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칼 키냐르 “음악혐오”

<도종화의 books플레인> 첫 글입니다. 이선옥닷컴은 글 쓰는 한의사 도종화님의 블로그 <도종화의 책, 미술, 음악감상 이야기>와 제휴를 맺고 글을 공유합니다. 책을 좋아하는 독자들은 도종화님의 블로그를 둘러보셔도 좋아요.(편집자주)

새로 나온 책을 소개하는 기사에서 “음악 혐오”라는 제목을 보자마자 끌렸다. 나는 음악을 음미하며 감상하는 편이 아니다. 대개 인터넷 서핑을 하거나 책을 읽으며 듣는다. 스마트폰을 사면 이어폰 포장도 뜯지 않는다. 싫어하는 건 아닌데 음악 자체에 잘 집중하지 못한다. 책이나 영화 보기를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왜 음악을 혐오하는지 궁금해하며 소개글을 봤다. 충격을 받았다. 2차 세계 대전 때 나치가 유대인 수용소에서 틀어준 음악은 죽음과 복종을 의미했단다. 음악을 좋아하지 않지만 언젠가 큰 위로를 받은 적이 있다. 수용소의 음악은 그들에게 위로를 주지 않았을까?

저자는 이 책에서 음악의 시원과 본질을 밝히며 음악이 단순히 우리를 위로하는 역할을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인류 역사에서 음악의 기원은 무엇일까? 우리에게 최초의 음악은 어떤 소리였을까? 음악은 어떤 힘을 가졌을까? 우리는 음악 없이 살 수 있을까? 시원과 본질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이다. 저자는 고대 문헌에서 음악과 관련된 단어의 원뜻을 살피고, 선사시대 인류가 남긴 동굴 그림과 샤머니즘을 분석해 소리가 음악이 되는 역사를 종횡무진 추적한다.

파스칼 키냐르의 <음악 혐오>

몇 년 전 어떤 문제가 생겨 크게 상심했다. 고통스러운 마음에서 벗어나려 애썼다. 책을 읽고 구절마다 공감하며 정성들여 감상을 썼다. 전시회를 다니며 미술 작품이 뿜어내는 아우라에 들끓던 감정을 식혔다. 음악을 듣는 일은 독서나 미술 감상과 달랐다. 실연을 하면 모든 노래가 자기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감상적인 노래를 들으며 감정을 증폭하면 오히려 개운해졌다.
쏟아지는 눈물이 내 아픈 마음을 떠내려보냈다. 사춘기 시절 심야 영화음악 라디오 방송을 들은 이후 처음으로 음악에 집중했다. 음악은 어쩜 이렇게 마음에 직접 와닿을까?

저자는 프랑스어로 여신muse이 고통으로부터 “주의를 돌리게 하는amuse 존재”라고 한다. 이 단어가 ‘위안’을 뜻하는 라틴어 consolatio의 기원이란다. 뮤즈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9명의 학문과 예술의 여신이다. 음악music이란 단어의 기원이기도 하다. 나는 음악을 들으며 위안을 받았다. 고통으로부터 “주의를 돌렸기” 때문인가,오히려 고통에 집중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후련함을 느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소리의 고통으로부터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내면의 동물적 경계심을 되살리려는 노력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1)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피리를 발명한 이는 아테나였다. 황금 날개와 멧돼지의 어금니를 한 가마우지의 목구멍에서 새어 나오는 비명을 듣고, 그 소리를 흉내내기 위하여 최초의 피리(tibia-해부학 용어로 정강이뼈를 뜻한다)를 만들었다. 가마우지의 울음은 매혹적이었고 듣는 이를 꼼짝 못하게 하여 온몸이 얼어붙는 공포의 순간에 사냥감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피리는 부르고자 하는 짐승의 울음소리를 낸다. 음악이란 인간을 인간이 만든 원 안으로 들여 놓는 것이 아니다. 음악은 인간을 모사된 동물적 원 속으로 침투시킨다. 흉내 낸 소리는 멋잇감의 모습을 한 음성적 가면이다. 이 소리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포식 동물을, 그리고 천둥과 바람과 불과 바다와 바람을 포식의 원 안으로 끌어들인다.

음악은 인간이 제 먹이에게서 배운 것으로, 짐승들이 번식기에 내는 소리를 모방한 것에 불과하다.

(2) 헤르메스는 거북이의 내장을 제거한다. 암소를 훔쳐 삶은 후, 그 가죽을 벗겨 낸다. 살을 발라낸 바다거북의 등 껍데기 위에 소가죽을 씌운다. 마지막으로 양의 창자 일곱 줄을 팽팽하게 잡아당겨 고정한다. 헤르메스는 키타라를 발명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만든 이것을 아폴론에게 넘긴다. 아폴론의 명사수이자 음악의 신이다.

[일리아스]에서 키타라는 악기가 아니라 아직 활이다. 자신의 여사제를 돌려주지 않는 그리스 군에 분노한 아폴론은 그들에게 화살을 쏜다. 은궁은 짐승의 울부짖음과 같은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었다. [오디세이아] 말미에서 오디세우스는 수십 년의 방랑을 마치고 자신의 궁전에 들어선다. 그는 활시위를 당겨 구혼자들에 대한 살육의 신호를 쏘아 올린다. 최초의 궁사 아폴론이 인신 공여를 돕는다.

Bela Čikoš Sesija , 구혼자를 죽이는 오디세우스

리라 혹은 키타라는 신에게 노래를 쏘아 올리는 고대의 활에서 유래했다. 활시위는 최초의 노래다. 소리와 언어는 들리는 것이지 만지거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노래가 감동을 줄 때, 그것은 대상을 1)꿰뚫고 2)죽인다.

(3) 첫 번째 리듬은 심장 박동이었다. 두 번째 리듬은 폐호흡과 그 첫 울음, 세 번째 리듬은 직립보행의 발박자였다. 네 번째 리듬은 먼 바다에서 밀려와 해안으로 돌진하는 파도의 회귀, 다섯 번째는 잡아먹은 고기의 가죽을 벗기고 팽팽히 당겨 고정하고는, 사랑받았고 뜯어먹히고 갈망했던 죽은 짐승이 다시 찾아오도록 유인하는 리듬이며, 마지막은 곡식을 빻는 절굿공이의 리듬이었다.

리듬은 그릇처럼 인간들을 “잡아 둔다”. 아이스킬로스는 프로메테우스가 쇠사슬의 “리듬”에 둘러싸인 채 바위에 영원히 결박되었노라 말했다.

(4) 그리스어로 “비극tragique”은 번제 때 죽음을 목전에 둔 숫염소의 갈라지고 변한 목소리를 의미한다.

의미는 의사소통 가능한 인간 집단의 사회적이고도 상징적인 제도와 상상이 소리에 대한 두려운 경계심 속에서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하다. 자연이 발화하는 것은 기실, 비명과 공격적인 힘 너머에 있는 냉소적인 소리, 개 짖는 소리다. 동물적 소리는 선재(先在)하며 의미를 띠기 전에 심장을 뛰게 한다. 개 짖는 소리의 짖는 소리, 그것이 울부짖음이다.

음악은 말로 풀기 어려운 내 속 깊숙한 무언가를 건드렸다.

 

음악의 기원은 이렇듯 공포와 폭력과 포식에 맞닿아 있다. 우리는 자궁 안에서 빛보다 먼저 음파를 느낀다. 소리는 다른 감각보다 원초적이다. 음악은 거대한 콘서트 홀에서 정장을 입고 고상하게 듣는 문명이 아니었다. 저자는 이것을 보여주는 예로서 베드로의 울음을 말한다.

“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여종이 나아와 이르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마태복음26:69-75)

엘 그레코, 눈물을 흘리는 베드로


 베드로는 예수를 만나기 이전 어부 시몬이었다. 예수와 운명적으로 만난 후 그는 과거의 소리와 결별했다. 사람의 언어를 듣고 그는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새벽녘 닭의 울음소리를 듣고 스승의 예언을 떠올리며 통곡한다. 왜냐하면 “자연은 새벽녘, 수탉의 형상으로 짖는다.” 동물의 원초적 소리는 “그를 자연의 맹렬한 짖음의 품으로, 인간의 언어가 자신만의 작은 음성적 공간을 선취했던 동물적 울음이라는 비좁은 층위로, 별안간 되돌려 보낸다.” 

 “베드로의 귓가에 너무나 명료히 울리는 수탉의 울음. 그것은 신이 그에게 부여한 바위이며, 인간이 언어에 지배되기 이전부터 존재한 거친 반석이자, 음악의 문간, 음악의 문지방이며, 마침내 눈물의 형태로 화한 것이다.”

 내가 음악을 통해 위안받았다는 건 이런 뜻일까? 이렇게 심오한 깨달음은 아니지만 비슷한 것일까? 확실히 음악의 멜로디와 리듬, 가사가 나를 달래주지는 않았다. 음악은 말로 풀기 어려운 내 속 깊숙한 무언가를 건드렸다. 지금 느끼고 있는 고통으로부터 주의를 돌리게 된 이유는 근원적인 공포와 두려움을 음악이 끄집어냈기 때문인건가? 생각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음악이 무엇인지, 왜 이토록 마음을 꿰뚫는지 조금은 이해하는 기분이다.

 

베토벤과 쇼팽을 들으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그토록 잔혹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운가?


저자는 음악이 모든 예술 중에서 나치에 의한 유대인 학살에 협력한 유일한 예술이라고 말한다. 프리모 레비는 음악이 지옥 같다고 썼다. 음악은 “생각을 없애고 고통을 완화하는, 끊임없는 리듬의 최면 상태”였단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에 세이렌 이야기가 나온다. 세이렌이 부르는 노래를 들은 사람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에 빠져 죽음을 맞이한다. “음악은 인간의 육체를 제 쪽으로 유인한다…..음악은 영혼을 붙잡아 죽음으로 이끄는 낚시 바늘이다. 이것이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몸을 일으켜야 했던 수감자들의 고통이었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오디세우스와 세이렌


앞서 예를 든 음악의 기원을 생각해보라. 피리는 본래 사냥감을 유혹하는 도구였다. 현악기의 원조가 되는 키타라라 리라는 활과 다름없었다. 리듬은 프로메테우스를 결박했다. “음악의 본질은 불평등이다. 청취와 복종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플라톤은 단 한 번도 규율과 음악, 전쟁과 음악, 사회 위계와 음악을 떼어 놓고 생각하지 않았단다. “음악은 인간의 육체를 강간한다.” 

음악은 몸속으로 침투하여 영혼을 지배한다. 피리는 인간의 팔다리를 움직여 춤추게 한다. 인간의 육체는 음악의 먹잇감이다. 듣고 있을 때 인간은 한낱 수감자에 불과하다. 나치 장교들은 다른 나라 군인들보다 훨씬 교양 있고 세련되었다고 한다. 베토벤과 쇼팽을 들으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그토록 잔혹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운가?

저자는 여기에 놀라는 사람들이 더 놀랍다고 한다. “예술은 야만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이성은 폭력의 반대가 아니다.” 맞다. 전쟁터의 북소리는 벌레 한 마리 못 죽이던 소년을 전장의 영웅으로 만들 수 있다. 차가운 이성은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이들을 제거하라 이끌 수 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경탄하는 마음이 들었다. 선사 시대와 그리스 신화에서 끄집어 낸 음악의 시원에 대한 이야기는 더없이 흥미로웠다. 음악이 위안을 주는 이유를 베드로의 눈물과 결부해 생각해 본 경험은 음악의 본질에 다가가는 실마리가 되었다.

콩쿠르 상을 수상한 저자답게 문장도 매혹적이었다. 빠져 나오고 싶지 않았다. 음악을 너무 좋아하는 사람은 이 책이 매력적이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문득 든다. 음악에 사로잡힌 이보다 거리를 둘 수 있는 사람에게 음악이 가진 원시적 본질이 더 매력적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