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순결성 여부가 틀린 원칙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박진성 시인의 구속과 위근우 칼럼니스트의 주장

이선옥 승인 2023.11.24 20:01 | 최종 수정 2023.12.18 01:23 의견 0

박진성 시인이 명예훼손에 대한 형사재판에서 법정구속이 됐다. 명훼사건으로는 이례적인 일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마치 미투운동에 대한 비판이 부적절한 것임이 입증된 것인양 규정하고, "박진성 시인 사건을 교재로 활용해 페미니즘과 미투를 폄훼한 사람"으로 필자를 포함 여러 인사를 실명으로 거론해 비판 칼럼을 쓴 칼럼니스트가 있다.

위근우 칼럼니스트의 필자에 대한 비판 칼럼 내용(출처: 경향신문)

그가 필자를 비판하기 위해 근거로 든 발언은 4년 전 유튜브 김용민TV 채널에 출연한 방송분 [우먼스플레인] #23-2 미투의 그늘 feat 박진성시인 사례 편이다.

굳이 위칼럼니스트의 칼럼내용에 대해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일간지의 기명칼럼에 타인의 실명을 거론해 부정적으로 묘사한 기록을 그대로 둔다면 이를 사실로 믿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미투 운동과 페미니스트 진영에 대해 비판적 시각이나 문제의식을 가졌던 사람들 또한 이 사례를 통해 혼란을 겪을 수 있기 때문에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다.

다만 경향신문이라는 매체가 페미니즘 비판견해에 대해 반론권을 보장해 줄 것이라는 신뢰가 없고,

한겨레의 이라영 작가 칼럼 정정 사례와는 달리 이번 칼럼은 사실을 견해와 두루뭉수리하게 섞어서 쓰는 방식이라 정정보도를 요청할만큼의 에너지를 소모하기엔 모호한 면도 있다.

해당 칼럼니스트가 필자를 비판하기 위해 언급한 방송을 4년만에 다시 봤다. 내 기억으로도 칼럼니스트의 주장은 틀렸지만 방송을 다시 돌려보니 내 기억이 그의 글보다 정확했다.

필자는 일관되게 어떠한 사안을 관통하는 원칙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해왔고, 개별 사안들을 판단할 때 그 원칙을 기준으로 옳고 그름, 동의와 반대의 견해를 피력해 왔다. 이 기준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올바른 원칙에 근거해 지지를 받은 사람이 유죄판결을 받았다고 해서 원칙이 틀려지는 것은 아니다. 원칙을 따라가다 보면 때론 그 수혜를 입는 사람이 좋은 사람일 수도, 나쁜 사람일 수도, 내 편인 사람일 수도, 상대편인 사람일 수도 있다. 물론 박진성 시인뿐만 아니라 그 누구에 대해서도 필자는 '내편'이라고 분류한 적은 없다. 나는 다만 권리의 편이다.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미투폭로의 피해자가 된 사람이 훗날 명예훼손 재판의 유죄판결로 구속되었다고 해서 무죄추정의 원칙이 틀리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위칼럼니스트나 페미니스트들처럼 사고하게 되면 자신들이 비난하던 사람이 구속되면 유죄추정의 원칙이 옳았다는 결론으로 향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미투의 그늘이라는 주장을 4년 전에도 지금도 필자는 일관되게 하고 있다.

위칼럼니스트는 위 칼럼에서 필자가 박진성의 주장을 그대로 옮겼다고 적시했으나 필자는 언론에 보도된 판결기사를 인용하였고, "심지어 당시 무고가 트위터의 유행이었다고까지 말했다"고 격앙된 어조로 비난하는 대목 또한 지금도 같은 견해를 가졌기 때문에 그의 격앙된 어조가 오히려 어색할 따름이다.

당시 무고는 트위터의 유행이었다. 그래서 '사회적 살해도구'라는 표현까지 했다. 출판노동자 T의 자격을 문제삼은 견해 또한 지금도 같다. T는 한 시인에 대한 성폭력 허위 폭로로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이다. 미투 운동의 대표로 '미투활동가'를 자처한 그녀를 내세운 것이 결론적으로 미투운동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물론 미투는 긍정적인 운동이 아니다)

2차 가해자라는 위칼럼니스트의 주장은 나에 대한 그의 '견해'에 해당하므로 전적으로 그의 판단 영역이다.

그러나 나는 타인에 대해 2차 가해 낙인찍기에 심취한 페미니스트 진영의 행위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며, 이러한 위칼럼니스트의 서술 또한 필자에 대한 전형적인 낙인행위에 해당한다. 2차 가해라는 개념을 자꾸 적용할수록 우리 사회는 페미니스트들이 원하는 질서가 원칙으로 자리잡게 된다. 그래서 필자는 2차 가해라는 용어의 인플레와 개념 자체의 문제를 꾸준히 제기해왔다.

필자는 해당 방송에서 아래 다섯가지 교훈점을 제시하였다. 주제도 "박진성시인 사례를 통해 우리가 가져야 할 시각에 대한 얘기"라고 정했다. 해당 사례를 위칼럼니스트 표현대로 '교재'로 삼은 것이다.

이 사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돌아봐야 하는가?

1. 트위터에 대해 돌아봐야 한다. 트위터는 악랄한 사회적 살해도구다. 트위터발 보도하는 언론들은 반성해야 된다.

2. 미투라는 방식 자체의 위험성을 봐야 한다: 실명폭로, 무검증, 맹목적인 지지, 방어권이 보장되지 않는 현실. 부작용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 언론 행태의 문제.

3. 법치주의 국가에서 사적제재인 미투를 공식 지원하는 여가부의 문제.

4. 우리 모두가 잊고 있는 원칙의 문제: 고은 시인에 대한 미투 폭로에서 박시인 스스로가 미투 폭로자로 나선 사실. 자신이 당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폭로행위를 한 박시인. 진실인 폭로는 괜찮고 허위사실 폭로라 문제인 게 아니라 폭로라는 방식 자체의 위험성.

5. 폭로가 정당해질 수 있는 원칙은?

그리고 이렇게 마무리를 지었다.

"내 일이 아닌 경우에는 원칙을 잊기 쉽다. 일관된 원칙을 기억하고 있지 않으면 어떤 사례가 생겼을 때 판단하기가 쉽지 않게된다. 원칙을 기억하자."

위칼럼니스트 또한 "초기 보도에서 박진성의 반론권을 보장하지 않은 절차적 문제는 책임을 져야 하는 게 맞다."고 한다. 필자가 방송에서 계속 제기한 것도 이 문제였다.

박진성 시인이 2023년인 현재, 2016년부터 이어진 미투폭로사건의 연장선에 있는 한 여성과의 명예훼손 소송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해도, 2016년부터 2019년까지 트위터발 미투 폭로운동의 허위폭로와 허위보도의 피해자였던 것 또한 공존하는 사실이다.

무죄추정의 원칙 위반, 사적린치, 증거주의의 훼손, 여론재판과 마녀사냥의 위험 등 법치를 위협하고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미투운동에 대해 비판하는 것이 박진성 시인을 두둔하고 2차 가해를 하는 행위라는 주장은 페미니스트 진영이 비판자들을 공격하기 위해 사용하는 나쁜 방식이다.

지금도 필자의 견해는 같다. 올바른 원칙의 수혜자가 우연히 나쁜 사람이라고 해서, 혹은 후에 다른 부적절한 행위를 했다고 해서 원칙이 틀려지는 것은 아니다. 무죄추정을 옹호했는데 그 사람이 구속됐다고 해서 유죄추정이 옳아지는가?

위칼럼니스트와 페미니스트 진영이 이 사안으로 필자를 비난하는 것은 그들의 자유이나 사실관계와 견해를 교묘하게 섞고, 틀린 사실관계를 적시하고, 2차가해로 낙인찍는 것은 부당한 행위이다. 필자 또한 더 이상의 언급이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위칼럼니스트가 근거로 든 필자의 방송영상을 본다면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재차 이 사안을 필자에 대한 비판의 근거로 언급을 할 것이라면 공개토론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한다. 위칼럼니스트가 동의한다면 모든 조건을 수용할 생각이다.

필자에게 같은 비판을 한 노정태작가 등과 함께 출연해도 좋고, 다른 패널을 추가하는 것도 가능하다. 단 토론의 효율을 위해 진행자는 있어야 하고 패널은 5명 이내로 하는 게 적절할 것 같다. 발언기회만 동등하게 주어진다면 진행자, 플랫폼, 모객 등 토론회를 구성하는 모든 조건을 위칼럼니스트가 정한 방식에 따를 생각이다.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소모적 논쟁으로 피로함을 더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하는 제안이고, 응하지 않는다고 해도 괜찮다.

필자는 위칼럼니스트가 "초기 보도에서 박진성의 반론권을 보장하지 않은 절차적 문제는 책임을 져야 하는 게 맞다."라고 쓴 대목을 읽으면서 조금은 안도했다. 미투 사안에서 이 정도 얘기를 인정하는 것도 지난 수년 동안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페미니즘과 미투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원칙에 대한 정립을 해야 틀린 판단을 할 가능성을 줄일 수 있다는 점이다. 하나의 사건이 터지면 이게 우리한테 유리한지 아닌지를 먼저 보는 식으로 유불리의 건수를 모으는 것은 지성적 행위가 아니다.

그러다 보면 불리해 보이는 사안에는 대응을 안 하게 되어 정작 필요한 이야기인 원칙에 대한 상기를 놓치게 되고, 누가 누구의 편을 들었다는 자유연상에 따른 진영논리만 남는다. 페미니즘에 대한 반대를 위해 박진성 시인을 옹호하는 것은 틀렸다. 그러나 페미니즘과 미투운동을 비판하는 원칙을 따르다 보니 결과적으로 박진성 시인에 대한 옹호가 따라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약자를 위해 정의가 존재해야 하는 게 아니라, 정의를 지켜 그 결과로 약자가 보호되도록 하여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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