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 이선옥닷컴 신장개업 대박 축원문 [축] 《4》

부제(인 척 하지만 사실은 원제) : <나의 아저씨>와 작품을 둘러싼 주변에 대해

이선옥닷컴은 오픈 특집기획으로 <나의 아저씨> 리뷰大展을 마련했습니다. 잔잔한 감상기부터 연출기법을 통해 분석한 전문가적 비평, 나저씨 혹평 현상에 대한 사회문화적 비평까지 흥미있는 글들이 가득합니다. 네 번 째 글은 방영 전부터 일기 시작한 <나의 아저씨> 혹평 러시에 대한 홍대선 작가의 신랄한 비판입니다. 준비한 글 모두 재미있게 읽어주세요. (편집자주)

취객이 강물에 오줌을 눈다고 강이 오염되지는 않는다. 예술의 위대함은 성마른 담론, 아니 담론인 척 하는 저주로 훼손되지 않는다. 물리법칙과 같다. 미세먼지가 하늘을 뒤덮어도 중력은 아무렇지 않게 작동한다. 한국식 TV 드라마의 형식을 입은 대중예술 <나의 아저씨>는 숱한 저주를 받았다. 동시에 혐오의 배설물 따위에 더럽혀지지 않는 수량과 유속을 지녔다.

제목 그대로 남자주인공 박동훈은 여자주인공 이지안에게 <나의 아저씨>다. 일군의 진보 진영과 여성계(?)는 ‘나의 아저씨가’ 감히 중년 ‘한남충’인 주제에 멋지고 관대하고 어린 여자의 짝사랑도 받아주시는 양복쟁이일까봐 분노를 쏟아냈다.

논란의 곡 <제제>를 부르며 꼬리치는 아이유와 저음의 목소리로 맨스플레인을 시전하는 이선균의 조합이 어떤 이들에게는 본능적인 거부감을 일으켰나보다. 이해한다. 하지만 내키지 않으면 작품을 소비하지 않으면 된다. 보지도 않고 아는 척 저주하면 이렇게 된다.

어떻게 되는 거냐고? 트위터를 비롯한 SNS를 무대로 활동하는 페미니즘 진영의 네티즌, 그리고 이들과 영향을 주고받는 여성주의 필자들은 드라마가 고작 2회 방영되고 나서 저주를 퍼부었다. 내용인즉슨 한국 중년 남성이 고통을 호소한들 그들의 입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대표적인 기사가 한겨레에 게재된 황진미의 <‘나의 아저씨’, 기득권 아재들의 피해자 코스프레>다.

나의 아저씨에 대한 보도들. <나의 아저씨>는 방영 전부터 여러 논란과 비판에 직면했다.

 

애초에 <나의 아저씨>에 대한 저주는 아이유라는 아티스트가 가진, 청순함과 불온함을 동시에 지닌 어린 여성의 이미지를 감히 한국 중년 남자가 성적으로 소비할 수 있느냐는 ‘자격론’에서 기인했다. 이건 이것대로 인종주의라는 점에서 틀려먹었지만, 다음 과정에 비할 바는 아니다.

일군의 진보 진영과 여성계(?)는 ‘나의 아저씨가’ 감히 중년 한남충인 주제에 멋지고 관대하고 어린 여자의 짝사랑도 받아주시는 양복쟁이일까봐 분노를 쏟아냈다.

싫다는 감정은 생겼는데 감정의 근거는 실체가 아님이 밝혀졌다. 그럼 이때 두 가지 길이 있다. 혐오를 멈추고 궁금하면 드라마를 볼 일이요, 아니면 다른 걸 하면 된다. 다른 길은 몹시 나쁘다. 혐오의 감정을 유지시켜줄 또 다른 근거를 하이에나처럼 찾아내는 것이다.

인종주의로 시작된 감정에 의미부여를 하려면 인종주의를 관철시켜야 한다. 생식기관을 겉껍질에 달고 태어난 덕에 편리하게 여성을 제치고 기득권이 된 한남이 이제는 피해자 코스프레까지 한다는 식이다. 아아 역시 한남은 노답이었다.

그런데 품 속의 한남들은 제 생각에 피해자라서 세상에 대고 억울함을 외치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를 ‘실패자’로 규정한다. 그들이 직접 말하는 실패담은 피해 주장이 아니라 자조다. 그들이 버리지 못하고 끌어안은 남성성은 퇴락한 자신을 괴롭힐 뿐이다.

여성주의자들 일부는 비겁하게도 드라마의 높은 작품성이 확인되자 방향을 틀어 도청 설정과 폭행 장면이 주는 불편함을 이야기하는 식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들은 취소와 만류라는 걸 모르는 것처럼 행동한다. 폭력은 나빠요. 아휴 당연하지요.

세상에, 나는 주인공 소년이 해적에 납치당하는 설정의 소설을 출간했었다. 이러면 안 된다. 주인공 녀석도 문제다. 이놈은 자기를 키워준 해적단 두목을 살해한 후에 조국인 고려를 침공한다. 인신매매범과 매국노, 사적 구제가 판치는 이 책은 <나의 아저씨>와 달리 흥행에 실패했다. 적어도 내 책에 관해서만큼은 정의가 구현되었으니 다행한 일이다.

시청자들의 비판과 혹평이 공존한 <나의 아저씨> YouTube by 은도니 화면캡처
비판과 혹평이 공존한 <나의 아저씨> YouTube  by알려줌 팬질 (ALZ Fanzeel) 화면캡처

<나의 아저씨>에게는 저주를 위한 저주만 남았다. 중언부언임을 알지만 과정을 한 번 살펴볼까. 자, 처음에는 로맨스인줄 알고 저주했다. 애초에 중년 한남과 어린 여자의 로맨스물이 제작되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꼴 보기 싫어서? 안 보면 된다. 한남이 보고 착각할까봐? 혹은 어린 여자 판타지가 충족될까봐서? 그걸 보고 판타지가 충족되고, 그래서 소비한들 뭐가 문제란 말인가.

나는 <대부> 트릴로지를 다섯 번도 넘게 봤다. 연하에게 구애하는 것과 조직범죄 중 어느 편이 더 나쁜가? 날 죽여주라.

<나의 아저씨>가 로맨스여서는 안 된다는 태도는 한남은 어떤 식으로든 판타지물을 소비하면 안 된다는 뜻이고, 다시 말해 즐거워하거나 위로를 받을 권리가 없다는 이야기다. 멀쩡한 콘텐츠를 포르노로 치부하는 것도 문제지만 포르노인들 무슨 문제인지. 한남에게는 먹이를 주어서는 안 돼서 그러나보다. 불남(佛男)은 어떤가. <레옹>의 주인공은 미성년자와 놀아난다. 그뿐인가? 이놈은 살인도 한다.

멀쩡한 드라마를 악의 교전으로 만들기 위해 묘사와 주장의 차이를 의도적으로 무시해도 된다면 나는 <나의 아저씨>를 비난하는 모든 여성주의자들을 악마로 만들 수 있다. 꼬투리 잡기 좋은 문장을 하나 골라 가장 나쁘게 해석한 후, 그런 문장을 쓴 사악한 저의를 따지면 된다.

어찌됐든 로맨스물이 아님이 드러났다. 그러자 이런 기사가 나왔다. <오마이스타>에 실린 김종성의 글이다.

“로맨스를 지우는 데는 성공했지만, 다른 데서 말썽이 터졌다. 1회에서 사채업자 이광일(장기용 분)이 이지안(아이유/이지은 분)을 무차별적으로 폭행하는 장면이 약 2분가량 노골적으로 묘사됐기 때문이다. 폭행을 당한 이지안은 상대에게 뜬금없이 “너 나 좋아하지?”라고 묻는다. 드라마 공식 홈페이지에 나온 이광일 인물소개에 보면 “지안이 자신을 보게 만드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으니까”라며 괴롭힘의 이유를 설명한다. ‘좋아해서 때린다’는 데이트 폭력 가해자의 논리를 차용한 것이다.”

늙은 한남이 혐의에서 벗어나자 이제 젊은 한남을 검거한다. 장담하건대 드라마가 로맨스물이어서 저주의 이유가 충족되었다면 이런 아스트랄한 색출작업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작품은 이광일이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을 묘사했지, 이런 나레이션이나 캡션을 넣지 않았다.

“[꿀팁] 여성을 때리면 관심을 쉽게 받을 수 있습니다.”

“당신을 2분 간 때리는 그 남자! 혹시 당신을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는 순수남일 수도 있습니다. ‘너 나 좋아하지?’라고 물어보세요. 더 세게 때린다면? 축하합니다! 그의 마음은 당신의 것입니다.”

멀쩡한 드라마를 악의 교전으로 만들기 위해 묘사와 주장의 차이를 의도적으로 무시해도 된다면 나는 <나의 아저씨>를 비난하는 모든 여성주의자들을 악마로 만들 수 있다. 꼬투리 잡기 좋은 문장을 하나 골라 가장 나쁘게 해석한 후, 그런 문장을 쓴 사악한 저의를 따지면 된다.

해명은 핑계에 불과할 것이고, 무시는 도망일 뿐이다. 물론 그러면 표적이 된 여성주의 필자들은 반발할 것이다. 헌데 왜 자신들은 포악한 권리를 행사할 자격이 된다 믿는가. 한남이 아니거나 각성하고 전향한 한남이라서 그런가?

기막힌 운으로 비평가라 불리는 사람들은 캐릭터의 성별과 나이, 계급에 천착한다. 이들은 여성과 남성을 유대인과 독일인, 지주와 농노처럼 구분하고 사고한다. 한국 여성을 아우슈비츠를 목전에 둔 유대인이나 농노로 묘사하지만 실제 자신들은 나치나 지주처럼 행동한다. 거만하게 앉아 ‘한남 작품’ 낙인을 언제든 찍을 수 있다는 듯이 쥐고 제 기준의 ‘정치적 올바름’을 순순히 납세하기 원한다.

 

방송인 유병재는 <나의 아저씨>를 극찬하는 글을 올렸다가 젠더 감수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논란 후 발표한 유병재의 사과문

예술은 언제나 인간 자체를 발견하려고 하며, 단죄 대신 이해를 하고자 한다.

본질을 성취한 예술이란, 이런 지저분한 태도를 아득히 초월해 아름다운 것이다. 예술은 언제나 인간 자체를 발견하려고 하며, 단죄 대신 이해를 하고자 한다. 이지안은 박동훈을 무너뜨리는 데 아무런 죄책감도 가지지 않았다. 그녀의 대사대로 ‘월 오륙백씩 벌면서’ 힘든 척 하는 중년 남자 따위 죽게 내버려둔들 무슨 상관인가.

작품은 협소한 세계관의 우물에서 왕노릇을 즐기는 평론가들의 망상과 반대 지점에 있다. 박동훈의 성별(남성), 나이(중년), 계급(대기업 부장)은 그를 규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를 가둔 이미지의 감옥일 뿐이다. 이지안은 그를 도청하며 철창이 와해되어 감을 느낀다.

거기서 성별도 나이도 계급도 아닌 그 자신이 정체성인 한 인간을 발견한다. 이지안이 박동훈에게 애정을 느끼게 된 이유는 그도 자신만의 지옥에 빠져있음을 알아서다. 그런데 지옥은 주제가 아니라 계기에 불과하다. 이지안은 비로소 한 인간을 적극적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이지안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 훔치기 위해, 도망치기 위해서는 자주 뛰었다. 그러다 최초로, 눈길에 쓰러져 신음하는 박동훈이 죽기라도 할까봐 뛴다. 처음으로 타인을 위해 ‘특기’ 란에 유일하게 적은 달리기 실력을, 자기 자신을 사용한다.

그녀를 뛰게 하는 동력은 인류가 보편적 가지로 공유하는 감정이다. 단절에서 공감으로 자아가 팽창할 때 인간성은 회복된다. 이것이 <나의 아저씨>가 시청자들을 울리는 힘이며, 예술의 위대함이다.

<나의 아저씨>는 위대한 예술작품이 흔히 그러하듯 두 개의 다른 방향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히 변주한다. 회복은 방향의 차원에서 유턴이다. 발전은 직진이다. 이지안은 단절에서 공감으로 성장하지만 성장에는 단절이 필요하다. 이지안이 도청 프로그램을 지우는 장면은 아름답고도 계시적이다. 그녀는 아저씨가 내는 소리와 연애했다. 이별의 눈물은 그 자체로 비통하지만 미래의 웃음을 암시한다. 이별은 졸업이자 진학이기 때문이다.

<나의 아저씨>는 협소한 세계관의 우물에서 왕노릇을 즐기는 평론가들의 망상과 반대 지점에 있다.

이지안과 박동훈 두 사람이 헤어질 때, 그들은 고개를 돌려 서로를 바라본다. 그러나 시간 격차를 두고 바라보기에 서로의 멀어져가는 뒷모습만 볼 뿐이다. 그렇다. 결국 두 사람은 남남이며 인생은 혼자 살아야 한다. 하지만 이 장면은 비극도 허무주의도 아니다. 혼자일 때에 이르러서야 성장의 결과를 활용하고 확인할 수 있다.

장면이 바뀌면 이지안은 부산의 한 강의실에서 수화를 가르치고 있다. 가르침이란 내부의 것을 외부로 발산하는 행위이며, 이는 속이 차 있어야 가능하다. 박동훈의 동정과 ‘맨스플레인’ 덕이 아니다. 이지안은 톨스토이의 작품 제목을 그 속뜻까지 빌려와 말하자면 스스로 ‘부활’했다.

<나의 아저씨>는 대단한 자본이 없는 한 21세기 한국에서의 삶은 십중팔구 비극이라는 염세적인 세계관에서 출발한다. 끝까지 세계관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 작품은 비극의 진흙탕 속에서 연꽃이 피어나는 과정을 포착했다. 깊은 작품은 슬픔과 기쁨을 동시에 전달한다. 인간성이 피어나는 과정도, 결과도 경이로울 정도로 아름답다. 이것이 바로 성공한 예술만이 가질 수 있는 미학이다.

이 정도의 작품성 앞에서 주판을 꺼내놓고 산수를 하는 이들이 있다. 경향신문의 기사 <[위근우의 리플레이]‘나의 아저씨’, 모두를 위한 지옥에도 불평등은 있다>에서 위근우는 결국 파견직 여성이 부장보다 힘든 거 아니냐고 따진다. 아니 당연한 말씀을. 세상이 모두에게 지옥이어도 이지안의 지옥이 더 비참하다는 얘기다. 위근우에게는 안됐지만 <나의 아저씨>는 바로 그래서 훌륭하다.

박동훈이 마침내 상무 승진에 성공하고 술 파티를 벌일 때, 이지안은 그 떠들썩한 소리를 홀로 들으며 식당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다. 드라마는 결국 이지안의 지옥이 더 아래층이며 박동훈이 성공해도 이지안의 형편이 나아지지 않는다는 서늘한 시선을 비정하리만치 숨기지 않고 전달한다.

결국 아이유가 극의 주체이자, <나의 아저씨>의 ‘나’인 이유도 이 장면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지안은 박동훈의 관심과 도움을 받지만 이를 통해 성장하는 것은 결국 본인의 몫이다. 이지안의 성장이 주체적이고 감동적인 이유는 더 불행한 이가 덜 불행한 이에게 공감해주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니체 식으로 말하자면 귀족적인 정신이며, 자기 자신에 대한 개인의 승리다. 공감은 조건부가 아니다.

행복하자

<나의 아저씨>가 성취한 지점은, 조건부 혐오에 매몰된 것으로도 모자라 성평등 법정의 재판관으로 셀프 취임한 여성진영 필자들에 비하면 아득히 높은 우주공간에 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이 <나의 아저씨>에 대해 보여주는 몰이해는 이해가 간다.

큰 강의 물결은 침과 오줌에 바뀌지 않고 바다로 나아간다. 여성진영 필자들도 이지안처럼 마음의 성장을 이루기 바란다. 지적 성취는 그 다음 문제로 보인다. 그래서 극중 대사를 빌려 와 마지막으로 한 마디.

행복하자.

 

이선옥닷컴 오픈특집기획 <나의 아저씨> 리뷰大展

그 사람에게 마음 쓰지 않을 수 있을까《1》 by 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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