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대 방종이라는 세뇌된 이분법(2): 음란을 허하라던 좌파의 아이러니

이선옥 승인 2022.10.21 14:25 의견 0
  외설적인 말과 행위는 통제를 원하는 국가권력과의 갈등 전선에서 언제나 첨예한 주제였다.

특히 미국의 도색잡지 <허슬러>의 발행인인 래리 플린트(Larry Flynt) 사건은, 외설과 표현의 자유가 대립한 역사에서 상징적이며 중요한 판결로 기록되어 있다.

1988년, 래리 플린트는 보수 기독교인에 대한 외설적 패러디로 소송을 당하자 이를 연방대법원까지 끌고 가 결국 승리한다. 이 사건이 의미를 갖는 것은 이념, 학문, 정견, 신념과 같은 '정치적'인 표현에 대한 국가권력의 부당한 탄압에 맞서는 식의 '숭고한' 싸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와 변호사는 표현의 자유를 명시한 미국의 수정헌법 1조를 근거로, 더러운 외형을 띠었으나 실제로는 고귀한 의미를 지닌 승리를 이끌어낸다. 래리 플린트는 스스로 욕망에 충실한 세속적인 인간임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성산업을 규제하려는 보수주의자들과 평생을 싸운 포르노광이었다.

그는 이 소송에서도 자신을 쓰레기라 칭하며, 수정헌법 1조가 자신과 같은 쓰레기의 자유를 보호해 준다면 당신들 모두를 보호해 줄 것이라 주장했다.

연방대법원은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   도색잡지 허슬러의 발행인 래리 플린트(출처: 조선일보)   래리 플린트 사건은 그저 속물적 이익만이 목표이고, 고귀함이라고는 없이 저속하기만 하며, 사회에 해악을 끼친다고 평가되는 '더러운' 표현행위에 대한 사법적 보호의 정당성을 인정함으로써, 표현의 자유라는 권리의 본질을 환기시키는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됐다. 오래전부터 좌파를 포함한 진보진영의 지식인들은 '나는 당신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 견해로 인해 핍박 받는다면 당신과 함께 싸울 것이다'라는 사상가의 말을 자주 인용했다.

래리 플린트 사건 또한 포르노 합법화나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주장에 위 볼테르(의 말이라고 잘못 알려진)만큼이나 단골로 인용되었다. 이들은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지지하며 정치적으로 매우 급진적인 이념이나 극단적 주의주장일지라도 포용하는 것이 민주주의 사회라 주장해왔다.

포르노 합법화나 일베사이트 폐쇄 반대와 같은 견해도 그러한 주장의 연장선상에서 나왔다.

적어도 과거의 좌파는 '더러움'을 옹호하는 일이 우리모두의 자유를 확장하는 것임을 믿었고 자유의 대척점에 있는 국가의 통제를 반대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진보는 어떠한가? 비키니 라이딩 사건처럼 특히 세속적 이익과 연결되는 성적 사안에서 자유 수호의 전선은 성립되지 않는다.

진보진영은 퀴어 퍼레이드에서 티팬티 등 과도한 노출에 경범죄 적용을 하거나, 불꽃 페미액션의 가슴노출 시위를 경범죄로 처벌하는 것에는 반대하지만 비키니 라이딩 처벌은 문제제기 하지 않는다.

남성혐오 사이트인 워마드의 반사회적 표현행위는 표현의 자유를 위한 공익적 소송으로 연대하지만, 성인사이트 접속을 차단하는 정부에 반대한 남성들의 시위는 '인터넷 검열 금지를 앞세워 야동을 허하라'고 요구한다며 비하한다. 음란과 외설은 언제나 국가권력을 상대로 한 자유 수호 투쟁의 최전선을 차지해왔다.

내 몸을 자유의지의 외적 표현 도구로 사용하는 것, 내 몸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하는 것은 그 자체로 신체를 가진 인간의 본질적 자유이며 권리에 해당한다.

그것이 고귀한 행위로 발현되는가 저속한 행위로 발현되는가는 이 사안에서 본질적 쟁점이 아니다.

오히려 저속하게 취급되어 고귀한 쟁점이 되지 못하는 사안이야말로 대중의 도덕적 비난까지 더해져 자유라는 쟁점을 흐리게 하므로 권리의 후퇴를 가져오기 쉽다. 강남의 대로에서 비키니를 입고 오토바이를 탄 여성과 퍼포먼스 기획자 모두 자유를 이야기했다.

그러나 국가의 과도한 처벌은 문제가 있지만, 이들의 행위를 자유권이나 인권의 개념으로 옹호하는 것은 비판하는 견해가 존재한다.

대중의 흥미를 일으켜 소셜미디어를 통해 관심을 얻고 이를 돈벌이에 이용하려는 자본주의적 영리행위 때문에 자유라는 개념이 오남용 된다는 것이다. 혹자는 '겨우 벗을 자유'를 위해 아무런 철학적 고찰 없이 진정한 자유의 개념을 왜곡한다는 비판을 가한다.

다소 심각한 노출에 불편함을 느낀 사람들도 이러한 견해에 동의한다.

이 노출에 어떤 유의미한 철학적 고찰이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야말로 자유에 대한 철학적인 논의에서 중요한 논쟁점을 도출한다. 자유는 가치이면서 동시에 규범이다.

가치로서의 자유와 규범으로서의 자유를 구분하지 않으면 고귀한 자유만이 보호될 가치가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규범의 지위에 두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사람들은 흔히 자유와 방종은 다르며, 방종은 용인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자유 대 방종이라는 세뇌된 이분법이 가치와 규범을 혼동하도록 만든다.

자유와 방종이라는 이분법을 세뇌시켜 이득을 얻는 존재는 언제나 더많은 통제권력을 가지려는 국가다. 그런데 좌파적이면서 계급적인 사고에 기반한 주장은 공교롭게도 평범한 사람들의 도덕규범이나 윤리적 차원의 감정적 사고와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계급적 사고자에게 자본의 욕망을 옹호하는 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진정한 자유가 아닌 것은 자유의 외피를 두를 수 없고, 둘러서도 안 되며, 자유를 주장할 자격이 없다고 한다.

윤리적 사고자에게도 과도한 노출은 공중도덕과 예의에 어긋나고 타인을 불쾌하게 하므로 마냥 자유라고 인정해줄 수 없는 방종한 행위가 된다. 여기서 더 문제적인 것은 계급적 사고자다.

공산주의 국가, 독재국가, 현재의 종교국가들까지 문화적 금지에 앞장선 권력들은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문화침투, 자본주의 쓰레기 척결, 세속적 타락의 금지 등을 명분으로 외설과 음란물에 대한 금지를 정당화했다. 만일 과거 표현의 자유를 외치며 군사독재의 문화검열에 반대한 사람이 비키니 라이딩에 대해서는 자본의 욕망에 복무하는 행위라며 비판한다면, 이는 변절이 아니라 원래 전체주의적인 성향을 가졌으나 시기적으로 독재정권 치하에 있었다는 우연적인 이유가 그를 자유의 수호자로 오인하게 한 것이다.

여기에서 표현의 자유라는 개념은 단지 자신들이 억압당할 때에 써먹을 저항 논리에 일시적 도구로만 이용되었을 뿐이다. 다소 노출이 있는 상태로 통행하는 행위는 진정한 자유권에 해당되지 않는가? 진정함을 인정받는 자유란 무엇이고, 그 인정은 누가 하는가? 누군가 보기에 감정적 불편함을 준다는 이유로 처벌을 하는 국가의 행위는 국민의 자유를 위협하지 않는가? 비키니 라이딩 사태처럼 국가가 국민의 자유를 보호할 의무보다 통제권력을 휘두르려는 습성을 보이는 것에 대해 비판하기보다는, 외설적인 행위에 대한 즉자적 거부감을 가치판단의 영역으로 가져가 보호되어야 할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를 더 본질적으로 취급하는 것은 정치도덕적인 것과 윤리적인 것을 같은 층위로 보는 것이다. 비키니 라이딩 퍼포먼스에 대해 경찰이 경범죄 적용을 고려 중이지만 이들을 옹호해줄 세력은 없다.

페미니스트 시위처럼 가슴을 노출하지도 않았고, 의사를 표현하는 퍼포먼스인 것도 동일한데 비키니 여성만 처벌되는 근거는 성욕 자극이나 성적수치심 유발과 같은 감정적 요인일 가능성이 크다.   출처: 매일경제   이러한 법조항은 참으로 모호하다.

불꽃페미액션의 가슴 노출 퍼포먼스도 성욕 자극이 될 수 있고, 타인으로 하여금 성적수치심을 느끼게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통상, '보편, '일반적', '불쾌감', '수치심'과 같은 개념은 처벌의 기준이 되기에 부적절하다.

결국 공권력의 자의적 판단에 휘둘리게 되므로 시민의 권리를 위협하는 조항으로 작동한다. 과거 한국의 군사독재정권은 표현물에 대한 금지, 특히 음란물 처벌에 앞장섰다.

인간의 정신을 흐리는 더러운 것들로부터 국민들의 정신을 보호해 사회를 정화한다는 명분이었다.

국가는 자유와 방종의 개념을 왜곡해 늘상 대립시켰다.

옳고 깨끗하고 점잖은 행위일 때만 허용된다는 개념으로 자유를 오염시킨 뒤, 단 방종은 안된다며 자유와 방종을 대립적인 것으로 만들어 금지를 정당화했다.

이러한 개념에 세뇌되면서 자유는 옳지만 방종은 안 된다는 공식이 마치 진리인양 광범위하게 안착됐다. 독재정권은 사라졌지만 자유와 방종이라는 세뇌된 이분법은 함께 사라지지 않았다.

돈을 벌기 위해 비키니 차림을 하는 행위는 반자본주의적인 사고관에 의해 고귀한 자유의 개념을 오염시킨 죄로 비판 받는다.

과거 국가가 비난하고 금지한 '방종'의 자리는 이제 '자본주의적 욕망'으로 대체되었다.

그것도 좌파들에 의해.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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