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주의 운동의 해악: PC주의자의 법정에서 이준석이 혐오주의자가 되지 않는 길이란 없다(2)

이선옥 승인 2022.05.25 19:25 | 최종 수정 2024.04.17 01:13 의견 0

이준석 대표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박경석 대표가 토론을 벌인 뒤 홍성수 교수는 이렇게 평가했다.

"이준석, 혐오표현 개념 정확히 알아...문제는 회피 방법도 안다는 것"

한국일보는 홍교수가 소셜미디어에 쓴 글을 그대로 기사에 담았는데, 그가 쓴 글을 보면 이준석 대표 뿐 아니라 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혐오주의자로 만들 수 있는 PC주의 법정논리가 그대로 드러난다.

그들은 이준석이 "나는 박경석이 싫어"라고 하면 혐오발언이 아니지만,

"나는 박경석이 장애인이기 때문에 싫어"라고 하면 장애인에 대한 혐오라고 한다. 홍성수 교수는 이준석 대표가 "저는 전장연이 장애인단체여서 그 시위에 대해 지적한 게 아니에요. 저는 북파 공작원 하시던 분들이 와서 지하철을 점거하고 운행을 중지하는 방식으로 본인의 뜻을 관철하려고 했다면 (똑같이 지적했을 거예요)"

라고 한 말에 깜짝 놀랐다고 한다. 정치인들 중에 혐오표현의 개념을 이렇게 정확히 알고 있는 경우는 흔치 않다는 이유에서다.

그런데 그 다음에 이어지는 홍성수 교수의 말이 오히려 우리를 놀라게 한다. 그는 이준석 대표를 향해 단호하게 말한다.

"이준석은 혐오표현의 개념을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혐오표현 혐의를 회피하는 방법도 정확히 알고 있어서 더 문제다. 아무리 이준석이 혐오표현 규제를 회피하는 전략을 정확히 알고 있어도 이는 아주 뻔한 수법일 뿐이며, 그런다고 혐오선동의 혐의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즉, 너는 아무리 혐오표현을 안해도 혐오를 선동하는 혐오주의자라는 말이다. 매우 교묘하고 악의적인 혐오규정이다.

혐오를 회피하도록 하기 위해 혐오표현을 하지 말라는 것인데, 혐오를 안 하려고 혐오표현을 회피하는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혐오주의자라는 단정을 내린다면, 이 혐의를 벗는 일은 어떻게 해야 가능한가?

여기에서 홍성수 교수가 즐겨 사용하는 언어 조작 방식이 드러난다. 그는 자신이 교조적인 PC주의자로 보이는 것을 무마하기 위해 늘상 교묘한 틈새를 남겨둔다.

예를 들어 남성혐오는 성립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과 달리 자신은 남성혐오는 성립되기 '어렵다'라고 한 차이를 강조하며 더 세심한 논증을 한 것처럼 보이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의 술수는 결국 성공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남성혐오가 성립하기 어렵다는 그의 주장 또한 아무런 논증이 없기 때문이다. 이번 사안에서도 마찬가지로 홍성수 교수는 이준석 대표의 발언에 대해 명확하게 '혐오표현'이라 규정하는 대신 '장애인에 대한 혐오'라고 말한다.

이준석 대표가 장애인에게 혐오발언을 하지는 않았지만 장애인에 대한 혐오는 분명 하고 있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그가 든 예시조차 이준석이 장애인을 혐오한다는 혐의를 둘 수는 없는 말이다.

그는 이준석이 "나는 박경석이 장애인이기 때문에 싫어"라고 한다면 이는 장애인에 대한 혐오라고 했지만 이 조차도 틀렸다. "나는 박경석이 장애인이기 때문에 싫어"는 박경석이라는 개인에 대한 주관적인 호/불호를 표현한 말일 뿐, 혐오표현도 아니고, 모든 장애인을 향한 혐오 또한 아니다.

이는 "나는 000가 대머리이기 때문에 싫어"라고 했다고 해서 모든 대머리를 혐오한다고 규정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나 홍성수는 혐오표현의 개념을 자의적으로 정의하여 타인에게 혐오주의자라는 낙인을 찍으려 한다. 홍성수 교수는 "싸잡아 가지고 어떤 특성 때문에 아무 이유 없이 누가 싫다고 하는 것이 혐오"라고 했다.

만일 PC주의자들이 혐오의 개념을 오염시키기 전이라면 일반적 의미에서의 혐오라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정의에 동의해 주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시민들이 혐오라 이해하는 행위는 쾌/불쾌의 문제이지만, PC주의자들이 혐오라고 규정하는 행위는 정의/불의의 영역으로 이전되기 때문이다.

즉, 홍성수 교수의 말은 이준석 대표가 동료시민에게 불쾌감을 일으키는 표현을 하고 있다는 '에티켓'에 대한 지적이 아니라, 이준석은 혐오주의자라는 '불의'의 낙인을 찍으려는 의도에서 주장하는 것이므로 이러한 개념규정에 동의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준석은 싸잡아서 박경석이 장애인이라 싫다고 한 바가 없고, 장애인에 대한 비난이나 증오의 감정을 드러낸 바도 없다. 전장연의 시위방식에 대해 비판을 했고, 이 논란이 이어져 상호간 토론까지 두 차례 벌였다.

책임 있는 지위에 있는 정치인이 가장 활발하게 투쟁하는 시민운동단체 대표와 첨예한 의제를 두고 공개적 토론을 하는 행위는 권장되어야 마땅하다. 그러한 경로가 반복될수록 사회적 의제에 대한 시민들의 이해와 관심은 높아질 것이고, 정치인은 말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하고, 운동가는 요구사항에 대한 시민들의 이해를 구하도록 하는 민주적 기풍이 자리잡힐 수 있다.

오히려 홍성수 교수와 같은 PC주의 감별사이자 심판관 노릇을 하는 이들이 이러한 민주적 경로를 방해한다.

PC주의자들의 논리를 보자.

이준석은 혐오표현의 개념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

그래서 이준석은 혐오표현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준석은 혐오표현을 하지 않으면서 혐오를 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아무튼 이준석은 혐오표현을 교묘하게 하지 않을 뿐이지 더 위험한 혐오선동가다.

홍성수와 같은 PC주의자들의 논리를 종합하면 이렇다.

"우리는 무엇이 혐오표현인지 규정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고, 혐오표현을 하지 않으면서도 혐오를 하는 혐오주의자들의 뻔한 수법을 가려보는 능력 또한 가지고 있다. 혐오주의자 감별은 오직 우리만이 정확하게 할 수 있고, 우리가 혐오주의자라고 규정한 사람은 아무리 혐오표현을 하지 않아도 혐오주의자 혐의를 벗어날 수는 없다."

참으로 무시무시한 법정이 아닌가.

혐오를 가장 많이 입에 올리는 혐오감별사들

혐오표현에서 중점이 되는 행위는 '혐오'가 아니라 '표현'이다. 인간의 내면에는 다종다양한 대상에 대한 혐오나 거부감의 정서가 있고, 특정 대상에게 증오의 감정을 가질 수도 있다.

이는 타인과 국가권력 누구도 침범하거나 처벌할 수 없는 고유한 영역이다. 내면에야 똥이 들었든, 쓰레기를 품었든 표현하지 않는 행위는 행위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나는 교묘하게 위장되어 드러나지 않고, 표현되지 않은 너의 혐오를 알고 있기 때문에 니가 아무리 혐오표현을 하지 않아도 너는 혐오주의자'라고 한다면, 누가 이 그물을 벗어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런 혐오표현을 하지 않아도 홍성수 교수와 같은 PC주의자들이 주도한 혐오감별의 법정에서 한 번 낙인을 부여받으면 혐오주의자가 되지 않을 방법 같은 것은 없다.

홍성수 교수는 이준석 대표를 가리켜 '건국 이래 혐오선동을 가장 능수능란하게 활용하는 정치인'이라고 비난했다. 홍성수 교수의 논리에 따르면 그 자신 또한 얼마든지 혐오선동가가 될 수 있다.

자신의 논리대로라면 홍성수 교수는 이준석을 향해 혐오발언을 하지는 않았지만, 혐오표현의 개념을 정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혐오표현 규제를 회피하는 전략을 정확히 알고 있어도 이는 아주 뻔한 수법일 뿐이며, 그런다고 이준석에 대한 혐오선동의 혐의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물론 이들에게는 강자인 이준석에 대한 혐오는 성립할 수 없으므로 자신들이 이준석을 향해 해대는 모든 증오의 표현들은 혐오표현이 아니라는 궤변의 무기가 있지만)

나는 홍교수와 같은 PC주의자들이야말로 건국 이래 가장 큰 힘을 가졌으나 그에 따른 책임감과 지적 논리는 갖추지 못한 혐오감별사들이라 생각한다. 이들이 -비록 자신들끼리 순환보증을 통해 만든 권위라 해도- 지적 권위를 가지고 제도의 설계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오늘의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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