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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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30 12:15 | 최종 수정 2023.12.27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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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추구하는 이념의 신조를 충족시키기 위해 알지 못하는 원인을 쉽사리
언급하는 일이야말로 고인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다.
주간경향 연재-10(원본링크)
한 여성 연예인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생전의 그녀는 일거수일투족이 화제인 셀러브리티였고 악플에 시달려 활동을 쉬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많은 이들이 그녀의 죽음을 두고 악플로 인한 우울증이 원인이었다고 말한다.
진보진영과 매체들은 그녀를 ‘여성혐오에 맞서 함께 싸워왔던 젊은 여성들의 동지’라거나, ‘가장 폭력적인 곳에서 가장 전투적으로 싸운 여성’으로 상찬한다.
생전의 그녀에게 악플을 쏟아낸 인터넷 공간에서는 서로 상대 성별의 책임을 묻는 글이 난무한다.
유명인을 향한 악플은 대개 인신공격성 욕설, 악성루머, 성적 희롱이 주를 이룬다.
최근 추가된 특성은 페미니즘과 관련된 이념형 악플러들의 등장이다.
고인에게 쏟아졌던 악플 가운데는 ‘여성이면서 왜 스스로를 성상품화하느냐’, ‘왜 로리타 콘셉트로 화보를 찍었느냐’, ‘왜 여성의 권리를 위해 싸우지 않느냐’(필자가 순화한 표현이다)는 여성들의 비난이 많았다.
이념형 악플러는 일반 악플러들과 달리 사이버 린치를 행하면서도 자신의 신념체계에 따라 정의로운 행동이라 여긴다.
그래서 반성이나 자기성찰이 없다.
이런 인식이 가능한 이유 중 하나는 진보매체들의 편파적인 지원 덕분이었다.
예상대로 이번에도 일부 진보매체는 고인의 삶 가운데 필요한 면만 부각해 죽음의 원인을 단정하는 중이다.
고인의 죽음을 여성혐오로 인한 사회적 타살로 규정하는 건 섣부를 뿐 아니라 위험하다.
사실관계를 왜곡하거나, 공정함과 객관성을 잃은 보도는 분노를 자극해 악성 댓글을 유도해왔다.
온라인 갈등의 역사를 왜곡해 본질을 호도하는 일은 특히 성별 이슈에서 빈번하게 일어났다.
예를 들자면 많다.
‘메갈리아는 일베에 맞서 싸운 유일한 당사자’라거나, 몇백 명 수준에서 멈춘 여성연예인 사형 청원은 여혐사건으로 보도하면서, 여성혐오자로 낙인찍고 수천 명이 동의한 남성연예인 사형 청원은 도외시하는 태도, 온라인 공간에 산개한 단어들을 조합해 ‘창녀연금’이라 만든 후 이를 남초커뮤니티 발로 인용 보도하는 비윤리적 태도, 흔한 술집 다툼을 대형 여성혐오 사건으로 키운 보도 등이다.
왜곡은 반발을 부르고 결국 적대와 갈등으로 이어진다.
이 결과 벌어진 온라인 전쟁의 가장 흔한 무기가 악플이다.
섣불리 사회적 타살을 거론하기 전에 여성혐오를 키워 적대를 부추긴 보도에 대한 자기성찰이 먼저인 이유다.
한 사람이 생을 마감한 이유에 대해 누구도 함부로 단정할 수는 없다.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만이 유일하게 정확하다.
그녀가 삶을 이어간 동력도, 죽음을 선택한 이유도 우리는 알지 못한다.
자신이 추구하는 이념의 신조를 충족시키기 위해 알지 못하는 원인을 쉽사리 언급하는 일이야말로 고인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다.
그녀는 자유분방한 삶의 태도를 가진 이유로 성별 불문 악플러들의 공격대상이었다.
아마 자신의 죽음이 또 한 번 온라인 전쟁의 불씨가 되는 일은 원치 않을 것이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으며 누구의 것도 아니었던 자유로운 영혼, 그녀의 자리는 여전히 거기고 우리는 그저 애도할 뿐이다.
그걸로 충분하다.
<이선옥 작가·이선옥닷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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