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 장예찬 국회의원 후보(이제는 무소속 후보)가 십수년 전 소셜미디어에 올린 글들 때문에 당선이 유력했던 지역구의 공천이 취소됐다.
장예찬 후보는 문제가 된 발언들에 대해 철없던 어린 시절의 치기어린 말들이었고 실수였다고 사과를 했으나 문제가 계속 불거지면서 돌이킬 수 없게 돼버렸다.
상대 진영의 비난 수위는 높지만 장후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국민의힘 지도부의 결정에 반발하며 그의 무소속 출마를 격려하는 분위기다.
장예찬 후보의 발언 중 처음 문제가 된 것은 '난교를 예찬하는 부도덕한 후보'라는 점이었다.
장예찬 후보가 쓴 글은 다음과 같다.
이왕이면 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직무영역에서 비도덕적인 행위를 보이면 가차없이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그러나 직무와 상관없는 사생활의 영역에서까지 '도덕적으로 옳은 인간상'이 강요되어야 하는 것일까.
매일밤 난교를 즐기고 예쁘장하게 생겼으면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고 찝쩍대는 사람이라도 맡은 직무에서 전문성과 책임감을 보인다면 프로로서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사회가 조금 더 건강한 사회이지 않을까?
물론 사생활을 욕하는 건 개개인의 판단 자유에 맡기면 되는 것이고
장예찬 후보가 쓴 글은 비판자들의 조롱과 달리 난교를 예찬하는 내용이 아니다. 리더의 자격과 능력을 논할 때 도덕적으로 훌륭하기까지 하면 최선이지만, 자신의 직무영역에서 무능하거나 비리를 저지른 것이 아니라면 사생활의 영역에서까지 도덕적으로 옳은 인간상이 강요되는 것은 문제라는 견해를 조심스러운 말투로 표현한 글이었다.
우리 사회가 부러워하는 선진국의 문화 가운데 하나가 프랑스 사회의 자유로움이다. 프랑스는 대통령이 재임 중에 혼외관계를 맺거나, 고위 관료와 정치인들의 부적절해 보이는 사생활이 드러나더라도 프라이버시 존중의 규범이 먼저 작동하는 사회로 유명하다. 프랑스발 보도들을 보면 이러한 스캔들이 일어나더라도 황색 언론이 가십으로 다룰 수는 있어도 공신력 있는 매체들은 사건화하지 않고 시민들도 무관심하다고 한다.
우리 사회에는 프랑스의 문화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공인일지라도 사생활과 공적 행위에 대한 평가를 별개로 취급하는 문화에 대한 동경을 여러 보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장예찬 후보의 과거 글 또한 이러한 맥락임을 알 수 있다. 이를 난교예찬이나 불륜예찬으로 비난하는 것은 글의 진의를 이해하지 못했거나 악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뒤이어 문제가 된 '룸살롱', '명품백' 언급 글도 전하고자 하는 의도는 선행을 독려하는 내용인 것을 알 수 있다. 부산에 대한 비하발언으로 평가되는 글 또한 마찬가지다. 부산사람이 부산에 대해 조롱하는 것은 오히려 애정이 전제된 자기비하 개그와 같은 것이다.
편견과 악의를 제거하고 들여다보면, 그리고 맥락을 따져보면 납득이 가능한 글들이다. 동의하기 어려운 내용이 있다면 그의 현재 해명을 듣고 부적절함을 판단하면 될 일이다. 만일 내가 아끼는 사람이나 평소 좋아하는 사람이 치기 어린 20대에 문제적인 글들을 썼다면 진의와 맥락을 알기 때문에 심각하게 문제삼기보다는 주의를 주는 정도로 넘어갔을 것이다.
과거 자연인이었지만 현재 정치인이 됐고 상대진영과의 대결의 장마다 앞장서서 '말'로 공격을 담당했던 인물이기 때문에 더 가혹한 평가를 받는 것 또한 감내해야 한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요즘의 상황을 보면 우리의 문화는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가 하는 회의가 든다. 자연인일 때 했던 말들이 누군가의 파일에 보관되었다가 십수년만에 튀어나오거나, 본인도 기억하지 못하는 행동들이 폭로되는 것을 볼 때마다 나는 공포를 느낀다. 상대 진영의 실수에 대한 집요한 사냥과 악의적인 해석, 게임처럼 진행되는 적대적 대결, 수십년 전의 말과 글까지 호출되어 한 인간의 현재가 평가되는 것을 볼 때도 그러하다.
특히 정치의 시간이 되니 말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 실수에 대한 관용은 사라지고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진영이 당할 때에만 용서를 호소한다. 상대의 실수나 약점으로 보이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의 관용도 보이지 않는다.
장예찬 후보가 사퇴 뒤에 보인 행보는 그래서 안타깝다. 장예찬 후보는 사과를 하면서도 억울함을 호소했다. 본인의 말이 악의적으로 해석되고 공천 취소까지 이어졌으니 억울한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말의 맥락을 거세한 악의적 해석 때문에 부당한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라면 타인에게는 그러한 일을 되풀이하지 않는 것이 마땅한 태도일텐데 그는 그렇게 나아가지 못했다.
장예찬 후보가 억울함을 호소하며 쓴 글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조국혁신당의 조국 대표는 고등학생과 성인의 성관계도 합의하면 처벌하지 말아야 한다는 칼럼을 썼습니다. 2018년 청와대 민정수석일 때의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도덕한 성행위 옹호 아닙니까?
조국 대표가 고위공직자 시절 언론에 버젓이 남긴 글도 저와 똑같은 잣대로 평가해주십시오.(장예찬 후보의 글 가운데)
조국 대표는 2018년 청와대 민정수석 시절 법률신문에 '미성년자 의제강간·강제추행 연령개정론' 이라는 칼럼을 썼다. 해당 글에서 그는 민정수석이 아닌 법학자로서 쓴 것임을 밝히고 있다.
조국 대표가 쓴 칼럼은 미성년자의 성적자기결정권에 대한 보호와 형사법적 규제의 경계에 대한 견해를 피력한 것이다. 미성년자 안에서 중학생과 고등학생의 차이, 의제강간 연령의 하향화 문제, 청소년의 성적자기결정권 존중의 문제, 민법상 혼인가능연령과 형법상 처벌 사이의 형평 등을 언급하면서 '보호'의 명분 아래 성적 금욕주의를 형법으로 강제하는 문제를 다룬 칼럼이다.
2018년은 페미니즘이 지배한 시기로 성범죄와 성폭력에 대한 엄벌을 요구하는 목소리만이 높았다. 페미니스트 진영은 성적 영역에 대해 엄숙주의로 퇴행해 성적자기결정권보다는 무조건적 보호와 처벌만을 요구했다.
나는 조국 대표가 이러한 내용의 칼럼을 민정수석이라는 공직자 시절에 쓴 것이 의아했고 시기적으로도 뜻밖이라 생각했다. 당시 위와 같은 내용의 칼럼을 쓴 것은 용기가 필요했던 일이므로 오히려 법학자로서 소신행보로 보였다. 그가 법무부장관으로 임명될 때 페미니스트 단체들은 위 칼럼내용을 비판하며 그의 임명을 반대하기도 했다.
장예찬 후보는 조국 대표가 부도덕한 성행위를 옹호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해석은 부당하다. 장예찬 후보가 난교를 예찬했다고 해석하는 주장이 부당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조국 대표는 고등학생과 성인간의 성행위를 옹호하지 않았다. 어떤 고위 공직자가 현재 한국과 같은 사회에서 그러한 행위를 옹호하겠는가? 장예찬 후보가 난교를 예찬한 것이 아니라 공과 사를 구분해 평가하는 문화를 지향하고자 한 것처럼, 조국 대표는 미성년자와 성인간 ‘합의'성교의 범죄화 문제에 있어서 ‘자유’와 ‘보호’ 간의 새로운 균형점을 찾고자 했다.
이것이 법학자로서 주장하지 못할 내용은 아니지 않은가?
나와 타인 모두에게 관용적이면 결국 실수에 너그럽고 두번 째 기회를 주는 관용적이고 개방적인 사회가 될 것이다. 우리는 모두 그러한 사회를 원한다. 그러나 타인에게 엄격함을 요구하는 태도는 결국 우리 모두에게 인간이라면 불가능한 완전함을 요구하면서 끝없이 누군가를 심판하고 아무도 용서받지 못하는 사회를 만들게 된다. 그 안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는 없다.
그러므로 내게 이해받고 싶은 맥락이 있다면 타인에 대해서도 그 맥락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견해가 다른 사람일지라도 타인을 대할 때에는 내가 대우받고 싶은대로 대우해야 할 것이며, 오히려 다른 사람의 일일 때 정의로운 원칙을 제시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이데올로기나 사람이 아니라 권리 자체를 옹호하는 태도를 견지하는 데에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부조리하고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들로 구성된 사회가 그나마 자유와 권리를 유지할 길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 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점점 더 도달하지 못할 엄격함을 향해 서로가 치킨게임을 벌이기만 한다. 모두가 심판자가 되어 가장 가혹한 처벌을 요구하고, 실수한 (다른 편의)사람이 다시는 공동체 안에서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을 정의라 생각한다.
날마다 말의 사냥터에서 스러져 나가는 사람들을 목도하면서, 그 스러짐을 둘러싼 환호와 탄식들을 볼때마다 나는 아득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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