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987은 세대로서 ‘386’의 집단적 행위에 방점을 찍지 않는다. 평범한 이들이 삶의 어느 순간 선택한 행동들이 하나하나 꿰어져 위대한 역사의 조각보를 완성한 사실을 주목한다. 그 가운데는 생을 온전하게 건 비장한 결단도 있고, 그리 무겁지 않은 적당한 동참도 있다.
‘차마’ 여기까지는 용납할 수 없었던 평범한 이들의 수많은 ‘차마’가 모였을 때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1987의 미덕은 평범한 이들의 선택이 만든 위대한 결과를 캐릭터 각자의 서사를 통해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는 점이다.
‘쥐떼’였다가 ‘개돼지’도 되었다가 갑자기 위대해지기도 하는 ‘민중’이라는 존재. 이를 덩어리로 취급하지 않고 개별인간들의 총합으로 해체하면서 오히려 익숙한 상찬의 방식이 놓치기 쉬운 진정한 존경을 획득해낸다. 우리가 이뤄놓고도 믿을 수 없었던 경이로운 당대의 매듭.
도청으로 모여 달라는 방송을 듣고도 나가지 못한 채 동료시민을 사살하는 총소리에 숨죽여 울어야만 했던 마지막 광주의 밤 이후, 한국사회에 각인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꼭 7년 만에 거대한 씻김굿 한 판으로 복원되었다.
6월 항쟁은 그 날, 죽을 길임을 알면서도 ‘차마’ 도청을 떠나지 못했던 사람들, 부디 우리를 잊지 말아달라는 말을 남기고 계엄군의 총에 죽어간 5월 광주의 위대한 시민들에게 뒤늦게 보내는 동료시민들의 답장이기도 하다. 영화 1987을 보면서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다시 생각한다.
말하기가 무척 어려운 얘기들이 있다. 간절히 하고 싶지만 글로 표현하려니 당사자들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까 염려스러운 사례들이다. 하나를 조심스럽게 꺼내본다.
세월호의 친구들은 한국사회에서 딱 평균의 존재들이었다. 중소도시에서, 부자이지도 가난하지도 않은 평균적인 부모들과 함께, 입시지옥의 현실에 숨 막히면서도 또래문화 속에서 나름 즐겁게 살아가던 청소년들. 부모를 공경하고,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가야 하고,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고, 어려운 이웃을 보면 도와야 한다는 공동체의 규범 속에서 순응과 저항을 반복하면서 살았던 지극히 평범한 학생들이다.
이들의 삶을 반추하면 어른들의 눈으로 볼 때 때로 규범에서 벗어나 비윤리적이고, 부도덕하고, 걱정스러운 장면들이 있다. 부모가 금지한 이성교제를 하거나, 담배를 피웠거나, 자기들끼리 놀러가 술을 먹기도 하고, 금지된 게임을 하기도 했다.
‘평범’하다는 것은 이런 일탈까지를 포함한다. 이 친구들의 짧은 생을 기록하면서 어떤 부모는 생전에 친했던 친구의 말을 통해 미처 몰랐던 아이의 일탈을 알게 된 후 오히려 기뻐했다.
공부 열심히 해라, 나쁜 짓 하지마라, 좋은 대학 가야 한다... 행여 작은 일탈이라도 할까 싶어서 안달하고 다그쳤던 자신. 짧은 생을 사는 동안 억압하고 한 길만 가라고 했던 일이 떠올라 아이한테 너무 미안했는데, 너는 그렇게라도 숨을 쉬었구나, 다행이다... 고맙고 미안해서 울었다고 한다.
세월호의 친구들은 죽음이 눈앞에 보이는 순간에서도 자신의 구명조끼를 벗어 친구에게 건네주었다. 어린 아이가 미처 나가지 못한 걸 발견하고 손에서 손으로 아이를 옮겨 배 밖으로 먼저 내보냈다.
“아이 먼저, 여자 먼저, 친구들아 조금만 힘내자, 곧 우리를 구하러 올 거야” 서로를 다독이며 죽음의 공포에 맞섰다. 그러다 마지막을 예감한 순간 모두들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생의 마지막 말들을 남겼다.
“사랑해, 미안해, 보고 싶어, 안녕”
어른들 몰래 또래 문화 속에서 조금씩 일탈하고, 부모들에게 걱정의 대상이었던 아이들이지만, 위기의 순간 이들이 작동시킨 규범은 너무나 ‘어른스럽고 전통적인’ 것들이었다. 여자 먼저, 아이 먼저. 약자를 위하라는 말을 지켰고,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라는 말을,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을 모두 지키고 떠났다.
저항과 반동만큼 안정과 조화에 대한 욕구 또한 인간의 속성 중 하나다. 우애와 협동, 이타심이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요소들이 그 속성을 떠받친다. 세월호에서 돌아온 친구들과 떠난 친구들 모두의 모습에서 나는 인간은 얼마나 괜찮은 존재인가 생각했다. 규범이 작동하는 원리가 억압과 퉁제의 이데올로기 때문이라는 개념이 인간을 얼마나 ‘납작’하게 이해하는 주장인지도 깨달았다.
“가만히 있으라”는 한 마디를 따라 기다린 친구들. 목숨이 위험한 순간에도 이들이 가만히 있었던 건 순응만을 강요해 온 어른들 때문이라고 비난하는 목소리가 컸다. 어떤 경우에도 어른들 때문임은 맞지만, 나는 그 순간 친구들의 행동이 몸에 밴 순응의 기제보다는 그 지침이 생존을 위한 대응규칙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이를 믿고 따른 거라고 생각한다. 어른들이 시스템을 마련해 두었을 거라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순응밖에 모르는 존재였다고 여기는 것 또한 친구들을 온전히 이해하는 분석은 아니다.
인간은 어떤 개념으로도 단일하게 규정할 수 없는 존재다. 우리는 나와 타인에 대해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그런 노력을 하고는 있을까? 인간의 존엄성은 그저 상찬의 말로 쓰이면서 교과서의 붙박이 구절 같은 개념이 되었다. 하지만 인간의 존엄성이야말로 구체적인 인간들이 삶과 죽음을 통해 실현하고 지켜왔기 때문에 붙박이가 된 소중한 가치다. 지극히 평범하고 한 없이 초라하다가도 어느 순간 놀랍도록 위대해지는 인간이라는 존재. 이 불가해한 존재를 이해하려는 노력에 완료시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 그것이 세월호의 친구들이 내게 남겨 준 가르침이다.
영화 1987을 보면서 다시, 여전히, 인간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