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와 책임

이나영 교수와 은하선 작가의 사례

페미니스트와 책임을 연결지어 쓴 이유는 페미니즘 운동의 확산과 더불어 ‘페미니스트라서 배제됐다’, ‘페미니스트라서 당했다’는 류의 피해 호소가 자주 등장하고, 매체들은 페미니스트가 박해받고 있다는 프레임만을 확산시키는 현상이 지속되기 때문이다.

사회적 관계를 맺는 데에는 협동하여 과업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책임을 가진 사람인가에 대한 판단이 필수적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은 도외시한 채 말이다.

당신과 불화하는 모든 사람이 여성혐오자가 아니며 차별주의자가 아니다.

만일 당신이 누군가와 불화하고 있다면, 일터에서 갈등 상황에 놓여있다면, 어떤 일에서 배제됐다고 느낀다면 그건 꼭 당신이 페미니스트라는 유일한 이유 때문은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2년 전, 민주당의 최재성 의원실에서 개최하려던 젠더갈등 전면해부 토론회가 무산됐다. 페미니스트 가운데 섭외대상이었던 이나영 교수(현 정의기억연대 이사장)가 의원실에서 섭외 요청을 위해 보낸 비공개 기획안을 자신의 SNS에 공개하며 비난했고, 집단행동 불사 등 격한 반응을 보이며 동료 페미니스트들까지 동조에 나서자 결국 취소되었다.

이나영 교수가 페이스북에 쓴 토론회 비난의 글

 

당시 행사 취소과정에서 필자가 가졌던 문제의식은 페미니스트들의 행위에서 발견되는 일정한 전형성이었다. 바로 페미니스트와 책임이라는 문제다.

타인이나 사회에 대해 어떠한 요구를 하는 집단은 언제나 존재한다. 운동집단은 그 대표적인 예다. 이들이 자주 듣는 비판은 ‘반대를 위한 반대세력’이나, ‘대안 없이 비판만 하는 세력”이라는 말이다. 문제를 제기한다고 해서 꼭 대안까지 제시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무책임한 집단이라는 비난은 대중적 지지와 신뢰가 곧 힘인 운동세력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

이익집단들도 요구를 하지만 이들은 목적이 뚜렷하므로 요구사항을 달성하면 행동이 끝나지만 이념집단은 신념의 관철이 목적이므로 마지노선이 없고 요구사항도 불가능한 일일 경우가 많다.

이념에 갓 입문했거나, 이념에 지나치게 경도된 사람에게 흔히 발견할 수 있는 태도가 책임감의 결여다. 이들은 내 주장만이 옳고, 옳은 신념에 복무하는 ‘내’가 중요한 나머지 자신의 행동이 몰고 올 파장과 책임을 고려하지 못하는 경솔함에 빠진다.

어떠한 일에든 여러 이해관계가 걸려있고, 나와 상대방 외에 악의를 가지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연관되어 있다는 세상사의 당연한 진리를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내 존재와 행위가 곧 정의라는 착각에 빠져 나의 불쾌함이나 불이익을 곧 상대방의 악한 의도로 연결짓는 것도 특징이다. 이들의 신념체계는 선악의 구도로 이루어져 자신의 정의로운 행동에 방해가 되는 타인의 행위는 곧 불의라 규정하고 그와 불화하는 자신의 모든 행동을 거룩하게 정당화한다.

위 이나영 교수의 예를 들어보자.

이 교수는 최재성 의원실에서 보낸 기획안을 보고 화가 났다. 젠더갈등이라는 규정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본인의 견해와 반대될 뿐 아니라, 오세라비나 이선옥이라는 토론자를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세라비와 이선옥은 이나영의 신념체계 안에서 5.18 망언자와 같은 수준의 사람이다. 이들을 민주당이라는 정당에서 토론자로 부르는 것은 그 자체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인 것이다. 그럴 수 있다. 문제는 자신의 견해를 관철시키기 위해 취한 행동이 누군가에게 엉뚱한 피해를 입힐 수도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해당 기획안은 감춰야 하는 문서는 아니지만 확정이 되지 않았으므로 외부로 공개되서는 안 되는 단계였다. 내게도 섭외가 왔고 담당자들과 이런저런 의논을 하면서 비공개로 조율을 하던 중이었다. 이나영 교수의 폭로가 일어나자 담당진은 곤란한 상황에 빠졌다. 갑자기 터진 예상치 못한 폭로에 섭외중이던 다른 토론자들에게는 사과와 함께 해명을 해야 했고, 항의 전화를 처리해야 하고, 행사를 치를지 말지에 대한 결정까지 해야하는 비상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나영 교수는 토론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먼저 의원실에 합당한 이유를 들어 설득하고 자신의 견해를 관철시키려는 노력을 할 수 있었다. 공식적인 항의라면서 개인의 SNS에 비공개 문서를 공개하며 외부를 향해 터트리고 보는 태도는 책임지고 사고를 수습해야 하는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없는 행동이다.

다른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페미니스트 은하선 작가는 EBS의 프로그램 <까칠남녀>에 고정 출연진으로 활동하던 중 퀴어축제 후원 번호를 까칠남녀 담당PD의 전화번호라 속여 퀴어축제 반대자들에게 공표했다. 동성애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실제 까칠남녀 PD에게 항의전화를 하려다 자동출금되는 후원번호에 속아 기십만원을 입금하는 일이 벌어졌고, 그녀는 이 행위로 고소되어 사기죄로 벌금형을 받았다.

 

은하선 작가의 게시물. 이 글들로 인해 유죄판단을 받았다.

 

동성애 반대세력이 까칠남녀를 폐지하라고 시위를 벌이던 중 벌어진 이 일로 결국 은하선씨는 하차를 통보받고 프로그램은 조기종영됐다. 은씨는 제작진이 성소수자 혐오세력에게 굴복해 자신을 하차시켰다며 비난했고, 페미니즘 진영과 진보매체들도 즉각 세를 규합해 은하선 하차를 취소하라며 시위를 벌였다.
그들은 이 사태를 혐오세력 대 반혐오세력의 갈등으로 규정하고 EBS가 혐오세력에게 굴복했다며 비판했다.

<까칠남녀>를 시청한 사람들은 알겠지만 제작진은 페미니즘에 우호적이었으며 오히려 여성편향이라 비판받을 정도로 페미니스트의 주장에 힘을 실어줬던 프로그램이다. 이런 프로그램이 논란끝에 조기종영 되었고, 그 과정에 자신의 문제적 행동이 영향을 끼쳤다면 보통 사람은 먼저 책임을 느끼고 사과를 한다. 그 후 누구에게도 피해가 가지 않도록 사태를 수습하려는 노력에 들어간다.

이러한 책임의 태도가 페미니스트에게는 결여되어 있다. 자신은 혐오세력에게 당한 피해자일 뿐이므로 책임질 일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프로그램 제작진을 연루시켜 사기죄로 고소당해 물의를 일으킨 출연자는 보통 자진하차를 선택한다. 다른 출연진에게 누를 끼친 데에 대한 사과가 일반적인 해결순서다. 은하선씨가 저지른 잘못과 그로 인한 결과를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면, 사고를 일으킨 출연진에 대해 하차를 결정한 다른 프로그램과 견줘 더 가혹한 결정이라 보기도 어렵다.

은하선씨와 같은 행동은 페미니스트에 대한 제작진과 대중의 인식에도 영향을 끼친다. 경솔하면서 책임은 지지 않는 행동은 갈등의 현장에서 내게 우호적인 사람들이 나를 옹호할 명분마저 앗아갈 수 있다. 비윤리적 행동을 하고도 자신의 책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반대진영의 탓으로만 돌리며, 제작진만을 일방 비난한다면 다음에 페미니스트를 위한 프로그램은 기획되기 어려울 것이다. 누가 이런 리스크를 감수하면서 페미니스트를 출연시키려 하겠는가.

 

진보진영은 출연자 개인의 결격사유라는 하차이유를 인정하지 않고 혐오에 굴복했다며 EBS를 비난했다.

 

은하선씨를 지지하는 진영은 그녀를 순백의 피해자로 묘사하지만 성인으로서 은하선씨는 경솔한 행위에 대해 분명한 책임이 있다. 남을 비판하는 데에만 익숙한 운동세력은 자기책임성이라는 감각을 잊기 쉽다. 내가 일하는 곳에서 누군가 명의를 도용해 사기범죄에 연루됐고 사업에 영향을 끼쳤다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사안은 아니다. 그게 보통의 일터에서 사건사고를 대하는 상식의 틀이다.

신념과 신념의 충돌로만 사태를 해석하고, 직업 영역에서 작동하는 룰을 도외시한다면 운동세력은 인간의 삶과 동떨어진 이념의 나팔수로 취급될 수밖에 없다. 생활인의 감각을 잃어버리고 성인으로서 책임성을 거세한 운동가는 박해받는 순교자 되기로 자기 정당성에 빠진다.

하나 더 짚어본다면 자신의 신념에 대해 충성스러운 사람일수록 타인의 신념에 대한 충성심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은하선씨의 행동이 문제적인 것은 동성애를 반대하는 사람에게 동성애 운동을 후원하도록 유도했다는 점이다. 태극기 집회를 혐오하는 사람이 누군가의 말에 속아 자기도 모르게 태극기 집회를 후원하게 된 상황이라 가정해본다면 어떨까. 다른 사안보다 더 분노하지 않겠는가?

내가 정당한 신념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해도 타인이 신념으로 여기는 것을 기망당한 점에서 더한 분노를 일으킨다는 사실 자체는 이해하고 인정해야 한다.

 

자신의 행위에 대한 은하선씨의 해명

 

필자 또한 페미니즘에 비판적이라는 이유로 수년간 많은 사건사고를 경험했다. 무례한 언설, 글의 삭제, 예정된 강연 취소 등 피해상황은 다양하다. 불합리한 일을 겪을 때마다 밖으로 공표해 호소하지 않는 이유는 그러한 결정이 납득되었거나 억울함이 없어서가 아니다. 내가 그런 행동을 했을 때 벌어질 일에 대한 책임 때문이다. 나는 지르면 그뿐이지만 누군가는 그걸 수습해야 한다.

대부분 그런 일은 윗사람이 아니라 아랫사람들이 맡는다. 지르는 사람이 하나라면 그 똥을 치우기 위해 애써야 하는 사람은 하나 이상이다. 나는 마음껏 비난하고 피해자 입장에서 감정의 해소를 하면 끝이지만, 결정 권한은 없었으면서 내게 연락해서 사과의 말을 하고 당황스러운 가운데 수습해야 하는 비서진들, 보좌관들, 담당자들은 자신의 책임이 아닌 일에 감정노동과 부가노동을 해야 한다.

그런 사람들이 밟히기 때문에 참고 넘어가거나 그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방식으로 해결할 길을 찾는 것이다. 이게 노동문제를 다뤄왔던 사람으로서 나의 준칙이다.

상대의 행동을 악의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무례한 행동에도 예의를 지키며, 보통 사람의 상식적인 틀 안에서 행동하는 예측가능한 사람이라는 신호를 주는 것이 어떤 식으로든 타인과 엮여 일해야 하는 생활인으로서 기본적인 태도다.

페미니스트와 책임을 연결지어 쓴 이유는 페미니즘 운동의 확산과 더불어 ‘페미니스트라서 배제됐다’, ‘페미니스트라서 당했다’는 류의 피해 호소가 자주 등장하고, 매체들은 페미니스트가 박해받고 있다는 프레임만을 확산시키는 현상이 지속되기 때문이다. 사회적 관계를 맺는 데에는 협동하여 과업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책임을 가진 사람인가에 대한 판단이 필수적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은 도외시한 채 말이다.

당신과 불화하는 모든 사람이 여성혐오자가 아니며 차별주의자가 아니다. 만일 당신이 누군가와 불화하고 있다면, 일터에서 갈등 상황에 놓여있다면, 어떤 일에서 배제됐다고 느낀다면 그건 꼭 당신이 페미니스트라는 유일한 이유 때문은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사회화가 덜 된 떼쓰는 어린아이와 성숙한 어른이 다른 점은 자신의 권리와 더불어 책임 또한 알고 행하는 것이다.

권리의식은 비대한 데 반해 책임의식은 빈약한, 이념에 경도된 사람들이 놓치기 쉬운 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