고는 차별 자체가 아니라 그 차별에 합리적인 이유가 있는지를 근거로 한다. 차별을 도덕적으로 나쁘다고 규정하는 것과 평등권을 침해하는 의미의 행위로 해석하는 것은 다르다. 세상에는 많은 차별이 존재한다. 국가와 개인 뿐 아니라, 구성원들끼리도 자의적으로 차별을 행한다. 미성년자에게 특정한 콘텐츠의 접근을 금지하거나, 수질관리를 이유로 중장년층의 클럽 출입을 제한하거나, 특정 성별을 우대하는 방식으로 구성원을 차별적으로 대우하는 일은 흔하다. 우리는 이를 모두 싸잡아 차별이니까 나쁜 것이라고 하지 않는다.

만일 다중이 이용하는 업소에 혹시 있을지 모르는 누군가의 불편함을 근거로 흑인이나 전라도 출신의 입장을 금지한다면? 아마 차별에 대한 분노와 비판의 강도가 노키즈존에 대한 반응과는 다를 것이다.

문제는 어떤 차별은 용인하고 어떤 차별은 불관용 할 것인가를 판단하는 일이다. 당연하게도 개개인의 가치관이나 특정한 진영의 주장은 기준이 될 수 없다. 무엇이 차별인지, 왜 차별인지, 누가 피해자인지를 합리적으로 논증하지 않고, 자의적인 선언으로 규정한 후 그러므로 나의 주장은 정당하다는 전개방식은 틀렸다.

목적론적 사고로는 해결 할 수 없다.

권리 논증을 방해하는 중요한 오류는 목적론적 사고다. 사람들은 원하는 결론을 미리 내린 후 그게 가장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주장한다. 권리가 합당한 인정을 받으려면 논증을 거친 후 그 결과로 권리의 정당성이 마지막에 도출되어야 하는데 목적론자들은 반대로 행동한다. 자신의 욕망이나 정체성, 속한 집단의 지향에 따라 각자 다른 목적으로 권리를 주장한다. 특수한 사례를 근거로 모든 개에게 입마개를 채워야 한다고 주장 한 후, 이는 사회구성원 모두에게는 안전을 보장받을 권리가 있기 때문에 옳다고 결론을 내리는 식이다. 진짜 목적은 가능성이 매우 낮긴 하지만 내가 개에 물릴 두려움을 제거하고 싶은 욕구다.

어떤 권리들이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안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권리 논증이 필요하지, 누구의 목적이 더 중요한지를 따지면 각자의 신념에 따라 다른 답이 나오게 된다. 서로 목적이 상충하는 걸 권리의 충돌로 가장하기 때문에 권리라는 말은 이 상황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권리 논증’은 어떻게 해야 하나

사회구성원 모두가 동의하고 승복 가능한 보편의 기준은 우선 헌법이다. 헌법적 사고는 “우리는 동등한 자유와 권리를 가진 동료시민”이라는 전제가 기본이다. 이를 출발점으로 차근차근 권리의 논증을 거쳐 공동체의 규범을 재확인하거나 새롭게 정립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헌법에 기반한 권리 논증은 아직 생소한 방식이지만 갈등 사안을 해결하는 열쇠가 될 수 있다.

법적인 개념을 기준으로 보면 차별은 무조건 부당하다거나, 차별이 아니라면 어떤 행위도 가능하다는 결론은 나지 않는다. 어떤 구성원에 대한 대우에 차별이 있으면 잠정적 차별이 있다고 보는데 이를 곧바로 범죄나 위법행위로 규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 차별이 정당화되는 합당한 이유가 있는지를 규명한 후 합리적 차별 여부를 판단한다. 평등과 권리 문제가 얽힐 때 어떤 차별이 정당한지는 평등 원칙을 중심으로 따져봐야 한다. 그 권리가 정당한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도 평등의 원리라는 기준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권리의 충돌이라는 평행선만 달리게 된다.

엄격하게 봐야 하는 차별이 있고, 그렇지 않은 차별이 있다. 인종, 국가, 성별 등에 대한 차별행위는 사회구성원들이 엄중하게 받아들인다. 개인의 노력으로 바꿀 수 없고,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요소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차별을 엄격하게 판단하기 시작한 것은 개별인간의 존엄을 최우선으로 삼는 헌법적 가치가 가장 심각하고 빈번하게 도전받은 역사 속에서 나온 응전의 결과물이다.

이번 노키즈존 식당의 경우 차별의 기준이 13세라는 나이다. 연령은 위 요소들처럼 엄격하게 다루는 표지가 아니다. 미성년자 음주 금지, 흡연 금지 같은 차별적인 대우는 연령의 변화에 따라 해제되는 것이라 헌법상 권리를 침해하는 차별행위로는 규정되지 않는다. 법적으로 심각한 차별행위를 규정하는 데에는 ‘차별비례성의 원칙’을 적용한다.

-차별의 목적이 정당한가?

-차별이 목적을 달성하는데 합리적 수단인가?

-동일한 목적을 달성하는데 차별을 덜 하고도 가능한 다른 방법이 있는가?

-차별을 당함으로 상실되는 법익과 차별을 해서 추구되는 법익 사이에 법익균형이 있는가?

엄격하지 않는 요소는 차별비례성의 원칙까지 가지 않고 자의성 금지 원칙으로 판단한다. 그간 노키즈존 문제는 이 영역에 있었다. 자기 가게의 운영방식은 업주가 결정할 수 있다는 게 사회 안에서 합리적인 권한으로 통용되었다. 이번 인권위 판단은 차별비례성의 원칙으로 이를 더 엄격하게 따져본 결과다.

그렇다면 여성전용 업소나 중장년을 금지하는 클럽처럼 특정 대상을 금지하거나 허용하는 차별들은 문제가 아닐까? 노키즈존 사례와 어떻게 다를까?

여성전용 업소는 목적 자체가 여성만을 대상으로 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클럽 역시 특정연령의 성인들이 모여 즐기는 플랫폼을 제공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준 외의 손님을 받으라고 하면 사업의 목적 자체가 망가진다. 반면 이번에 문제가 된 식당이나 카페는 영업 행위에 13세 이상만을 위한 배타적 플랫폼 제공이라는 목적이 없다. 음식과 음료를 제공하는 보편적 서비스에 접근 권한을 제한한 것은 앞의 경우들과 다르다.

인권위는 노키즈라는 전면적인 접근금지 대신 좀 더 적극적으로 방해 행위에 대한 조치를 공지하라고 권고했다. ‘동일한 목적을 달성하는데 차별을 덜 하고도 가능한 다른 방법이 있는가?’에 해당하는 조치다.

아동은 잠재적 방해자이긴 하지만 모든 아동들이 방해 행위를 하지는 않는다. 아이의 부모 역시 방치할 거라 예단 할 수 없다. 하지만 노키즈존은 아동 일반을 확정적 방해자로 규정한다. 방해 행위를 하지 않은 이들의 권리는 논리의 점프 과정에서 생략된다. 단지 같은 범주에 속한다는 이유로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은 사람의 기회와 권리마저도 원천적으로 박탈하는 것은, 구성원들의 자유를 조정하는 보편 가능한 원칙이 될 수 없다.

헌법적 권리의 보장 단위는 개인이다. 특정 범주의 집단을 하나의 권리단위로 취급하는 일은 입헌민주주의의 근간인 개인주의를 무너뜨리는 일이다. 이를 용인하게 되면 에이즈 환자의 40퍼센트가 남성동성애자라는 이유로 동성애를 금지해야 한다는 논리도 가능하다. 인권위의 권고는 이런 우려가 현실로 등장하기 전에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방향성을 제시한 것이다.

‘저거 치워!’의 끝은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무균사회

어떤 업소는 “알바생에게 무례한 손님은 우리도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겠다”고 공지해 화제가 됐다. 감정노동의 고통을 호소하던 전화상담원에게 “무례하게 굴면 동의 없이 끊는다”는 대응 매뉴얼도 마련되고 있다. 이런 조치만으로도 우선 가능한 변화를 유도할 수 있다.

노키즈존 문제에서도 업주 뿐 아니라 시민들도 문제 행위의 제재를 적극 도울 의무가 있다. 아동의 방해 행위가 타인에게 심각한 피해를 줄 때 업주의 조치를 함께 지지해 주는 게 필요하다. 그 순간에 시민들 사이의 조력으로 해결 할 수도 있는 문제를 자꾸 방치하다 보면 더 큰 문제로 돌아오게 된다. 다만, 문제 상황에 직면했을 때의 조치는 필요하지만 ‘저거 치워’ 방식은 지양해야 한다는 점이다. 드라마 속 재벌 회장의 대사로 화제가 됐던 “저거 치워!”는 보기 싫은 것, 불편한 사람을 내 눈 앞에서 치워버리는 해결 방식이다. 드라마 속 그녀는 막대한 권력을 가진 존재라 치워버리는 게 가능했다. 현실에서는 다수의 힘의 논리가 이를 가능하게 한다.

살면서 나를 불편하게 하는 일들은 수없이 많다. 노숙자의 몸에서 나는 냄새, 틱장애를 가진 사람의 반복적인 행동, 아이들의 울음소리나 산만한 행동은 다중의 이용공간에서 흔히 겪는 일이다. 불편에 대한 체감의 정도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대부분은 견디고 받아들인다. 내게 불편을 준다 하더라도 특별한 악의나 고의가 아니라 일반적인 삶의 모습을 수반한 것이라면 사회구성원으로서 이를 감수할 의무도 있다.

아이는 우리 모두가 지나온 가장 불완전하고 약한 삶의 한 시기다. 업주와 고객은 사회의 약자를 대하는 시선으로 아이에게 좀 더 관용의 태도를, 보호자는 타인의 권리를 존중해야 할 시민으로서 더 엄격한 통제와 보호를, 어른들 모두는 서로의 자유와 권리를 위해 조력하는 동료시민으로서 적극적인 조치를 공유할 책임이 있다.

닥치고 내가 편안할 권리만을 외치는 세상이 되면 우리 사회는 구성원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참지 않는 질서가 확립된다. 어떤 더러움도, 시끄러움도, 불편함도 없는 청결한 무균세상은 가능하지 않다.

 

노키즈존 특집을 기획한 한겨레21의 기사

 

노키즈존 매체 보도 유감

어떤 사회든 차별적인 대우는 일정하게 존재한다. 국가에 의한 경우도 있고 구성원들 사이에서도 일어난다. 자유와 권리에 대한 주장 또한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권리 의식이 높아질수록 권리 주장으로 인한 갈등과 경합은 빈번해진다. 이를 합리적으로 조정하는 수단이 필요하다. 이는 권리의 우열이나 서열을 규정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이 사안을 단순히 ‘영업의 자유’와 ‘차별받지 않을 권리’가 충돌하였고 후자가 승리했다는 식으로 쓰는 언론에 유감이다. 권리는 우열이나 서열의 개념으로 볼 수 없고 보아서는 안 된다. 또 본질이 아닌 갈등구도를 부각해 대결을 부추기는 관점도 우려스럽다. 한 진보매체가 인권위 판단이 있기 전 노키즈존 문제를 심층 취재한 기사에서 쓴 제목들이다. “‘파파충’과 ‘노아재존’은 왜 없을까?”, “‘여성혐오 부산물 ‘노키즈존’ 사회적 경계 긋기 폭력”, “생산·구매력 가진 남성은 타인 시공간 침해해도 배제되지 않아“ ”동물적 삶의 연속성 혐오하는 남성“.

노키즈존이 여성혐오의 부산물이라는 명제를 논증 없이 확정하고, 이 사안을 성별간의 문제로 전환시킨다. 더 많은 배제의 존을 만들고 싶지 않다면 혐오와 배제의 규정 또한 엄격하고 신중할 일이다.

인권위는 사법기구가 아니기 때문에 실정법 위주의 판단보다는 어떤 사회를 지향할 것인가 하는 가치를 중요하게 여긴다. 이번 판단에도 헌법과 UN아동협약을 근거로 했다. 아직 전면화 되지 않았지만 노키즈존에 대한 시민들의 심정적 지지는 만만치 않다. 인권위의 결정에는 노키즈존에 담긴 배제의 논리가 확산되어 보편의 질서로 자리 잡을까 하는 우려가 보인다. 이번 발표를 통해 사회구성원들 사이에 서로의 행위를 조정할 필요가 있을 때 바람직한 기준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것은 차별이다.”는 정답을 제시한 걸로 의미부여를 하면 우리는 계속 권리에 대한 판단을 국가에 위임하고 답을 기다려야 한다.

낙태 문제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이나, 건물주와 세입자 사이의 갈등 문제도 앞으로 계속 권리 충돌 사안으로 부각될 것이다. 언론이 이를 여전히 권리의 서열이나 우열을 정하는 관점으로 대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는 언론의 보도를 통해 동료시민들이 승리자와 패배자로 나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게 아니다. 본래 헌법이 동등하게 부여하고 있는 구성원들 모두의 자유와 권리가 계속 현재형으로 조화롭게 보장받는 과정을 확인하고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