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정치라는 것은 없다: 이정근의 오빠정치는 여성정치가 아닌 이정근의 정치

이선옥 승인 2023.06.15 01:37 | 최종 수정 2023.12.08 11:13 의견 0

한 가지 사실부터 규정하는 것으로 글을 시작한다.

이정근의 '오빠정치'는 여성정치가 아니라 이정근의 정치다.

이정근이라는 사람이 사석에서 오빠라는 호칭을 자주 쓰고 친근한 인간관계를 맺는일에 재능이 있었다면 그건 이정근 개인의 자질이지 여성이어서가 아니다.

남성의 경우도 나이 파악 끝난 순간 바로 형님동생 하며 엎어지는 유형이 있는가하면, 그러한 친밀도와 거리가 먼 사람도 있다.

애초 여성정치라는 것은 없다.

남성정치도 없다.

정치인 각자의 능력과 기질과 성과가 다 다른데 여성, 남성으로 성별을 나눠 동질성을 주장하는 것은 과학적이지 않다.

이에 동조하는 것은 여성이라는 성별을 내세워 이득을 얻고 싶은 페미니스트들의 선동에 휘둘리는 일이다.

어떤 성별이 하든 정치라는 행위는 같은 것이며 이에 대한 평가는 좋은 정치인지 나쁜 정치인지로 나뉠 뿐이다.

출처: 중앙일보 애초 여성정치라는 개념이 존재하고 그것이 더 우월하다는 주장부터 비합리적이다.

여성은 섬세하고, 부드럽고, 부패와 거리가 멀고, 생활밀착형이고, 조화를 중시하고, 모성이 있고..등등을 내세워 여성이 정치를 해야하고 여성이 정치에 진출해야 타락한 정치가 변화발전할 것이라고 주장한 페미니스트들의 비과학적 선동을 받아들인 것부터 단추를 잘못 꿴 것이다.

페미니스트들은 늘 성별 고정관념을 강화하지 말라며 여성의 특성을 정형화하는 것을 거부하고 비난해왔다.

그런데 국회의원이나 고위직 임원, 관료자리를 내놓으라고 요구할 때면 말을 바꿔 여성집단 전체가 본래 우월한 여성적 속성을 가졌다고 주장한다.

그 자체로 이중적이며 모순이다.

여성이기 때문에 더 우월하다고 내세운 요소들에 현재 여성정치인들을 대입해보자.

심상정이 섬세하고 부드러운가? 정춘숙이 조화를 중시하고 모성이 넘치는가? 권인숙이 남성보다 우월한 유능함을 가지고 있나? 이정근이 부패와 거리가 먼가? 나경원과 류호정을 동질하다고 묶을 수 있나? 현재 여성 정치인들이 남성보다 유능한 성과를 뚜렷하게 낸 바가 있나? 있다면 오로지 그가 여성이어서 가능했던 일인가, 성과를 낸 정치인의 성별이 여성이었던 것인가? 만일 남성 정치인이 성과를 내면 남성 정치의 우월함이 입증된 것인가? 여성정치가 있으며 그것이 더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이득이 되는 일에는 여성을 내세우다가 불리할 때는 여성에 대한 사회의 편견 때문이다, 여성에게 더 가혹한 잣대를 들이댄다는 등의 변명으로 잘못을 면책하려 한다.

이러한 방어전략은 페미니즘이 만들어준 논리이다.

페미니스트가 아닌 여성정치인들도 곧잘 이러한 논리로 자신을 방어한다.

여성정치는 실체가 무엇인지 정의할 수 없지만 페미니즘 정치는 여성정치라는 그럴듯한 개념을 숙주로 이용해 존재한다.

페미니즘 정치의 해악

페미니스트와 같은 이념집단이 하는 정체성 정치는 여성정치라는 막연한 개념보다 명확하게 해악이다.

페미니스트들이 정계에 진출하는 것은 그녀들 개인에게 권력 획득과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 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들은 공공연히 페미니즘을 국가의 이념으로 삼는 것을 의회 진출의 목적이라 언급한다.

헌법 위에 페미니즘을 두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좋은 이념인데 오해받고 있다는 정영애 전 여가부장관(출처: 뉴스1) 여성에게는 무고죄 수사를 하지 말라는 권인숙 의원.(출처: 머니투데이) 이들은 여성정치라는 개념을 이용해 정치 뿐 아니라 공공, 민간 모든 영역에 여성할당제 강제 확대, 비동의강간제 도입, 성폭력 범위 확대와 엄벌, 여성에 대한 특혜확대와 같은 위헌적이며 성차별적인 제도들을 도입시킨다.

국가 차원에 페미니즘을 장착해 국민들은 물론 모든 국가의 정책이 페미니즘에 복무하도록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이 성주류화, 성인지 예산, 성인지 정책, 성평등 국가와 같은 용어들 속에 녹아 있다.

이들은 그것이 진실로 정의라고 믿으며, 이를 달성할수록 자신의 정치경제적 이익 또한 비례해 증가하므로 여성정치라는 그럴듯한 개념 뒤에 숨어 페미니즘 정치에 더욱 매진한다.

페미니즘만 열심히 하면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므로 이들에게 정치인으로서 자질이나 역량의 평가는 오직 '내가 의회에 들어와 얼마나 페미니즘에 복무했는가' 하는 주관적 자부심이 기준이 된다.

예를 들어 여성의원 권인숙의 자질과 능력은 누구도 좋은 점수를 줄 수 없을만큼 엉망이다.

국책연구원장 자리를 끝까지 놓지 않고 버티다 공천이 확정되자 사표를 내는 비윤리적 탐욕으로 의원생활을 시작했으며, 의원이 된 후에도 성별갈등을 조장하는 발언을 반복적으로 하고, 본회의 시간 내내 게임을 하다 적발되거나, 23년차 검사출신의 장관에게 '성폭행 수사 해보셨느냐'는 함량 미달의 질의로 조롱을 사기도 했다.

그럼에도 반성이나 성찰같은 것은 없다.

애초 자신의 정체성을 정치인이 아닌 의회 속 페미니즘 활동가로 규정한 페미니스트들은 모든 비판을 구조적 여성혐오로 취급하면 그만이다.

자신은 페미니즘 운동에 열심히 복무했으므로 여성정치를 잘 했다고 자화자찬한다.

여성이라는 성별 정체성 하나로 자신의 정치가 곧 정의가 된 것이다.

권인숙 의원은 출마자격부터 논란이었다.

(출처: 경향신문)
국회본회의 내내 스마트폰 게임을 하다 걸린 권인숙 의원.(출처: 국민일보) 23년차 검사출신 장관에게 성폭행 수사 해봤느냐는 수준 이하의 질문으로 조롱을 산 권인숙 의원(출처: 채널A) 여성정치라는 개념이 실체가 있다고 주장하려면 여성대통령과 비선실세 여성의 부패 스캔들이 있었을 때, 여성운동가 출신 여성총리가 뇌물혐의로 구속됐을 때, 여가부 장관들이 비판받고 경질됐을 때, 집권당의 여성사무부총장이 비리혐의로 구속됐을 때마다 여성정치의 이름으로 자기반성과 쇄신을 다짐했어야 마땅하다.

또한 권인숙 의원 사례처럼 여성할당으로 의회에 입성한 사람이 수준 이하의 정치행위로 여론의 뭇매를 맞을 때는 먼저 '여성'정치인으로서 반성을 말했어야 한다.

그러나 어떤 페미니스트도 이러한 일들을 여성정치의 역량부족이며 실패라 말하지 않는다.

여성이라는 성별을 집단적으로 우월하다고 주장하다가도 여성의 실패 사례에는 철저히 구조적 차별 문제로 취급하면서 집단적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이다.

이는 애초 페미니즘이라는 이념에 '책임'이라는 덕목이 없기 때문이다.

여성으로 태어나는 순간 가부장제의 피해자로만 존재한다는 이념에서 책임이 도출될 수 없는 건 당연한 귀결이다.

페미니즘 정치의 분리

이정근씨의 녹취록에서 '오빠오빠' 하는 대목이 강렬하게 꽂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공적인 자리가 아닌 사적 대화에서 친밀도에 따른 호칭을 구가하는 것은 여성의 특성도, 여성 정치인의 특성도 아니 자연인 아무개의 특성일 뿐이다.

이정근씨가 민주당의 고위 당직자이다보니 이러한 현상을 두고 진보의 여성정치, 보수의 여성정치로 나누어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를 진보와 보수의 문제로 보는 것은 애초 여성정치라는 용어 자체가 명확하게 정의되는 개념이라는 착각을 갖게 한다.

또한 개인의 노력을 권장하고, 그 개인들의 노력이 공정한 경쟁을 통해 발현되도록 보장하며, 이에 대한 성과와 보상이 합당하게 주어지는 것이 사회발전의 동력이라고 믿는 보수진영이라면 더욱 여성정치라는 개념을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할당제와 같은 페미니즘 정치에 반대하는 것이 보수진영으로서는 합당하다.

공정한 경쟁의 장을 빼앗고, 일생 변하지 않는 성별이라는 속성 하나로 자격 되는 이의 기회를 빼앗는 할당제는 보수의 가치와 맞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여성정치라는 개념은 실체가 없다.

정치인이라는 영역은 여성이냐 남성이냐 하는 성별정체성이 아니라 능력과 자질을 갖춘 정치인인가 아닌가가 중요하며, 좋은 정치와 나쁜 정치는 그러한 정치인들의 활동이 만들어내는 결과이지 여성과 남성이라는 성별 특성이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는 것이 상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페미니즘 정치는 실체가 분명하다.

페미니스트 집단인 여성단체 출신들이 할당제를 주장하는 것, 이를 통해 의회 입성에 매진하는 것, 국가정책에 페미니즘을 도입하는 것, 성평등을 위해 페미니즘을 전국민에게 교육하려는 것처럼 페미니즘 정치는 행위자, 행위, 이념집단으로서 목적이 분명하다.

이들은 목적을 숨기거나 에둘러 말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실체가 없는 여성정치라는 개념 대신 페미니즘 정치를 분리해내어 이의 해악을 밝히는 일이 필요하다.

이정근의 정치는 이정근의 정치일 뿐, 이것을 여성정치의 실패라 규정하는 것 또한 애초 존재할 수 없는 것을 있다고 주장해 이득을 취해 온 페미니즘 비즈니스가 만들어낸 허상일 따름이다.

페미니즘이 만든 허상 위에서 논의하면 답이 나올 수 없다.

그들이 만든 교활한 개념을 애초 인정하지 않아야 올바른 해결이 가능하다.

여성정치가 있다고 인정하는 순간 그들의 논리 안으로 말려 들어가게 되고 어떠한 결론이든 이익은 페미니스트가 얻는다.

이미 여성정치 논리를 발전시켜 여성할당제라는 위헌적 제도를 만들어 과실을 따먹고 있지 않은가.

이정근 사건에서 얻을 교훈 중 하나는 여성정치라는 실체없는 개념을 없애고 페미니즘 정치를 명확하게 규정해 그 해악을 밝히는 일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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