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저씨가 데려다 준 이들 《3》

이선옥 승인 2018.05.24 09:18 의견 0

이선옥닷컴은 오픈 특집기획으로 <나의 아저씨> 리뷰大展을 마련했습니다.

잔잔한 감상기부터 연출기법을 통해 분석한 전문가적 비평, 나저씨 혹평 현상에 대한 사회문화적인 비평까지 흥미있는 글들이 가득합니다.

세 번 째 글은 잔잔한 나저씨 감상기입니다.

준비한 글 모두 재미있게 읽어주세요.

(편집자주)

전화기 너머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나야! 나 기억해? 나 수향이!” 수향(가명)은 어릴 때 친구다.

이름이 특이해서 바로 기억이  났다.(수향은 가명이지만 실제 그 아이의 이름도 특이하다) 또래에 비해 키가 크고 몸이 성숙했던 친구라 떠올린 모습만으로는 초등학교 때 친구인지 중학교 때 친구인지 헷갈렸다. “수향이? 그래 기억나! 수향아.

오랜만이다.

어떻게 내 연락처를 알았어?”
수십 년 만에 걸려온 뜻밖의 전화에 내 목소리도 같이 높아졌다. “지난번에 선영이랑 연락이 돼가지구 우연히 니 소식을 들었어.

연락 한 번 해보고 싶었는데 나를 기억하는구나.

이게 얼마만이냐!”
수향의 목소리는 그대로다.

살짝 낮은 톤이면서 경쾌하고 어른스러웠던 말투도.

여자애들이 이쁜 척 새침하게 그랬니 저랬니 할 때도 수향은 늘 그랬냐, 저랬냐 했다.

통화를 하면서 더듬이를 계속 움직였다.

얘가 내 언제 적 친구였더라... 수향은 지금 저 아래 쪽 어떤 섬에 살고 있다고 했다.

남편과 제법 큰 가게를 하는데 장사가 잘 되는 편이라 먹고 살 만 하단다.

중학생인 아들의 진학 때문에 계속 섬에 살아야 할지 고민인 거 빼면 그럭저럭 괜찮다고 했다.

우리는 서로 안부를 묻고 사는 얘기를 잠시 나눴다. 어떤 우여곡절을 겪은 후 섬에 안착했는지 모른다.

귀촌을 한 것도 아니고, 남편의 연고가 있는 곳도 아니라고 하니 생짜로 섬에 들어가 자리를 잡기까지 고생을 했을 터였다.

아마 몇 날을 얘기해도 모자랄 만큼 사연이 있을 거다. “어쩌다 그 섬에까지 갔어? 나는 섬에 간 사람들 얘기 들으면 이사를 어떻게 했는지가 궁금하더라.

그 짐들을 배에 싣고 가면 항구에 이삿짐 차를 불러서 싣고 가나? 돈도 많이 들었겠다.”
“뭐 어쩌다보니 여기까지 왔다 야.

하하하.

놀러와! 너 놀러오면 얼마든지 잘 대접할 수 있어.

그 정도는 되니깐 놀러와! 꼭.”
드라마 속 지안을 보는 내내 나는 수향을 생각했다 (드라마 포스터)
드라마 속 지안을 보는 내내 나는 수향을 생각했다.

다른 선택지가 없는 삶이란 것에 대해.
수향은 진학 대신 산업체학교에 간 친구다.

초등학교 마치고 산업체학교에 간 친구는 들어본 기억이 없으니, 아마 중학교 때 친구인 것 같다.

그 나이 때 나는 활자중독이었다.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인간시장을 읽고, 태백산맥을 읽고, 전집 장사한테 사들인 세로줄의 조선왕조실록도 읽었다. 명탐정 셜록, 괴도 루팡, 그리스로마신화, 야시시한 잡지의 귀퉁이 광고, 대학에 다니던 언니가 들고 온 운동권 노래책의 가사까지 모든 걸 빨아들였다.

어른들의 세계를 글로 배운 방구석의 애늙은이는 이제 세상에 대해 모르는 게 없다고 생각했다.

사는 게 우스웠다. 드라마 속 지안을 보는 내내 나는 수향을 생각했다.

다른 선택지가 없는 삶이란 것에 대해.

지안은 다른 삶을 상상할 수 없었다.

빚쟁이 아버지, 그 아버지가 물려주고 간 빚, 부양이 필요한 할머니.

폭력을 휘두르는 사채업자, 결국 그를 찔러 죽이고 살인자가 된, 겨우 중학생. 십대의 지안이 짊어진 삶의 무게다.

빚을 갚고, 유일한 가족인 할머니를 부양하기 위해 밤낮으로 일해야만 하는 지안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다.

주어진 오늘을 살아내는 게 다다. 열여섯 수향은 어떻게 살았을까? 열일곱, 열아홉의 수향은? 그녀에겐 엄마가 없었고 동생들이 있었다.

형편이 어렵다고 했다.

울타리가 되어주는 가족이 없었던 수향은 스스로 울타리가 되는 길을 택했다.

늘 밝았고, 짧은 머리에 씩씩한 남자 같았던 그 아이는 산업체를 가야 했던 때문인지 어느 날 울었던 것도 같다. 내가 권선징악에 코웃음을 칠 때, 애들을 때리며 전교조에 참여한 교사와, 전교조에 참여하지 않는 교사 모두를 비웃으며 세상을 냉소할 때, 수향은 다른 선택지가 없는 삶에서 지안처럼 오늘을 살았을 거다.

그 삶 안에서 다른 가능성을 찾으려 애썼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되도 않는 어른 흉내를 내면서 세상의 부조리에 실소나 날리던 때, 수향은 진짜 어른의 삶을 살았다. 세상에 대해 다 안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가난이 뭔지, 삶의 무게가 뭔지 몰랐다.

개인이 선택할 수 없는 것들 때문에 겪어야 하는 불행의 부조리함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

책상에 엎드려 울었던 어린 날의 수향을 바로 잊었듯,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를 지고 사는 이들에 대해 잊었다. 부모 그늘에서 활자로 세상을 익힌 조숙한 아이가 연민한 가난은, 내 곁의 친구 수향의 것이 아니라 활자 속 난쏘공의 난장이들이었다.   드라마에 몰입할수록 사람 하나가 예사롭지 않다.

(드라마 포스터)
<나의 아저씨>를 보는 내내 여러 사람들을 떠올렸다.

보통 드라마에 몰입하면 극중 인물들에 빠지는데 나저씨는 특이하게도 내 주변의 사람들을 자꾸 생각하게 했다.

지안을 보면서는 수향을, 상훈과 기훈을 보면서는 생활상의 이웃들을, 유라와 정희를 보면서는 사랑에 허우적대는 내 친구를, 후계동 사람들을 보면서는 내 오랜 친구들을 떠올렸다. 그 모든 인물들에 내 모습도 조금씩 골고루 들었다.

사람 하나가 예사롭지 않다.

드라마에 몰입할수록 현실에 밀착하게 되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나의 아저씨>를 둘러 싼 오해와 우려들은 거두어도 좋다고 말해주고 싶다. 아저씨를 사랑한 게 아니라 사랑한 사람이 아저씨였을 뿐이다.  (이성간의 사랑이어도 문제랄 건 없지만) 여기서 사랑은 위로와, 위안과, 위무의 다른 이름들이다.

제목이나 장면 하나, 극을 위한 설정 하나를 두고 경직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면 충분히 보이는 것들이다.

  내 집에 전구를 달아주러 온 아저씨, 도시가스 검침을 나온 아주머니, 다급하게 문을 두드리는 택배기사, 늦은 밤 리어카에 쓰레기를 주워 담는 젊은 환경미화원, 허름해 보이는 내 곁의 평범한 이웃들의 삶 속에 들었을지도 모르는 반전들. 저들도 그럴 수 있다.

찬란하게 데뷔했다 처참하게 몰락한 천재 영화감독이었을 수도, 남부럽지 않은 직장에 다니다 밀려난 초라한 중년일 수도, 가슴 속에 사랑 하나 품고 평생을 허우적대는 순정 덩어리일 수도 있을 거다.

어쩌면 살인자일 수도 있고. 아무렴 어떤가.

그들에 대해 무슨 얘기를 듣는대도 나는 모른 척 할 거고,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닌 일일 뿐.

모든 인간은 한 겹이 아니다.

인간이 여러 겹이라는 걸 이해하는 사람은 그것만으로 이미 누군가를 위로하는 존재가 된다.
이 드라마가 그걸 알려줬다.

<나의 아저씨>를 둘러 싼 오해와 우려들은 거두어도 좋다고 말해주고 싶다.

아저씨를 사랑한 게 아니라 사랑한 사람이 아저씨였을 뿐이다.

(이성간의 사랑이어도 문제랄 건 없지만) 여기서 사랑은 위로와, 위안과, 위무의 다른 이름들이다.

제목이나 장면 하나, 극을 위한 설정 하나를 두고 경직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면 충분히 보이는 것들이다.

나는 이 드라마야말로 경직된 시선으로 날선 논평을 쏟아내는 사람들이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드라마 속 지안처럼 내 친구 수향에게도 동훈 같은 아저씨가 있었을까? 어린 수향의 등에 얹힌 고단한 등짐을 나눠 짊어진 존재가 있었을까?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삶의 어디쯤에 아마 있었겠지.

어쩌면 지금의 남편이 그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아무도 없었다면 지금의 밝은 수향이 있지는 못했을 것 같다.

혼자 상상하고 혼자 안도한다. 올 여름 약속대로 그 섬에 놀러가 수향이랑 '너의 아저씨'에 대해 긴 수다를 떨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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