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애증의 [한겨레]를 떠나보내며

이선옥 승인 2021.07.25 16:15 의견 0

  지난 7월 18일 <한겨레> 토요판 비평 코너에 실린 이라영 작가의 글에 내가 하지 않은 말이 실려서 한겨레 측에 정정보도를 요청했다.(정정보도 요청 기사 링크) 이라영 작가는 7월 17일(온라인판 7월 18일 등록) <한겨레> 토요판에 실린 “더 강한 여성가족부를 원한다”라는 칼럼에 이렇게 썼다. “여성에 대한 실질적 차별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음에도 여성부 폐지를 주장하는 이들은 별도의 부처가 필요 없다고 한다. 급기야 이선옥 작가는 ‘100분 토론’에서 여성가족부가 ‘반헌법적’이고 ‘반인권적’이라는 기상천외한 주장을 하기에 이르렀다.”    

2021년 7월 18일 오전 10시

나는 이 사실을 인지한 후 7월 19일 오전 10시에 토요판 담당 기자 앞으로 다음과 같이 메일을 보냈다.

000 기자님 이선옥 작가입니다.

토요판 이라영씨 칼럼에 대해 정정보도를 요청합니다. 

7월 19일 (월) 오전 10:07

안녕하세요.

이선옥입니다.

지난 7월 18일자 토요판 비평으로 실린 이라영 작가의 
<더 강한 여성가족부를 원한다> 는 글에 제가 하지 않은 발언이 적시되어 있습니다.

라영 작가는 "여성에 대한 실질적 차별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음에도 여성부 폐지를 주장하는 이들은 별도의 부처가 필요 없다고 한다.

급기야 이선옥 작가는 ‘100분 토론’에서 여성가족부가 ‘반헌법적’이고 ‘반인권적’이라는 기상천외한 주장을 하기에 이르렀다."

라고 썼는데 저는 위와 같은 발언을 한 적이 없으며 백분토론 당시 사회자가 저의 발언을 저렇게 인용정리하여 재차 위헌적인 기구, 기본권 침해라 사회자의 말을 정정하였습니다.

반인권적, 반헌법적 이라는 말은 모두 사회자가 한 말이며 제 발언과 전혀 다른 의미여서 정정까지 하였습니다.

방송을 보고 쓴 글이라면 제가 하지 않은 말임을 알텐데 방송을 보지 않고 쓴 것인지, 보고도 왜곡을 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정정을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외부필진 칼럼의 내용을 일일이 진위파악하기 어려운 상황을 저도 잘 알기 때문에 한겨레측에 책임을 돌리지는 않을 것이지만, 어쨌든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수습의 책임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2가지로 해결방법을 요청합니다.

1.

디지털판에서는 해당 발언의 바로 뒤에(기사의 끝이 아닌, 기사를 끝까지 안읽기 때문에 저 대목 바로 다음에 위치하게 해주세요) 다음과 같이 정정문구를 써주시기 바랍니다.

"확인 결과 이선옥 작가는 위와 같은 발언을 한 사실이 없으므로 바로잡습니다."

2.

종이신문에 배포되었다면 다음주 토요판의 같은 꼭지(꼭 같은꼭지가 아니더라도 어딘가에)
다음의 내용을 실어주시기 바랍니다.

"지난 7월 18일자 토요판 비평 "더 강한 여성가족부를 원한다"에서 "급기야 이선옥 작가는 ‘100분 토론’에서 여성가족부가 ‘반헌법적’이고 ‘반인권적’이라는 기상천외한 주장을 하기에 이르렀다"라는 대목은 확인 결과 위와 같은 발언을 한 사실이 없으므로 바로잡습니다" 라고 정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해당 영상에서 제가 발언한 사실이 없다는 것은 https://www.youtube.com/watch?v=3EtCmXpaMCk&t=2231s

확인하면 알 수 있습니다.  각 12:05 / 34:28 / 37:09 사회자가 반복해서 왜곡 요약을 했고 저는 정정하고 있습니다.

왜 하지 않은 말을 했다고 매체에 쓰는 것인지 저는 납득하기 어렵네요.. 
첨부파일로 이라영씨의 기사 내용 같이 보냅니다.

저는 정정보도에 저에 대한 사과까지 포함되기를 원하지만 정정만으로도 수용할 생각이 있습니다.

또한 다른 해결방안을 제시한다면 그 또한 논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방법에 대한 얘기는 해볼 수 있으나 정정보도 자체는 시급하게 꼭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요구가 무리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이해되길 바랍니다.

이런 일로 메일을 드리게 되어 유감입니다.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이선옥 드림.

  <한겨레>측에 보낸 정정보도 요청메일1 <한겨레>측에 보낸 정정보도 요청메일2   메일에 해당 <백분토론> 영상 링크와 함께 필자가 그런 발언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할 시간대 세 곳을 구체적으로 적어보내며 사실관계 확인 후 빨리 정정해줄 것을 요청했다.

정정문구도 최대한 사실관계 확인으로만 한정해 수용가능성을 높였다.

메일을 보낸후 기자에게 확인해달라는 문자를 함께 보냈다.

오전 10시에 보낸 문자와 메일에 오후까지 답변이 없었다. 오후 2시쯤 전화를 했다.

받지 않았다.

다시 문자를 보냈다.

일단 메일이 접수됐는지, 문자를 확인했는지 알길이 없어서 메일확인을 하셨는지라도 먼저 답변 부탁한다고 보냈더니 잠시 후 전화가 왔다. 메일을 확인했으며 지금 내부에서 처리절차를 밟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 내용을 문자로라도 간단히 알려주면 좋을텐데 접수여부조차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시간만 흐른다면 매체에 대한 부정적 감정이 더해지게 된다.

합리적인 조직이고 해결이 가능하겠다는 느낌보다는 불신이 커져 더 방어적이고 공격적이게 된다.

언론사로서 민원을 처리하는 프로세스가 없는 것인가? 2시간쯤 후 기자와 통화하면서 한겨레 내부에서 정정요청을 수용하지 않으려 하는 걸 감지했다.

본디 언론사는 정정보도 요청을 잘 수용하지 않으려 한다.

반론을 실어줄 수는 있어도 정정은 꺼려한다.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는 것이니 당연히 더 수용이 어려울 것을 안다.

나는 2년 전인 2019년 7월에도 같은 일을 겪었다.

그때도 나의 발언을 왜곡해 보도한 기자는 한겨레 소속이었다. (관련기사: 이선옥 관련 정정보도 요청 과정과 결과입니다.) 한겨레의 기자는 <노컷뉴스>에 출연해 내가 하지 않은 말을 했다고 보도해 정정보도를 요청했다.

두 줄짜리 정정을 끌어내기 위해 한 달 가량을 제작진과 협상해야 했다.

당사자인 한겨레 기자는 끝까지 자신의 말에 책임지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한겨레 기자가 아닌 외부필자의 글에 대한 정정보도를 요청하게 됐다.

나는 외부필자의 글이니 매체로서는 사실관계만 확인하면 정정 부담이 덜한게 아닌가 생각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해당 필자가 반발할 수도 있고 양쪽을 조율해야 하는 일이라 쉽지 않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그런 것인지 사실관계 확인 후 간단한 정정문구만을 요청했음에도 한겨레 측에서는 종일 결정을 내려주지 않았다.

내부 회의중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첫날 저녁, 6시라는 퇴근시간을 기준으로 해서 오늘 안에 결론이 나지 않느냐, 통상 이런 일이 그렇게까지 오래 걸리느냐고 물었지만 개별 경우마다 달라서 결정시간을 정할수는 없다고 한다.

국장단 보고와 법무팀 확인 등의 과정이 필요하니 기다려 달라는 말이 다시 돌아왔다. 사실관계 확인은 매우 심플한 문제인데 이게 법무팀 확인, 국장단 확인까지 할 일인가 의문이 들었다.

<한겨레>의 외부필자 칼럼에 대한 내용 정정이 아침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도 결정할 수 없는 문제일까? 매체로서 정정보도에 응하지 않는 관행 때문인 건지, 사실관계가 틀렸음을 인정하지 않는건지 궁금했다. 한겨레 측 내부 의견에는 이라영 작가의 글이 꼭 이선옥의 말을 인용했다기보다 견해로 볼 수 있는게 아니냐는 말도 나온것 같았다.

나는 해당 문장이 견해표명이라면 따옴표로 강조인용을 하지 않았어야 하며, "이선옥 작가는 ‘100분 토론’에서 여성가족부가 ‘반헌법적’이고 ‘반인권적’이라는 기상천외한 주장을 하기에 이르렀다" 라는 문장이 어떻게 견해로 읽히는가, 정정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라고 재차 요구했다.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겨레와 악연을 쌓고 싶지 않았으나 페미니즘 매체가 돼버린 한겨레는 이 영역에서만큼은 이성과 합리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든 나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 예상은 했다. 제1야당의 대표를 두고 자사의 성평등 기조를 무너뜨린다는 이유로 섭외된 출연을 취소시키는 지경에까지 이른 사건은 오늘날 한겨레 내부가 어떤 상황인지를 보여준다.(관련기사: 한겨레와 이준석이 상징하는 것) 한겨레는 저널리즘, 표현의 자유와 같은 가치보다 페미니즘 이론에 입각한 성평등을 매체가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로 격상시켰다.

그러면서 헌법을 부정한 바 없고, 당원과 국민들의 투표로 선출된 제1야당의 대표에 대해 그를 출연시키면 '자사가 쌓은 성평등 기조에 대한 신뢰가 무너질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취소했다.

매체가 누군가를 섭외하고 말고야 자유이지만, 섭외를 취소하는 과정에서 오간 논리가 최고 지성인들이 모였다는 언론사의 수준이라기엔 조악했다. 대표이사, 편집인, 편집국장, 영상국장, 논설실장, 젠더데스크, 저널리즘책무실장, 노동조합까지 한겨레의 지성이 집단으로 모여 논의한 결론은 이준석에게 마이크를 줘서는 안 된다는 파시즘적인 결정이다.

이준석과 반대되는 견해의 출연자를 섭외해 논쟁시키자는 의견마저 용납하지 않았다. 매체가 당파적일 수는 있다해도 다양한 견해를 드러내는 가운데 당파성을 견지하는 것과, 비판적 견해를 금지하는 것으로 이를 해결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이념에 경도된 매체가 어떻게 저널리즘의 정신을 왜곡할 수 있는지, 언론사 스스로 언론의 자유를 부정하는 한겨레를 보면 알 수 있다. 결국 당일 저녁까지 정정조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겨레는 계속 내부 논의중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하루정도는 기다려줄 수 있다 생각하고 내일까지는 결론을 내려주길 바란다는 말로 첫날 과정을 마무리했다.

나는 기다리는 일에는 자신이 있다.  

2021년 7월 20일 정오

다음날인 7월 20일 정오경, 기자에게 연락이 왔다. (☞ 이와 관련해 이선옥 작가는 7월19일 <한겨레>에 “당시 토론에서 “(여가부가) 위헌적인 기구”, “기본권 침해”라고 발언했으며 여성가족부를 “반헌법적”, “반인권적”이라고 표현한 적이 없다고 알려왔습니다.) 이렇게 정정문구를 넣는 것으로 하면 어떻겠느냐는 의견이었다.

매체가 사실관계 확인 후 자신들의 판단으로 정정조치하는 건 수용하지 않되, 나의 말을 실어주는 반론형식으로 내주겠다는 것이다.

이런 형식의 수용도 어쨌든 한겨레로서는 사실관계를 부정할 수 없기에 받아들인 것이다. 나는 약간의 정정과 함께 요청 내용을 세 가지로 정리했다.
  • 그렇다면 이 문구를 (※이와 관련해 이선옥 작가는 7월19일 <한겨레>에 “당시 토론에서 “(여가부의 고유목적이) 위헌적인 기구”, “기본권 침해”라고 발언했으며 여성가족부를 “반헌법적”, “반인권적”이라고 표현한 적이 없다”고 알려왔습니다.) 이렇게 수정하여 해당 문구의 바로 뒤에 눈에 띄게 배치해 줄것,
  • 지면에도 다음주 토요판에 같은 방식으로 반영해주면 수용하겠으며,
  • 정정이 아닌 반론수준으로 수정해주겠다는 것이니 그러면 내게 반론 기사를 쓸 수 있도록 지면을 달라. 
  협의 과정에서 나는 수정조치를 해주면 어떤 형식이든 최대한 수용할 생각이 있으며 분쟁이 아닌 해결을 원한다고 여러번 강조했다.

실제로도 그랬다.

이런 문제를 가지고 언론중재위나 민형사 소송까지 가는 일은 개인에게도 매체에게도 불필요한 에너지의 낭비이다.

그러나 협상은 상대가 있는 것이니 나의 의지대로 되지 않는다는 게 늘상 어려운 점이다. 한겨레는 반론 지면은 어렵겠다며 거절했고, 온라인판 외에 종이신문의 수정 결정은 내려주지 않았다.

지면판은 이미 인쇄가 되어 나간 후라 정정의 효과가 미미하지만 그래도 어떤 식으로든 수정을 해 줄 것을 요청했는데 끝까지 지면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건 좀 더 논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마지막 자존심 같은 것인지, 기술상의 어려움인지 이유는 설명해주지 않았다.

내부에서 결정이 내려지지 않는다는 말만 반복했다. 기자는 온라인판은 바로 수정이 가능하니 그거라도 먼저 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고 했다.

나도 내 의견을 정리해서 말했다. "온라인판 수정이 조금 늦춰지는 건 관계없다.

그리고 온라인판 수정의 수위 또한 애초 요구한 정정이 아니라 나의 반론을 실어주는 식이라 내 입장에서는 미흡하지만 일의 해결을 위해 수용했다.

그러나 이는 지면판의 수정과 패키지로 이루어질 때 수용 가능한 것이지 지면에 대해서는 또 협상을 해야 한다면 나는 받아들일 수 없다.

지면판 수정을 같은 문구로 해주거나, 다른 형식의 제안을 해준다면 온라인판 수정을 받아들이겠다." 한겨레는 다시 논의해 보겠다고 했다.  

2021년 7월 20일 오후 4시

오후4시, 한겨레에서 연락이 왔다.

온라인판 수정은 즉시 하고, 지면은 동일한 수정문구를 다음주 토요판이나 8월 7일 이라영 작가의 연재순서가 돌아오는 날 중 하나를 선택해주면 반영하겠다고 한다.

나는 8월 7일로 해달라고 했다. 서로 수고했고 고맙다는 덕담을 나누고 이 선에서 해결된 걸 다행으로 여겼다. 그렇게 끝난 줄 알았다. 그러나 바로 처리하겠다는 온라인판 수정은 오후 6시까지도 실행되지 않았다.

좀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업무의 교대도 있을 수 있고 사정이 있을 수 있으니 잠정 저녁 8시까지 기다려보다가 안 되면 연락을 하기로 했다.

8시30분이 되도록 온라인판 수정은 되지 않았다. 기자에게 문자를 보냈다. "무슨 문제가 생겼나요? 적어도 오늘 6시 안에는 해결될줄 알았는데 지금까지도 처리가 안된거면 하루를 또 그냥 넘기는 셈인데 이 문제로 3일씩이나 걸린다면 제가 애써 양보한 의미가 사라지네요..

못받아들이겠다고 빨리 결정해서 명확하게 말을 해주는 쪽이 낫지 시간을 계속 끌면 저는 결렬된거라고 여길수밖에 없습니다.

처리 시간을 정해서 요청하려다 기자님이 상대 창구라 강경하게 하지않고 참은건데 이러면 저의 양보가 무색해집니다."
바로 전화가 왔다.

디지털팀에 전달을 했기 때문에 수정조치가 된 줄 알았다는 것이다.

최대한 빨리 확인 후 연락드리겠다고 다급하게 말한다.

4시에 결정나고 해당팀에 전달되었다는 정정조치는 왜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담당자가 처리하는 걸 깜빡하고 그대로 퇴근하면서 벌어진 일일까? 알 수 없다. 살다보면 악의나 고의 없이 상대방에게 피해를 끼치는 일이 생긴다.

물론 누군가의 악의가 작동할 수는 있으나 어떤 사안이든 그 일에 연루된 모든 사람이 악의나 고의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주어진 상황 속에서 자기도 모른 채, 혹은 알면서도 불가항력으로 악역을 맡아야 할 때가 있다.

인간사란 그런 것이다.

그래서 되도록 고의나 악의로 해석하지 않으려 한다.

벌어진 일의 해결에 주력하는 쪽이 부정적인 감정을 소모하는 것보다 이롭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틀 동안의 회의를 거쳐 결정한 일이 제대로 집행되지 않는 조직의 모습은 아무리 좋게 봐주려 해도 개인의 일탈보다는 원래 엉망인 조직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2021년 7월 20일 밤 8시30분

밤9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결렬을 생각하고 언론중재위와 민사소송을 하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표현의 자유는 최대한 보장되어야 하고, 행정력과 사법력을 낭비하기보다 되도록 당사자 간 타협을 통한 해결을 지향해온 터라 고민이 됐다. 그러나 페미 진영 사람들이 내게 가하는 막말과 왜곡 등의 가해행위가 한 두번이 아니고, 이대로 넘어가면 계속 비윤리적 방식의 괴롭힘이 반복될 것 같아 한 번은 이를 중단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피곤한 싸움이라고 마다해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이었다. 나의 요구가 무리하거나 비합리적인 것인가 수차례 점검했다.

언론의 보도에 대한 정정은 아무리 정성껏 한다고 해도 보도된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는 건 불가능하다.

어디에선가는 내가 하지 않은 말을 했다고 믿으며 나를 극단주의자라 여기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당사자에게는 정정의 흔적이라도 남겨두는 게 중요한 일이다. 겉으로 보기엔 석줄 짜리 정정문구에 불과하지만 이 근거가 남아있어야 오해를 풀 수 있고 나중에라도 내 견해가 왜곡된 채 전달되는 일을 막을 수 있다. 결렬을 통보하려는 순간 온라인판을 수정했다는 연락이 왔다.

밤 8시 53분이었다.

여태 처리 안 된 것을 몰랐다고 끝까지 챙기지 못한 자기 실수라며 사과했다.

나름대로 다급하게 처리하려는 노력이 보였다.

결렬 통보를 하려던 마음이 다시 흔들렸다. 일단 수정된 상황을 확인해보니 수정된 문구가 본문의 색깔과 같아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수정의 의미가 없었다.

해당 문장의 바로 다음에 괄호를 쳐서 정정문구를 눈에 띄게 넣어달라는게 요구사항이었고 합의된 것인데 시급하게 수정하다보니 이를 놓친 것 같았다.   눈에 띄지 않는 1차 수정   다시 합의된대로 해 줄 것을 요청했다.

잠시 후 볼드처리가 불가해 색깔을 넣는 것으로 처리했다는 연락이 왔다. 최종 상황은 이렇게 정리됐다.

결렬 통보는 하지 않았지만 8월 7일 지면판에 수정된 것까지 확인해 본 후 최종 마무리하겠다고 말했다.

기자의 사과를 받았으나 이런 일로 만나게 되어 안타까울 뿐 유감은 없으며 애써줘서 고맙다고 서로 인사한 후 마무리했다. 꼬박 이틀동안 한겨레와 벌인 정정요청 사건은 이렇게 일단락됐다.   최종 수정된 한겨레 온라인 기사의 모습   정정보도를 요청한 이라영 작가의 글.

우측 상단에 최종 수정 시간이 기록돼있다.
 

한겨레의 몰락, 진보의 타락

나는 한겨레의 기자들과 오랜 친분이 있다.

최근 한겨레와 갈등한 두 사례는 모두 내가 페미니즘을 비판하지 않았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다.

아마 이전의 신뢰관계였다면 서로를 존중하며 쉽게 문제를 풀어나갔을 것이다. 예전의 한겨레는 멋진 매체였고 기자들은 자부심이 있었다.

자신만의 문체와 관점을 가진 기자들을 보며 부러웠고 급진적인 의제를 감각적으로 다루는 '힙'함에 감탄하기도 했다.

한겨레는 자유의 가치를 아는 매체였다. 어느해인가 한겨레의 기자가 내게 말했다.

아직 비정규직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 사회적 공감대가 크지 않을 때였다. "나는 우리(한겨레)가 집중해야 할 의제가 두개라고 생각해.

국가보안법 폐지랑 비정규직 문제.

이 둘은 우리사회의 자유의 지표 면에서, 그리고 구성원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면에서 근본적인 문제고 한겨레는 그래서 이 둘을 끈질기게 다뤄야 돼.

언론이라면 이걸 앞서 고민해야지.

그런 점에서 니가 노동자들의 문제를 예리하게 다루는 글을 계속 써주면 좋겠어."
나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한겨레를 보면 스스로 가장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여 가장 멍청한 결정을 내리는 집단의 상징 같다.

이준석에게 마이크를 줘서는 안 된다는 결정을 보라.

사장이나 고위간부 개인의 독단이 아닌 조직의 최고 책임단위들이 모여 민주적 절차를 거쳐 내렸다는 것이 이 한심한 사태의 핵심이다.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도, 동종업계의 신뢰도에서 늘 수위를 차지하던 매체였다.

그러나 진보의 맏이라 불리던 과거의 영화와 권위는 이제 찾아볼 수 없다. 국가보안법과 비정규직, 자유와 권리와 노동의 문제에 천착하던 기자들의 목소리는 미약하고, 온통 페미니즘, 젠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강박적 기사들이 쏟아진다.

이들에게는 자유와 권리라는 가치보다 정체성 집단의 이익이 우위에 있다.

수십년 전의 페미니즘 이론에 대한 검증 없이 경전 취급하며 그 논리를 앵무새처럼 반복한다.

자신들의 지적 게으름과 현실 인간의 삶에 대한 존중없음을 돌아보는 대신 대중이 공부를 하지 않아 반동이 됐다고 여긴다. 일상의 부조리를 건져올려 날카롭게 정치화하던 감각은 사라지고 지면은 여성(페미니스트)들의 일상적, 감정적, 주관적 불편함을 전시하는 일기장이 되었다. 자신만의 문체를 가진 기자는 점점 사라지고 그 자신이 페미니스트인 기자들은 하나같이 페미니즘 논리만을 기사에 담는다.

이념에 경도된 기자에게서 자신만의 관점을 담은 독특한 문체가 나올리 없다.

페미니즘 논리를 옹호하기 위해서라면 비윤리적 취재행태를 마다하지 않는 기자들이 여전히 도덕적 우월감에는 빠져있다.

독자들의 비웃음을 그저 반동이라 취급한다. 586세대에 해당하는 전직 진보 남자 기자들은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앉아 자기 세대가 가진 여성에 대한 부채감을 간증하기 바쁘며, 여자를 위하고 여자 말을 들어주는 나는야 멋진 남자라는 '서윗가이' 놀이에 빠져있다. 수년 동안 한겨레를 지켜보며 한 조직이 순식간에 이처럼 집단적으로 망가질 수 있을까 한탄했다.

때로는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한겨레 뿐 아니라 한국사회 전체가 불과 5~6년 사이에 집단적인 비이성에 빠져있는 현실이다.

자유의 감각은 점점 마비되고 그 선봉에는 페미니즘과 정체성 정치를 내세운 진보라는 진영이 서 있다.  

'21세기가 죽여야 하는 건 사람이 아니라 이념'

2015년 스웨덴 한림원은 2차 세계대전과 체르노빌 원전사고 등 인간이 자초한 비극의 참상을 고발해온 여성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를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순문학이 아닌 증언의 기록집에 대한 노벨문학상 수상은 이례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2017년 그녀가 방한했을 때 페미 진영은 여성작가의 독특한 작업과 시각을 칭송하며 수상에 의미부여를 했고, 한겨레도 지면을 통해 그녀와 그녀의 작업을 찬양해 마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인간사의 비극에서 이념이라는 키워드를 건져낸 사람이다.

이념과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기록한 그녀는 '21세기가 죽여야 하는 건 사람이 아니라 이념'이라는 결론을 강조했다. 그녀의 작업을 찬양하고 의미를 이해한다는 한겨레 등 페미 진영은 정작 자신들이 경전으로 삼은 '페미니즘' 또한 하나의 이념일 뿐이며, 그 이념에 경도된 자들은 얼마든지 악행을 저지르고 비극을 양산할 수 있다는 사실은 모르는 듯 하다.

전쟁과 살육의 형태로 실행되어야만 비극인 것은 아니다. 날이 갈수록 페미니즘의 기관지가 되어가는 한겨레를 보는 일은 여전히 씁쓸하다.

그들이 쏟아내는 기사의 아래에는 삶의 타격을 입고 쓰러진 이들의 고통과 분노가 쌓여간다.

기치를 들고 앞만을 쳐다보고 질주하는 세력은 발아래를 보지 않는다.

이러한 이념집단이 기승할 때 소속된 곳 없는 개인들이 기댈 곳은  합리와 이성의 목소리 뿐이다.

예전의 한겨레는 그들의 기댈곳을 자처하며 합리와 이성의 자리에 있으려 노력했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아니다. <한겨레>에 석 줄 짜리 정정문구를 받아낸 과정을 굳이 기록하는 건 이 때문이다.

예전의 한겨레가 이념의 깃발 아래 쓰러진 이들의 삶을 기록했듯, 지금 한겨레의 발 아래에 쌓여가는 비극 또한 차곡차곡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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