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남혐은 없다’는 홍성수, 이나영, 정희진, 진중권 등에 대한 반론(4): 논리적 탄핵시리즈①

이선옥 승인 2021.11.30 18:07 의견 0

읽기에 앞서: 페미 진영이 주장하는 남혐불성립론의 근거를 그들의 단선적인 주장에서 끄집어내 본다면 ‘별도의 해악론’으로 요약할 수 있다. 

즉 혐오표현을 비난하고 제재하는 이유는 표현 행위 그 자체를 막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표현 행위에 의해 인과적으로 초래되는 별도의 해악을 막기 위한 것인데, 남성에 대한 적대적인 표현으로 인해서는 별도의 해악이 발생할 가능성이 없으므로 비난이나 제재를 받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여기에서 해악이라는 개념은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시 적용의 양태가 달라지게 된다.

남성에게는 애초 해악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견해와 / 해악 자체는 남성에게도 발생할 수는 있지만 남성에 대한 혐오표현이 그 해악을 초래할 가능성은 없으므로, 즉 혐오표현과 해악 사이의 인과관계가 성립할 가능성이 없으므로 비난과 제재의 대상이 아니라는 주장으로 나뉠 수 있다.

이번 글에서는 혐오표현이 ‘성별’에 따라 다르게 비난받거나 제재당해야 한다는 주장이 동원할 수 있는 가설들을 하나하나 제시한 후, 이러한 주장이 왜 성립할 수 없는가에 대한 논증을 통해 남혐불성립론을 탄핵해 보도록 하겠다.

글은 세 편으로 나누어 게시한다. 

  앞의 글에서 확인했듯 다른 국가들과 국제기구 등에서는 모두 여성혐오만이 성립 가능하다는 주장을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남혐불성립론을 주장하는 한국의 페미 진영은 국제기구와 다른 국가들의 성중립적인 혐오개념이야말로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이라고 솔직하게 인정한 후, 성별 한정적인 혐오 개념이야말로 옳은 것이다라는 주장에 대한 실질적인 논증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어디에서도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자신들의 주장을 서로의 서로에 대한 추대와 권위 부여를 통해 허공에서 지적 권위를 만들어낸다.

그런 후 담론장을 장악한 권력을 이용해 자신들이 만든 권위를 근거로 남혐불성립론이라는 성별 한정적인 혐오 개념이 이미 정당하게 확립된 듯이 밀어붙인다.

선언적인 방식의 선동과 굳이 설명이 필요없다는 식으로 쓰윽 지나가듯 언급하면서 마치 실질적인 논증이 이루어진 것처럼 위장한다. 그렇다면 -비록 제대로 제시된 적은 없지만- 성별을 이유로 한 혐오표현에 대해 사회적 비난과 제재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남성이 그 대상일 때에는 아예 적용되지 않는다는 주장이 타당하게 성립할 수도 있는 것일까? 그 가능성을 확인해보기 위해 먼저 ’남혐불성립론‘이 왜 성립될 수 없는지, 그 주장자들이 동원할 수 있는 가설들을 하나하나 제시한 후 이를 탄핵해 보도록 한다.   페미진영의 흔한 주장: 남성혐오는 성립할 수 없다거나 여성혐오와 동일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물론 논리적 근거는 없다.
  진중권씨의 주장과 달리 백인에 대한 경멸적 표현 또한 인종에 대한 증오범죄에 해당한다.

 

남혐불성립 주장자들이 동원할 수 있는 가설의 예

  첫째, 혐오 제재의 근거가 별도의 해악 때문이라고 보는 가설이다. 이 가설에 따르면 혐오표현을 비난하고 제재하는 이유는 표현 행위 그 자체를 막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표현 행위에 의해 인과적으로 초래되는 별도의 해악을 막기 위한 것이다.

즉 A가 B에게 C에 대한 혐오표현을 하면, B는 그 표현에 따라 C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받아들이게 되어, C에게 해악을 끼치는 행위를 정당한 것으로 믿고 하게 된다는 논리다. 여기에서 여성혐오로 인한 ’별도의 해악‘은 두 가지 형태로 나뉘어 볼 수 있다.

⓵일부에서 주장하는 ‘남성지배 가부장제 하에서 일어나는 구조적 폭력과 차별로 인한 피해’라는 해악 규정이다. 이에 따르면 애초 해악이라는 개념 정의 단계부터 남성에게는 일어날 수 없다는 법칙이 전제되므로, 혐오표현으로 인해 남성에게는 별도의 해악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정해진다.

페미 진영은 늘상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에 대한 적대적인 표현은 어떠한 해악으로도 작동하지 않으므로, 그런 표현은 비난받거나 제재의 대상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논리를 편다. 이러한 주장이 논리로 성립할 수 없는 이유는, ‘왜 성별에 따라 범위를 한정하는 ‘혐오’ 개념을 택하는가?‘라는 물음에, 다시 ‘성별에 따라 범위를 한정하는 구조적인 폭력과 차별로 인한 피해로서의 해악’ 개념을 임의로 택한 답이기 때문이다.

이는 어떠한 논증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답을 한 것 같은 모양을 취한 것에 불과하다.

마치 ‘구조적인’ 등의 모호한 개념을 씀으로써 실질적인 논증을 제시한 것처럼 눈속임을 하려 드는 전략이다. 해악이란 어떤 행위가 비난 받거나 제재를 받아야 할 근거가 되는, 중요한 이익에 대한 저해를 말한다.

신체의 손상을 입는 것, 어떤 직무에 지원했지만 그 직무적합성과 무관한 이유로 기회조차 부여받지 못하는 것, 신체의 자유를 박탈당하는 것, 보유한 재산의 손괴 등을 해악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해악의 개념을 ‘페미니즘이라는 특정 이념에서 지목하는 구조적 성격(가부장제)에 따른 피해’라고 오도하는 자체가 논리와는 무관한 행위다. 만일 해악이 그러한 것이라면 가부장적 사회구조와 무관하게 우연히 폭행의 피해로 갈비뼈가 부러졌거나, 그저 노인을 노리는 보이스피싱 사기단에 걸려 재산을 잃는 것들은 해악에 속하지 않는 이상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해악이 정말 실질적인 것이어서 사회가 막아야 할 피해를 입히는 것이라면, 그 해악이 누가 누구에게 발생시키건 그러한 행위는 비난받고 제재를 받아야 한다.

이런 식으로 빠져나가는 길은 열려 있지 않다.   ⓶ 그렇다면 이번에는 가부장제 하의 구조적 차별 등과 같은 모호한 개념이 아니라 실질적인 어느 것을 가리키는 해악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러한 해악에는 차별이나 폭력으로 인한 피해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특정 성별에는 작동하지 않는다는 가설이 입증되지 않는다.

차별이나 폭력으로 인한 피해는 성별을 불문하고 발생할 수 있으며, 우리 사회의 법규범도 성별을 불문하고 차별과 폭력을 금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근로기준법 제6조의 예를 들어보자.

“사용자는 근로자에 대하여 남녀의 성(性)을 이유로 차별적 대우를 하지 못하고, 국적ㆍ신앙 또는 사회적 신분을 이유로 근로조건에 대한 차별적 처우를 하지 못한다.”고 규정하지, ‘사용자는 여성을 남성에 비해 불리하게 차별적 대우를 하지 못하고 …’라 규정되지 않는다. 만일 이런 규정이라면 사용자가 경영상 해고되어야 할 근로자를 선정할 때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우선적 해고대상자로 선정하여도 법규범 상 문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는 명백히 금지된다.

이것이 금지되는 이유는 법규범이 이러한 행위를 사회적으로 막아야 할 해악이라고 상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혐오를 비난하고 제재하는 근거로 별도의 해악론을 주장하는 가설, 즉 남성에게는 별도의 해악이 성립할 수 없기 때문에 비난하고 제재할 만한 혐오가 성립할 수 없다는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다.

만일 그러한 논리가 가능하다면 남성은 차별과 폭력으로 인한 피해에서 예외로 두는 법규범이 제정되지 못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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