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의 부패와 타락을 보여주는 사례(3): 류호정 의원과 지지자들

이선옥 승인 2023.09.13 22:00 | 최종 수정 2024.01.17 21:41 의견 0

지난글: 단상] 진보는 왜 부패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은가?: 석진환과 신학림의 사례를 들어(2)에서는 진보가 왜 부패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은지에 대해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서술했다.

세 가지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진보가 현실권력을 획득하면서 부패의 틀이 마련됐고 둘째, 진보의 선악이분법 의식구조는 부패라는 감각을 무디게 하며 셋째, 진보는 부패와 타락에 대해 새로운 도덕을 만들어 정당화하는 구조를 가졌기 때문이다. 이번 글에서는 현재 진보의 부패와 타락상을 류호정 의원과 같은 PC주의자와 페미니스트 진영의 사례를 들어 설명하도록 한다.

진보정당 의원인 류호정에 대한 비판을 방어하는 지지자의 사고체계는 리더와 지지대중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진영 전체가 자정능력 부재로 타락하고 있는 진보의 현실을 잘 보여준다.

2022년 11월 류호정 의원이 카타르월드컵에 응원단으로 방문해 인증샷을 올리자 여론이 좋지 않았다.

이태원참사 후 안전 문제로 야외응원도 취소되는 등 월드컵을 온전히 즐기지 못하는 사회분위기에서 세금으로 월드컵 관람을 하느냐는 비난이었다.

실제 국민의힘 의원들은 일정을 취소하고 가지 않았으나 민주당 의원들과 류호정 의원은 출장을 강행해서 월드컵행사를 관람하고 왔다.

카타르에서 소수자들을 생각했다는 류호정의원 기사 류호정 의원이 소셜미디어에 응원사진을 올리자 '월드컵 경기는 개인돈으로 좀 가라'는 비판글이 달렸다. 국제 체육대회 유치 및 운영에 대한 의회차원의 모색이라는 명분에 대한 비판도 이어졌다.

류호정 의원의 행동을 비판하는 댓글이 다수 달리자 그녀의 지지자가 이런 댓글로 응수했다. 이 댓글 논쟁을 보면 왜 진보인사들이 부패와 타락에 무감해지는지 알 수 있다.

그녀를 옹호하는 한 지지자가 비판에 대해 이렇게 응수를 한다.

"50, 60 먹은 반송장 꼰대들을 무슨 단장입네 위원장입네 보내는 것보다 한 천 오백만배는 낫다" 그러자 "낫지 않다.

똑같은 짓을 30대가 하고 있을 뿐"
이라는 반론이 이어졌다.

그에 대해 그 지지자는 "그건 선생님의 의견일 뿐"이라며 일축한다. 반송장들보다 낫다는 것도 본인의 의견일 뿐인데 자신은 객관적으로 옳고 반대자는 일개 사견인 것으로 폄훼한다.

비판자들은 아무리 아름답게 포장해도 결국 의원들의 항공료와 숙박, 경기 티켓, 직원들의 수행과 의전행위 등에 드는 출장 비용은 결국 국민혈세이며 카타르월드컵 방문이 그러한 비용을 지불할 만큼의 가치가 있는것이냐고 했다.

무조건 옹호하지 말고 비판할 건 비판해야 한다는 견해는 충분히 제기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류호정 의원의 지지자는 이러한 비판에 대해 '억까(억지로 까는 행위)'라 규정한다. "남이 즐거운 꼴을 못보는 시기심에서 비롯된 잘못된 감정"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무도 제기하지 않은 '젊거나 어린 정치인에 대한 공격'으로 몰고간다.

애초 행위에 대한 문제를 나이의 문제로 들고나온 것은 본인이었다. 재벌집 자녀에 대한 비교도 사안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비판자들은 그간 국회의원들의 외유성 출장에 대해 비판해왔던 기준을 일관되게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이들은 '5060 반송장', '시기심', '억까', '청년에 대한 무시'와 같은 것들을 들고 와 비판의 본질적 내용을 무시한다. 지난 글에서 지적한 '선악이분법 의식구조'의 전형적인 예다.

자신들은 정의로운 선이고 비판자들은 불의한 악이라는 의식구조는 부패라는 감각을 무디게 한다. 류호정 의원의 지지자는 이러한 비판에 대해 결국 "말귀를 못알아듣는다"며 "자신이 맞다"고 일축한다. 이것이 진보진영 지지자들의 모습이다.

과거 류호정 의원이 원피스를 입고 의회에 등장한 것에 대한 비판도 그 차림이 의회라는 장소에 적합하느냐는 차원의 것이었다. 그런데 페미니스트와 진보진영만이 이를 젊은 여성의원에 대한 성차별이라 주장했다.

특히 경향신문의 소셜미디어 계정을 관리하던 여성(페미니스트로 추정되는)은 '왜안돼왜안돼왜안돼... 류호정 짱!!'이라는 맥락모를 격한 응원을 보내다가 결국 경향신문이 공식 사과를 해야했다. 직업인으로서 책임의식보다 자신들의 이념에 더 충실한 페미니스트들이 종종 보이는 행동이다.

이들의 비윤리적 돌발행동으로 피해를 입고 사태를 수습하는 건 언제나 조직 전체와 상급자, 다른 동료들의 몫이다. 해당 사과문에 달린 댓글들을 보면 계정 운영자와 같은 인식을 가진 지지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경향신문 관리자의 인식

이러한 지지자들의 행위에 대해 류호정 의원과 같은 진영의 리더들은 제어하거나 나무란 적이 없다. 진보진영의 대응은 언제나 같다.

악한 반대진영의 공격으로 치부할 수 있는 경우, 예를 들어 원피스에 대한 비판은 청년여성에 대한 차별주의자들의 공격으로 치부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활용하여 넘긴다. 그러한 명분이 적용되기 어려운 카타르 월드컵 방문같은 경우에는 지지자들의 대응을 시정하지 않고 모른척 한다.

리더와 지지자가 모두 같은 사고체계 안에서 결속할수록 진보의 타락과 부패는 심해질 수밖에 없다. 극단주의자들이 진영을 대표하고 다양한 견해들이 설자리가 없어지면 극단주의에 편승하거나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자가 리더의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의 문제는 지성적 대화, 타협, 관용, 개방적 교류를 통해 상대와 나의 주장을 점검하면서 다소라도 모두를 이롭게 하는 해결책을 찾을 수 없게 한다.

복장에 대한 비난을 일베의 혐오로 몰아가는 미디어오늘의 기사

물질적 타락과 이념적 타락을 함께 주도하는 진보

타락과 부패는 꼭 금품수수나 지위의 획득과 같은 형태로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위 류호정 의원과 지지자의 사례처럼 자신들이 기존에 부패한 행위라고 비난해왔던 일을 옹호해 결국 이전의 부패와 이후 일어날 부패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결국 서로의 나쁨에 기대어 모두가 똑같은 부패상태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진보의 그것이 보수보다 더 해악인 이유는 어떠한 것이 도덕이고 정의인가라는 담론의 장에서 진보가 승리해왔고, 그 결과 도덕적으로 퇴행한 규범이 사회의 주류적 질서로 자리잡기 때문이다.

한 번 규범으로 자리잡히면 그 질서는 상당기간 지속된다. 필자는 류호정 의원이 뻔히 예상되는 비판을 감수하면서 카타르월드컵 외유에 나선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이십대의 젊은 여성이 어느날 우연한 기회로 국회의원이라는 신분이 됐고, 일생에 한 번 가보기 어려운 월드컵이 자신의 임기 중에 열리는데, 마침 이를 정당한 명분으로 관람할 수 있는 상임위에 소속되어 있다면 누구라도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우리 정치문화가 좀 더 관용적이라면, 우리 사회가 인간의 욕망에 대해 좀 더 이해도가 높다면 그 출장이 개인적 욕망을 실현하는데 이용될지라도 공적 이익에도 복무할 수 있도록 강제해 용인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상대 진영의 의원이 같은 상황에 처할 때 서로 관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의회의 구성원으로서 다른 사회를 경험하는 것은 유형무형의 효과를 가질 수 있다. 의도하지 않은 부분에서 영감을 얻어 우리사회에 적용할 수도 있으므로 긍정적 효과가 있다. 그러한 가능성까지 모두 부정하면 정치의 영역에서 인간적 고려는 전혀 남지 않게 된다. 경직된 문화가 상호 적대적으로 더 강화된다면 우리 사회의 분위기 또한 어떠한 인간적 고려도 용납되지 않는 극단적 엄격함이 지배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질서를 선제적으로 주도한 것은 진보진영이다. 진보는 의원들의 외유는 세금낭비이며 부패행위라는 도덕적 비난으로 상대진영을 맹렬히 공격해왔다. 그렇게 우위를 점했으나 막상 자신이 의회에 진출하자 똑같은 상황에 처하고 똑같은 행위를 하게 된다. 류호정 의원이 조금의 책임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온전히 관광만을 위해 외유에 나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스스로 정당한 명분이 있어야 비난에도 떳떳할 수 있다.

그러므로 비판자들의 말에서 류호정 의원이 먼저 깨달았으면 하는 점은 '나의 외유도 세금낭비였구나' 하는 자성이 아니다.

내가 그동안 비난해왔던 상대진영의 의원들에게도 나처럼 무언가 성과를 남기려는 선한 의도가 있을 수 있었겠구나 하는 관용의 역지사지다.
나의 외유에 선의가 포함되어 있다면 상대진영의 의원에게도 그러한 선의가 있다고 평가해주어야 마땅하다.

'50, 60 먹은 반송장 꼰대들은 어떠한 윤리의식도 없고 그저 세금을 낭비하고 오겠다는 악의만이 가득한 존재'라는 편견을 반성하는 게 필요하다. 책임 있는 리더라면 그러한 편견을 가진 지지자들의 생각 또한 교정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진보는 그러한 교정 대신 더 엄격한 올바름을 들이미는 것으로 진영 내부에서 우월한 지위를 획득하려 한다. 이러한 행위는 자아성찰이나 진영 내부의 자정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사회 전체가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진보의 규범에 종속되도록 하는 결과로 작동한다. 결국 진보 내부의 자정은 이루어지지 않고 우리 사회는 진보의 도덕규범에 지배당한다.



류호정 의원은 보좌관에 대한 부당해고 문제로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녀는 법적, 관행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며 해당 보좌관의 불성실함과 부적절한 행위들을 세세하게 공개하며 비난했다. 진보정당이며 노동자의 친구임을 외쳐온 정의당은 강자인 의원이 약자인 노동자를 공격하는 행위에 어떠한 제재도 가할 수 없었다. 사회의 해고문제에 목소리를 높이던 것과는 전혀 다른 대처였다.

류호정 의원과 정의당이 그 사건으로 깨달았어야 하는 점은 자신이 보좌관을 해고할 때 나름의 명분이 있었다면 그간 무조건 비난해왔던 해고사건들에도 어떠한 명분이 있었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역지사지이며, 선한 노동자 대 악한 자본가라는 진영의 공식이 언제나 적용될 수는 없구나 하는 성찰이다.

그러나 진보에게 그러한 성찰과 관용은 없다. 그들이 관용하는 것은 오직 그들 자신뿐이다.

진보진영의 도덕은 류호정 의원과 지지자들처럼 '내가 하는 외유는 정당하고 반대진영의 외유는 부당하다'는 존재 자체로서의 정당성으로 귀결되었다. 페미니스트 진영이 자신들의 이념일 뿐인 페미니즘을 공익적 가치라 주장할 수 있는 이유도 존재 자체가 정당하다는 인식에서 나온다. 이것이 진보가 타락에 이르는 매커니즘이다.

진보는 카타르 외유와 같은 물질적 타락과, 권리와 도덕의 개념을 퇴행시키는 이념적 타락을 함께 주도하고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사회복지공동모금회라는 단체가 있다. 국가가 인정한 대표적인 법정모금단체다. 모금회는 영부인을 명예대표로 두고 사회 각 분야의 성금을 독려한다. 경제적으로 곤란에 빠진 이웃에게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보호막이 되어 사회 전체의 안녕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해마다 이 기관에는 기업과 개인들의 성금이 답지한다. 그런데 이 기관에 페미니스트 출신의 관료가 임명된 후 해마다 모금의 일부를 페미니스트 행사에 지원하기 시작했다. 페미니스트들의 축제에 국민들의 성금을 후원한 것이다. 행사의 이름도 페스티발이다. 페미니스트들이 모여 흥겹게 노는 행사에 불우이웃돕기 모금이 쓰이는 것은 부패에 해당한다. 국민들의 돈을 관료들의 성향에 맞는 이념단체에 지원하도록 하는 것은 결국 국가권력의 강탈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 진영은 경제적으로 곤란에 빠진 이웃에게 갈 것을 믿고 모금회에 답지한 국민들의 성금을 자신들이 놀고, 먹고, 게임하고, 노래하고, 춤추는 데 쓴다는 사실에 도덕적 죄책감이나 윤리의식이 없는 이념가들이다. 뇌물을 주고받거나 횡령을 하는 것만이 부패가 아니다. 이러한 행위가 바로 부패에 해당한다.

(관련글: 불우이웃돕기 모금을 페미잔치에 지원한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할당제의 예도 있다.

류호정 의원은 청년과 여성할당이라는 진보의 약자우대 룰에 의해 자신보다 훨씬 표를 많이 받은 남성정치인의 기회를 빼앗아 국회의원이 됐다. 진보의 논리에서 이는 약자에 대한 우대이기 때문에 정당해진다. 그러나 사실 그대로 보자면 그들이 말하는 공정, 정의, 상식 모든 면을 위반하는 제도일 뿐이다.

류호정과 장혜영이라는 정치인의 의회진출이 곧 정의라는 진보의 논리는 틀렸다. 이들은 어떠한 목적을 위해 의회에 진출해야 한다는 논리가 아니라 이들의 의회진출이 곧 정의의 구현이라는 본말이 전도된 상징적 목적론에 빠져있다. 이것이 가능하도록 하는 인식체계가 바로 존재의 정당성이다. 우리는 정의로운 집단이므로 우리의 활동에 투여되는 자원은 곧 사회정의의 구현이라는 논리다. 그러나 류호정과 장혜영 등은 약자가 아니며 우리사회는 그들에게 빚진 바가 없다.

오늘날 진보는 그들이 비난하던 보수 기득권 세력과 다를 바 없이 부패하고 타락했다. 그러면서도 그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보수보다 더 문제적이다. 그들이 부패와 타락상을 비판하는 대중을 오히려 가르치려 들면서 자신들의 도덕을 강요한다.

진보가 권력을 획득할 수 있었던 힘은 언제나 자신들보다 부도덕한 상대진영의 존재 자체였다. 진보의 리더들은 조직의 건강성 대신 권력을 위해 지지자들을 진영논리로 결속시키는 길을 택했다. 진보의 타락은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상대는 언제나 우리보다 악하다는 인식을 내면화한 집단이 점점 결속을 강화하면서 진보라는 진영은 몰락하기 시작했다. 스스로의 힘으로 옳아지지 못하고 상대의 나쁨에 기대어야만 옳아지는 집단이 건강할 수는 없다. 류호정과 그 지지자의 인식체계나 정의당의 몰락이 이를 잘 보여준다.

문제는 정의당은 몰락해도 진보진영이 우위를 점한 담론과 도덕규범은 몰락하지 않고 살아있다는 점이다.

정치적 올바름, 페미니즘, 다양성, 약자 우대, 인권 등 좋아보이는 가치를 명분으로 담론장을 점령한 진보의 본모습,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른 채 그저 좋아보이는 것을 따라가느라 열심인 보수진영, 진보의 실제적인 타락과 부패를 꿰뚫어보고 견제할 세력이 없는 현실이야말로 오늘날 한국사회의 불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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