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에 앞서: 이 글은 혐오나 혐오표현 개념 자체를 다루는 글이 아니라, 혐오나 혐오표현이 오로지 한 성별에 대해서만 할 수 있는 태도나 행위이고 다른 성별에 대해서는 성립조차 하지 않는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이다.
혐오와 혐오표현 개념 자체에 대한 문제는 별도로 다루기로 한다.
페미 진영의 '지적 권위 돌려막기'와 '상호보증'이 주장의 진실됨과 무관한 이유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글을 인용해 특정한 통계를 발표하고, 다른 사람은 또 그 글을 인용하고, 다시 그 사람의 글을 또 다른 사람이 인용하면서 인용의 연쇄가 일어났다고 해보자.
이 연쇄 과정에서 입증된 것은 해당 통계가 다수에게 인용되었다는 사실이지 해당 통계의 참・거짓 여부가 아니다.
통계의 정확성과 정당성은 그 통계가 참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이 인용의 연쇄를 이어가는가에 달려 있지 않다.
통계는 인용의 빈도와 관계없이 공신력 있는 분석기관이나 분석자에 의해 연구되었는지, 오염과 왜곡 없는 정확한 자료의 수집을 거쳤는지, 타당한 것으로 확립된 통계적 방법론에 의해 산출되었는지만이 참・거짓과 관련된다.
만일 통계의 원자료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누구에 의해서 수집되었는지 알지 못하고 그저 서로 인용만 한다면 설사 인용 대상이 된 글이 유수의 학술지나, 국가기관의 보고서나, 영향력이 큰 대중매체에 실렸을지라도 그 결론을 시민들이 받아들일 이유는 없다.
페미니스트 학자 윤지선씨의 '관음충'논문 인용횟수는 매우 많다. 그러나 이 논문은 인용누락, 연구윤리 위반 등의 문제를 지적받아 결국 등재가 철회되었다.
학회의 권위나 이용자 수가 높다고 해서 논문의 주장이 곧 참인 것은 아니다. 통계와 같은 ‘사실의 진술’은 근거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와 그 자료를 분석한 방법을 제시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국제사회가 혐오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고 규제하는가도 ‘사실’에 관한 진술이다. 국제기구의 문서나 다른 나라의 법규정과 수사기관의 통계를 들여다보면 거짓이라는 게 확인될 내용을 그저 서로 인용하면서 되풀이한다고 해서 참이 되지는 않는다.
이러한 원리로 특정 정체성에 속한 사람이 하는 행위는 비난받고 부정적으로 평가받으며 제재를 당해야 하지만, 같은 행위를 다른 정체성에 속한 사람이 하는 것은 비난도, 부정도, 제재도 받지 않아야 한다는 규범적 진술은, 그러한 결론을 내리게 한 성공적인 규범적 논증을 제시함으로써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런 논증이 성공하지 못한다면 지적 권위의 외관을 두른 사람들이 상호 보증행위를 통해 아무리 권위 돌려막기를 한다 해도 잘못된 통계를 거듭 서로 인용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정체성에 따라 처벌을 달리하지 않는 우리의 법체계
남성에 대해서는 혐오표현이 적용될 수 없다는 주장은 혐오표현을 처벌하는 혐오범죄와도 당연히 연관된다.
가령 혐오표현이 애초 남성을 대상으로는 성립할 수 없다면 혐오범죄에 대해서도 남성에 대한 행위는 처벌하지 않는다는 명시적 조항이 있어야 할 것이다.
앞선 글 1)편에 등장하는 페미 진영의 학자, 기자, 논객 누구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혐오표현과 혐오범죄가 남성에 대해서는 적용될 수 없다는 견해는 대단히 이례적인 주장이기 때문에 특히 엄밀한 규범적 논증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어떠한 행위의 개념에 대해 당하는 사람의 성별에 따라 도덕적 비난과 제도적 제재가 성립 / 불성립으로 완전히 달라지는 경우는 혐오 외에는 찾아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살해나 폭행, 감금 같은 행위는 남성이 여성에 대해 저지르는 것은 물론, 여성이 남성에 대해 저지르는 것 또한 부정적으로 평가되고 비난 받으며 법적 제재를 당한다.
한국사회의 법체계는 남성이 여성에 비해 신체능력이 우위에 있다거나 여성이 남성보다 평균적으로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다거나 하는 점을 들어 범죄의 구성요건 자체에 성별을 달리 적용하는 내용을 포함시키지 않으며 그와 같은 발상 자체가 불가능하다.
▶폭행: 형법 제260조 제3항은 ‘사람의 신체에 대하여 폭행을 가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 500만원 이하의 벌금, 구류 또는 과료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지, ‘여성에 대하여 폭행을 가한 남성’은 2년 이하의 징역, 500만원 이하의 벌금, 구류 또는 과료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지 않다.
▶절도/강도/횡령/사기: 절도죄나 강도죄, 횡령죄, 사기죄도 ‘평균적으로 소득 수준이나 부의 수준이 여성에 비해 높은 남성이 여성에게 범하는 행위로 한정되지 않는다.
▶추행: 성적 자기결정이 관련된 범죄도 마찬가지다. 형법 제298조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에 대하여 추행을 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지 ‘폭행 또는 협박으로 여성에 대하여 추행을 한 남성은 …’이라고 규정되어 있지 않다.
▶명예훼손: 신체에 대한 유형력의 행사가 아니라 말로써 범할 수 있는 행위도 마찬가지이다. 형법 제307조 제2항은 ‘공연히 허위의 사실을 적시하여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10년 이하의 자격정지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되어 있지, ‘남성이 여성에 대하여 공연히 허위의 사실을 적시하여 …’라는 식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다.
▶모욕: 형법 제311조는 ‘공연히 사람을 모욕한 자는 1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2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되어 있지 ‘공연히 여성을 모욕한 남성은 1년 이하의 징역 …’이라는 식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법칙은 법률로 제재받는 범죄행위 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비난을 받는 행위에도 똑같이 성립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약속을 하고는 특별한 사유 없이 어겼다면, 약속한 사람이 누구든 그의 약속을 믿은 사람이 누구든 관계 없이 도덕적으로 비난 받는다.
거짓말을 해도 마찬가지이다. 즉, 제도적으로 제재를 받는 행위이든 단지 도덕적인 비난에 그치는 행위이든 간에 그런 행위를 저지를 수 있는 사람 또는 그런 행위를 당할 수 있는 사람의 성별이나 사회적 지위에 따라 그 행위가 범법 행위, 잘못인 행위, 부당한 행위인가 아닌가 여부 자체가 달라지는 경우는 없다.
그러므로 ‘성별’이라는 요인이 어떠한 행위(혐오표현) 개념 자체에서 부정적 평가를 완전히 성립 / 불성립으로 곧바로 도출되게 한다는 주장을 펴는 사람은, 그 행위에 대해서만 특별히 그렇게 별나고 독특한 개념을 쓰는 이유를 엄밀하게 제시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논증이 제시된 적은 한 번도 없다.
'여성혐오'의 부상과 함께 시작된 혼란
2015년부터 넷(net)페미니스트들은 여성혐오라는 개념을 부각하기 시작했다. 미러링을 통해 여성혐오를 돌려주겠다는 메갈리아가 등장했고 페미니즘 운동은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급속하게 확산됐다.
페미 진영은 이 현상을 페미니즘 리부트라 명했다. 주로는 온라인 공간에서 이들이 주력한 운동은 여성혐오 타파다. 한국사회가 성차별한 사회라는 근거로 일상에 만연한 여성혐오를 내세웠고, ‘여성혐오가 만연한 사회’라는 문장은 하나의 숙어가 됐다.
그러한 주장은 거의 모든 미디어에 검증 없이 실렸으며 해를 거듭하면서 ‘남성혐오는 존재할 수 없다’로 진화했다. 한국사회가 경험하고 있는 독특한 현상이다.
물론 국제사회의 개념 정의나 규제 양상이 절대적으로 옳을 수는 없다. 통일된 정의가 없는 현실이 말해주듯 각 사회마다 다른 상황이 존재하며 필자 또한 혐오표현에 대한 국제사회의 대응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한국의 페미 진영이 남혐은 존재할 수 없다는 주장을 공적 규범으로 고착시키려 한다면 한국사회에서만은 이렇게 정해야 한다는 근거가 제시되어야 한다.
2016년의 진중권씨는 자신을 조롱하며 공격하는 페미니스트들과 논쟁을 벌였다. 그런 그에게 논객이자 페미니스트인 한 남성은 이렇게 말했다.
“세상이 통째로 여성에게 불공평한테 '정치적 올바름'의 영역에서라면(이름부터가 '정치적 올바름'인데), 남자들이 좀 불공평해야 하지 않나요?”
진중권씨는 그의 반박을 다음과 같이 재반박했다.
"소추, 실X지, 헤테로, K저씨, 자들자들 운운하면서 성희롱 하는 게 '좀' 불공평한 건가요? 남자가 여자 성희롱하면서 히히덕거리면 안 되나, 여자는 남자 성희롱 하면서 히히덕 거려도 된다? 그건 무슨 논리예요?“
남성 페미니스트는 진중권씨의 무지를 탓하며 “내가 이런 걸 가르쳐야 하느냐”며 면박을 주고, 진중권씨는 그건 무슨 논리냐며 맞섰다.
그러나 2021년의 진중권씨는 2016년의 자신과 똑같은 질문을 던지는 남성들을 향해 이렇게 일갈한다.
“소추한남이 소추한남한테 쓰는데 뭐가 혐오야? 혐오란 그저 '증오'라는 표현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에게 사용하는 경우를 가리킨단다. 이런 것까지 내가 갈차줘야 하니?”
2016년, 남혐은 성립할 수 없다는 주장에 반대했던 진중권씨의 견해들, 2021년, 달라진 진중권씨의 견해
이러한 변화가 비단 그에게만 일어난 건 아니다. 사태의 초반에는 여성혐오 개념에 대해 깊게 동조하지 않았던 사람들 가운데에는 수년 사이에 태도가 바뀐 경우를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지난 글에서 언급했듯 특히 언론인들이 진중한 사유의 과정 없이 개념 받아쓰기를 통해 공론장의 왜곡을 주도한다. 수년 사이에 그들이 어떠한 논증을 접하고 설득되어 생각이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페미 진영이 주장하는 남혐불성립론의 근거를 그들의 단선적인 주장에서 끄집어내 본다면 ‘별도의 해악론’으로 요약할 수 있다.
즉, 혐오표현을 비난하고 제재하는 이유는 표현 행위 그 자체를 막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표현 행위에 의해 인과적으로 초래되는 별도의 해악을 막기 위한 것인데, 남성에 대한 적대적인 표현으로 인해서는 별도의 해악이 발생할 가능성이 없으므로 비난이나 제재를 받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여기에서 해악이라는 개념은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시 적용의 양태가 달라지게 된다.
남성에게는 애초 해악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견해와 / 해악 자체는 남성에게도 발생할 수는 있지만 남성에 대한 혐오표현이 그 해악을 초래할 가능성은 없으므로, 즉 혐오표현과 해악 사이의 인과관계가 성립할 가능성이 없으므로 비난과 제재의 대상이 아니라는 주장으로 나뉠 수 있다.
다음 편에서는 혐오표현이 ‘성별’에 따라 다르게 비난받거나 제재당해야 한다는 주장이 동원할 수 있는 가설들을 하나하나 제시한 후, 이러한 주장이 왜 성립할 수 없는가에 대한 논증을 통해 남혐불성립론을 탄핵해 보도록 하겠다.(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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