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옥
승인
2021.02.15 14:38 | 최종 수정 2023.12.15 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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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일인데 어떤 역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면서 친구한테 전화를 했다.
아침 8시 조금 넘은 시간이라 출근하는 사람들로 정류장이 붐볐다.
친구집 위치를 잘 몰라서 공중전화로 통화를 하는데 어디선가 나를 보는거같은 쎄한 느낌이 나서 눈을 이리저리 돌려보니 바로 옆 칸에서 어떤 젊은 남자애가 츄리닝 반바지 앞섭을 내리고 고추를 꺼내서 막 쳐대는 중이었다.
내 얼굴을 보면서. 계속 쳐다봐야 하나 모른척 해야하나 고민하다가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리고 하던 통화를 마치고 버스를 타러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반응을 하면 뭔가 가속이 걸릴거같아서 그냥 못본척했다.
그런데 그 남자가 정류장쪽으로 오더니 내가 타는 버스에 같이 타는 게 아닌가.
사람 붐비는 대로변의 버스 안이고 아침 시간이어서 크게 위협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독서실앞 바바리맨 본 느낌이랄까. 나는 뒤쪽으로 쑥 들어갔고 그는 뒤까지는 못왔으니 그뒤론 어찌된지 모른다.
신고를 하려고 했으나 그럼 하루일정이 차질이 생겨 그냥 무시했다. 너는 한 번도 성추행같은거 당해본적 없는 사람처럼 얘기하더라 하는 말을 종종 듣는다.
그럴리가 있겠나.
나도 당연히 사기, 교통사고, 강도, 성추행, 도둑..등 온갖 피해를 경험해봤다.
앞으로도 닥칠 수 있는 일이다.
살다보면 불행한 일은 언제든, 누구든 겪게 마련이니까.
다만 그 불행이 내 삶을 잡아먹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산다. 그런 상황에 닥쳤을때 필요한 대처는 이성을 가동시키는 일이다.
아침시간, 사람많은 곳, 츄리닝 차림의 남자, 공중전화박스 옆칸에서 고추 내놓고 딸딸이를 치는 건 환자다.
위해를 가할 사람이면 그런 방법을 택할 수가 없다.
그냥 본인도 어쩌지 못하는 변태적인 증상을 가진 사람이므로 치료가 필요하고, 이런 사람은 우리 사회에 디폴트로 존재한다. 룸에 가거나 오피하면 간단한 일을 굳이 길에서 베이비로션 바르고 딸딸이치는 영감님은 범죄자라기보다 치료가 필요한 사람인 거다.
강간범과 환자에 대한 대우는 달라야하고, 강간피해와 노출증에 대한 피해 또한 다르게 취급해야 한다. 고통이라는 건 주관적이어서 길가다 우연히 누군가 내놓은 성기에 평생 트라우마가 생길 수도 있다.
지나치게 민감한 사람은 어느 사회든 존재한다.
한 사람에게 강력한 고통을 주는 요소는 매우 복합적이어서 한 장면이 특정한 누군가에게는 고통의 방아쇠를 당겨버리는 작용을 하기도 한다. 내 가족이나 친구가 그런 상태라면 우리는 조금 더 단단한 사람이 되어 고통을 이겨내고 삶을 제대로 살도록 치료를 권한다.
세상에는 예측할 수 없는 불행들이 언제든 준비되어 있고, 우리는 그런 경험을 계속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게 타인의 사례가 되면 가장 민감한 사람이 호소하는 극단적인 피해감정에 맞춰 죄인을 처벌하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가장 예민한 사람의 주관적 피해를 보상하기 위해 노출증 환자에게 강간범의 혐의를 씌울수는 없고 그래서는 안 된다.
처벌과 책임은 합당하게 지도록 하되 나를 단단하게 하는 노력 또한 함께 가져가도록 권해야 한다. 지금 우리사회는 모두에게 강간범 수준의 처벌을 요구할 뿐, 적합한 책임의 정도와 피해를 이기기 위한 개인적 노력의 필요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우연히 여론의 관심을 받았다는 이유로,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해야 한다는 집단적 도덕제의의 희생자가 나오는 일이 잦아졌다. 한 사회의 근대적 교양의 척도는 악인에 대한 대우로 가늠할 수 있다.
공소시효도 양형도 없는, 만인이 만인에게 심판관 노릇을 하는 세상.
사적 제재를 금지하고, 지은죄만큼 벌받고, 다시 공동체 구성원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설계했던 근대적 시민국가의 원리가 무색한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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