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과 정체성 정치라는 반지성적 운동의 해악에 대하여

이선옥 승인 2022.07.20 15:49 | 최종 수정 2024.04.20 19:27 의견 0

2022년 7월 19일 '공정과 정의'에서 주관한 '반지성시대 꼰대퇴치 좌담회'에 토론자로 참여했습니다.

주어진 시간이 10분이어서 간략하게 페미니즘의 반지성 행위에 대해 적었습니다.

발표문을 일부 보완하여 올립니다.

페미니즘과 정체성 정치라는 반지성적 운동의 해악에 대하여

이선옥(작가/ 이선옥닷컴 대표)

황도수 선생님의 발제문을 읽으면서 문서에서 제시한 반지성의 사례에 '페미니즘'을 대입하면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오늘날 우리사회의 반지성에 페미니즘과 여성운동이 포함된다는 사실, 그럼에도 이에 대한 지성적인 논의의 장은 전혀 가동되지 않는 현실에 우려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성별갈등은 젊은 세대에게 지역갈등과 계급갈등을 넘어 제1의 갈등으로 부상했습니다.

성별갈등의 기저에는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들이 주도하는 여성주의 운동에 대한 불신과 분노가 자리하고 있고, 약자를 위한 운동으로 지지받았던 페미니즘은 현재 불공정과 반지성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를 단순히 이대남과 이대녀의 갈등, 이대남의 몰이해, 성평등 사회로 가는 과정의 과도기적 혼란쯤으로 치부하는 것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증폭에 기여합니다.

기성세대가 이처럼 안일하게 취급한 탓에 오늘날 성별갈등이 이렇게까지 심화되었고 젊은남녀가 서로 증오하는 세상이 도래했습니다. 저는 이러한 현상의 본질적 이유를 페미니즘이라는 이념의 시대착오성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페미니즘을 위시한 정체성 정치와 PC주의 운동은 우리 사회에 혼돈과 반지성, 갈등이라는 해악을 확산하고 있습니다.

페미니즘과 정체성 정치, PC주의라는 반지성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는 인종, 민족, 종교, 성별, 젠더, 장애, 성적지향, 문화 등 공유되는 집단 정체성을 기반으로 배타적인 정치 동맹을 추구하는 정치 운동이자 사상입니다. PC주의(Political Correctness)는 정치적 올바름 혹은 정치적 교정주의라 불리는데, 말의 표현이나 용어의 사용에서 인종·민족·언어·종교·성차별 등의 편견이 포함되지 않도록 하자는 운동이며 정체성 정치가 구현되는 한 방식입니다. 오늘날 정체성 정치의 대표주자는 페미니즘이며, 페미니즘은 여성이라는 집단적 성별정체성을 하나의 권리단위로 취급합니다.

여성은 약자이므로 약자에게 불편과 해를 끼치는 모든 언어적, 문화적, 물리적, 정치적 위해요소를 제거하는 것이야말로 사회정의의 실현이라는 논리입니다.

근대적 국가에서 권리의 단위는 '개인'이고, 당연히 모든 헌법적 권리는 개인에게 귀속됩니다. 그러나 최근 한국에서 커다란 세력으로 부상한 새로운 세대의 페미니즘 운동-넷(net)페미니스트 혹은 영페미니스트, 4세대 페미니스트- 운동은 이러한 근대사회의 기반을 뿌리부터 뒤흔들고 있습니다.

이들은 이것이야말로 새로운 질서이자 인류가 나아갈 방향이라고 주장하지만 현실 사회에서 이들이 주장하는 이념과 제도적 요구는 그야말로 반지성의 모든 요소를 가지고 있다 할 것입니다.

여성은 언제나 약자라는 '피해자되기 정치'의 반지성

발제문 5쪽에 이러한 구절이 나옵니다.

"히라카와 가쓰미(平川克美)는 하시모또가 “오사카의 대중을 선동하기 위해서는 오사카 사람을 피해자의 자리에 앉히는 것이 가장 손쉽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이해해, “오사카는 언제나 도쿄보다 아래로 밀려나 불이익을 당해왔다”고 하는 “원한을 들쑤셔 오사카 사람이 도쿄에 대해 의식적인지 무의식적인지 품고 있는 특별한 감정을 부채질”하는, 이른바 “반지성주의를 대중 선동의 도구로서” 이용하는 대표적인 정치인으로 비판한다."

여기에 페미니즘이 주장하는 바를 대입해 보겠습니다.

"정의롭고자 하는 대중을 선동하기 위해서는 여성을 피해자의 자리에 앉히는 것이 가장 손쉽다.
페미니즘은 여성은 언제나 남성보다 아래로 밀려나 불이익을 당해왔다고 하며 원한을 들쑤셔, 여성이 남성에 대해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품고 있는 특별한 감정을 부채질하는 반지성주의를 대중 선동의 도구로 이용한다."

오늘날 제도적, 문화적 차별이 현저하게 사라진 20대 여성들이 페미니즘의 선두에서 주장하는 표현들을 보면 여성에 대한 차별이 제도적으로 존재했던 시대의 여성들보다 과격하고 극단적입니다.

영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을 피해자의 자리에 앉히는 손쉽고 드라마틱한 방법에 몰두합니다. 여성의 피해만을 부각하는 비윤리적인 사운드 바이트를 도구로 사용합니다. 사운드 바이트(sound bite)란 미디어나 정치인이 주장을 핵심적으로 전달하려 뽑아낸 짧고 강렬한 문장을 말합니다.받는다’, ‘전쟁의 최종 피해자는 여성이다’, '남성은 잠재적 가해자다' '20대 여성은 조용히 학살당하고 있다' ‘혐오는 아래로 흐른다’, '페미사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에서의 반지성

이러한 시도는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을 계기로 급속하게 확산되어 영페미니즘의 본류로 자리잡게 됩니다. 경찰과 범죄 전문가들은 여성혐오 범죄가 아닌 정신질환에 의한 묻지마 범죄에 가깝다는 결론을 내리며 여성에 대한 증오범죄로 보기는 어렵다고 진단했습니다.

그러나 넷페미니스트들이 이에 반발하며 명백한 여성혐오 범죄라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오히려 가부장제 하에서 전문가들 또한 기존의 남성질서 체제에서 구축된 지식일 뿐이므로 여성혐오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치부했습니다. 온라인을 구심으로 한 넷페미니스트 집단은 '여자라서 죽었다'는 구호를 반복하며 강남역에 모여 추모행사를 벌였고, 분노와 공포를 공유한 젊은 여성들이 이 구호에 동참하기 시작했습니다.

진보적인 언론들이 이를 집중 보도하면서 정치권마저 여성혐오와 여성혐오 범죄에 대한 퇴치를 속속 약속하며 추모행렬에 가담했습니다. 여성의 죽음은 안타까운 일이고, 범죄에는 예방과 합당한 처벌이 따라야 하지만 강남역 살인사건은 편견과 정념에 기반한 잘못된 분석에 대중의 분노와 증오의 감정이 결합되면서 지금까지도 여성들이 실제 이상의 과잉된 공포에 사로잡히는 현실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2018년 혜화역 집회에서의 반지성

여성들이 이용하는 커뮤니티에 한 남성의 나체사진이 게시됐고, 남성의 신고로 범인인 여성이 검거됐습니다.

그런데 넷페미스트들이 '남성 범죄자에게는 관대하다가 여성이 가해자로 밝혀지자 신속하게 수사하고 잡아들였다'며 오히려 오프라인 시위를 조직합니다. 이들은 '불법촬영 성차별 편파수사 규탄’을 내걸고 최초로 생물학적 여성들만의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 시위에서는 피해 남성에 대한 조롱과 혐오적 구호가 이어지는 등 공공연한 가해행위가 벌어졌고, 경찰이나 남성에 대한 혐오적 표현 또한 넘첬으나 언론은 여성들의 차별반대 집회로 일제히 지지했습니다.

정치권은 일방적으로 여성들만을 옹호했습니다. 반면 남성들은 남성이 피해를 입은 사건이며, 가해자가 남성혐오 사이트 이용자인 여성임이 밝혀졌는데도 오히려 가해자를 옹호하고 피해자를 비난하는 여성들의 비윤리적 결집에 분노, 범죄를 사안이 아닌 성별의 문제로 가져가는 여성들과 갈등합니다.

그러면서 이러한 배경은 도외시한 채, 여성 가해 사실에는 침묵하고 여성들의 목소리만을 옹호하고 대변하는 미디어와 정치권의 행태에 재차 분노합니다.

혜화역 시위를 기점으로 남성과 여성들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이 생깁니다. 이 외에도 메갈리아와 미러링, 미투운동의 무죄추정원칙 위반, 이수역 폭행사건에서의 거짓과 왜곡 선동, N번방 26만명 왜곡, 디지털교도소 옹호 등 허위, 선동, 담론부재, 미디어의 이념적 편향과 상업적 이용, 적정절차 위반 등 여러 사건들에서 영페미니스트 집단은 근대적 질서를 파괴하는 반지성적 행위를 계속 해왔습니다.

본문 11쪽에서 지적했듯 영페미 집단은 진실보다 '공감'을 요구하며 이성적 논의보다 감성과 수사 전략을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합니다.

"설득 과정이 지식[**이성적 논의]의 문제를 압도하는 건 위험하다. 그러나, 민주사회는 무엇이 진실인가 하는 것보다는 사람들이 무엇을 믿으며 얼마나 큰 호응을 보내주느냐에 더 큰 관심을 갖는 경향이 있다.
부어스틴(Boorstin 1975, 28-29)이 잘 지적했듯이, 민주주의의 한가지 위험은 수사학이 인식론[**이성적 토론]을 대체하거나 압도하는 것이다."

페미니즘과 정체성 정치가 가져온 혼돈과 해악

발제문 19쪽에 보면 "반지성주의는 과학성, 이성성, 합리성을 근거로 다른 지성과의 대화와 타협을 거부한다, 근대 자유방임주의, 파시즘, 과학적 공산주의, 사회주의, 오늘날 신자유주의가 바로 그것들이다.
반지성주의는 현대 사회에서 민족우월주의, 국가주의(nationalism)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고 하였습니다.

저는 여기에 정체성 정치와 PC주의를 추가합니다. 정체성 정치는 다양성을 추구하지만 본질적으로 부족주의를 강화합니다. 사회의 통합보다 갈등이 증폭되어온 1세계들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또한 발제문 20쪽에는 반지성주의의 특성을 이렇게 나열합니다.

"이런 반지성주의는 사실을 왜곡하고, 통계를 조작하고, 사실에 대한 인과관계를 왜곡하려 든다. ‘페이크 뉴스(fake news)’와 근거 없는 정보들이 무수히 반복, 재생되면서 진리와 비진리의 경계를 불분명하게 만들기도 한다.
사실과 논리에 근거하기보다는 사회적 적대감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을 대중에게 선동한다. 페미니즘, 인종, 국적, 지역, 학벌, 혈연에 의한 적과 동지의 구분은 이성이 가진 합리성을 거부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위 문장에 '반지성주의' 대신 '페미니즘'을 넣어도 전혀 어긋남이 없습니다. 오늘날 영페미니스트들이 추앙하는 이념과 행동전략은 정확하게 위 문장과 들어맞습니다.

지성의 대처

반지성의 대표적 행위가 인지의 왜곡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영페미니스트들은 문화적 표현물에 대한 여성주의적 검열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소설 속에서 어떤 구절을 읽는 순간 기분이 불쾌해져서, 그러한 불쾌함을 유발한 작가와 동일한 계통의 작가들을 다 같이 악독한 저의를 품었다며 싸잡아 일반화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는 지성의 대처를 주문합니다. 지성의 대처란 인지왜곡에 대해 연거푸 질문을 던져 문맥 속에서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증거를 찾게 하는 한편, 해당 구절을 다른 식으로 해석할 수 없겠는지 고민해보게 합니다.

자신의 주장을 신뢰성 있는 증거와 적절히 연결시키기 위해 애썼는가를 확인하고, 입증과 논증의 규범을 공유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반면 반지성의 대처는 감정적 추론, 과도한 일반화, 이분법적 사고, 단순무지한 딱지붙이기에 매진합니다. 우리 모두 빠지기 쉬운 함정이기도 합니다. 영페미니스트들의 주장과 운동에 대해 우리는 지성적 대처를 보여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페미니즘과 이로 인한 사회적 갈등에 대해 지성적 대처는 보이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오늘 이 자리와 같은 공론의 장이 필요합니다.

발제문 18쪽에 지성인의 임무가 나옵니다.

"많은 경우 우리가 문제를 인식하는 방식 자체가 문제의 일부분이 되곤 한다. 문제를 잘못된 방식으로 인식할 수도 있다. 진정한 지성인은 문제 자체를 규정할 수 있어야 한다.
지성인의 임무는 해결책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도록 하는 데 있다"

페미니즘과 그 운동에 대해 지금 우리사회는 잘못된 방식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막연하게 약자를 위한 운동이나 성평등을 위한 운동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그러한 개념은 제도적, 문화적 차별이 존재했던 시절에는 지지받을 수 있었으나 지금의 현실과는 맞지 않기에 시대착오적입니다.

그래서 대중과 페미니즘은 계속 불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의 반페미니즘 현상은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처럼 정의로운 운동에 대한 무지한 대중의 백래시가 아니라, 반지성적 행태에 대한 대중들의 반감과 분노입니다.

이를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 오늘과 같은 자리가 소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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