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CIA(중앙정보국)가 워키즘(wokeism)에 물들다

정치적 올바름에 빠진 정의중독자들

이선옥 승인 2024.05.29 20:19 | 최종 수정 2024.06.01 14:56 의견 0

워키즘(wokeism)은 한국에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PC)’으로 통한다. '깨어있다'는 단어 ‘워크(woke)’에서 유래한 것인데 PC주의자들에 대해 '깨어있는 척 한다'며 조롱 또는 비하하는 말로 쓰인다.

얼마전인 2024년 4월, 독일의 진보잡지 <슈피켈>의 기자인 르네 피스터가 <잘못된 단어들>이라는 책을 냈다. 그는 이 책을 쓰게한 문제의식을 이렇게 표현했다.

"왜 좌파마저 민주주의를 위협할까?"

르네 피스터 기자가 쓴 <잘못된 단어들>

저자는 워싱턴 특파원을 지내면서 관찰한 미국의 워키즘(wokeism)현상을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위험한 신호로 보았다.

<잘못된 단어들>은 미국사회를 구성하는 주요 영역별로 워키즘에 잠식된 사례를 나열한 후, 그 현상이 불러온 문제적 결과들까지 함께 보여준다. 그러면서 아직 미국만큼은 아니지만 자신의 나라인 독일의 상황도 위험한 길로 가고 있다는 우려를 표한다.

그가 분석한 영역들은 미국의 대학, 기업, 문화, 관료사회, 언론 등 다양하다. 이러한 영역들에서 워키즘이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현상은, 오늘날 진보·좌파의 정신과 문화가 미국사회의 주류적 질서로 자리잡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지나치게 '깨어'버린 미중앙정보국(CIA)

여러 사례들 중 특히 눈길을 끈 것은 미국의 중요한 국가기관인 중앙정보국(CIA)이 제작한 직원모집용 홍보영상이다.

'Humans of CIA'라는 제목의 시리즈 중 하나인 해당 광고영상은 중앙정보국에서 일하는 다양한 인물들을 보여주는데 유독 이 영상만 높은 조회수를 기록했다. 이 영상이 방영된 후 소셜미디어에서는 중앙정보국에 대한 성토발언과 지지발언이 등장했고, 워키즘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미 중앙정보국(CIA)은 라틴계 여성을 등장시켜 워키즘에 부합하는 홍보영상을 제작해 논란이 됐다.

중앙정보국의 해당영상링크

<잘못된 단어들>의 저자는 관료적으로 영구화된 워키즘을 다룬 챕터에서 중앙정보국의 광고를 사례로 들며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미국 중앙정보국 CIA도 기회로 인식할 정도로 이(정치적 올바름 추구: 필자 주)는 이미지 구축에 아주 유익하다.

2021년 3월에 CIA는 새로운 시대의 스타일로 가득한 광고 영상을 제작했다. 광고 영상에서 36세 라틴계 여성 공무원이 CIA 본부 복도를 성큼성큼 걸으며 자신의 경력을 이야기한다.

"나는 불안장애 진단을 받은 시스젠더 밀레니얼 세대입니다."

그러는 동안 배경에서 웅장한 음악이 울린다.

"나는 교차적이지만 내 자아는 정상 기준을 충족하지 못합니다."

이 광고는 21세기 초의 진보적 자아도 비밀 고문 수용소를 운영하고 비밀 암살단을 파견하는 국가기관에서 일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영상이 틀림없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올바른 믿음을 따를 준비가 되었느냐다."

영상에서 워키즘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발언들은 다음과 같다.

"I am a cis-gender millennial whose been diagnossed with
generalized anxiety disorder.
(나는 불안장애 진단을 받은 시스젠더 밀레니얼 세대입니다.)

I'm intersectional. But my existence is not a box.
(나는 교차적입니다. 그러나 내 존재는 정상성 체크박스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I used to struggle with imposter syndrome,
but at 36 I refuse to internalize misguided patriarchal ideas of what a woman can or should be.
(나는 가면증후군으로 어려움을 겪어왔지만, 36세인 나는 여성이 무엇을 할 수 있거나 되어야 한다는 잘못된 가부장적 생각을 내면화하기를 거부합니다.)

know your worth, command your space. Mija You're worth it."
(당신의 가치를 알고, 당신의 공간을 지배하세요. 여성들이여 당신은 그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이 영상이 논란이 되자 'NewsWeek'와 'Forbes Breaking News' 채널에서 이 사안을 뉴스로 다루기도 했다.

Newsweek는 "이 CIA 모집 비디오는 지나치게 '깨어있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고 있다"(This CIA Recruitment Video Is Getting Slammed For Being Overly 'Woke')고 보도했다.

Forbes Breaking News는 "CIA 모집 영상에 '나는 당당하게 나다'라고 말하는 '시스젠더 밀레니얼'이 등장했다"(Viral CIA Recruitment Video Features "Cisgender Millennial" Who Says "I Am Unapologetically Me")고 보도했다.

뉴스위크 영상링크

포브스 브레이킹 뉴스 영상링크

범불안장애 진단을 받았다면 어떤 정보기관에서도 일해서는 안된다는 뉴스위크의 댓글

5년 전이라면 SNL 대본에서나 볼 이야기라고 조롱하는 포브스 뉴스의 댓글

댓글을 달 수 없도록 한 CIA영상과 달리 뉴스채널의 보도에는 많은 댓글이 달렸다. 추천수가 1천회가 넘는 등의 상위 추천 댓글은 대부분 워키즘과 CIA를 향한 조롱과 비판이었다.

비아냥대는 감정적 조롱도 다수 있지만 비판자들이 제기하는 본질적 문제는 국가의 안보에 큰 영향을 미치는 중앙정보국이라는 기관에 불안장애 진단을 받은 직원이 일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가라는 의문이다.

PC주의자들은 그간 이러한 문제제기에 대해 차별주의자와 혐오주의자들의 백래시라며 일축해왔다. 이러한 대응방식이 오늘날 워키즘(PC주의)에 대한 대중적 반감을 키웠다.

뉴스채널의 댓글이 이러한 현실을 잘 보여준다.

저자 르네 피스터 또한 CIA의 워키즘 홍보영상을 두고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의 비판지점은 대중들과는 다르다.

진보적 매체에 소속된 그의 비판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광고'를 바람직한 것으로 취급하는 좌파진영을 향한다.

21세기인 오늘날의 (워키즘에 빠진) 좌파는 비밀 고문수용소를 운영하고 비밀 암살단을 파견하는 국가기관에서 일 할 수 있다는 것인가? 현재의 좌파에게는 자신들이 정치적으로 올바르다는 믿음을 따르는 것이 중요해졌는가? 하는 비판이다.

그는 "왜 좌파마저 민주주의를 위협할까?"라고 묻는다. 그가 보기에 지금 미국사회에 매우 광범위하게 퍼졌고, 독일사회에도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워키즘은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좌파'마저'라는 표현을 쓴 데서 알 수 있듯 그는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세력은 극우 파시스트 집단과 우파 포퓰리스트라 생각해왔다. 그러한 세력에 맞서 민주주의를 쟁취하거나 지키기 위해 투쟁했던 세력이 진보좌파라 여겨왔는데, 그러한 믿음에 부합하지 않는 워키즘 집착현상을 보고 '왜 좌파마저'라는 한탄을 하고 있는 것이다.

CIA 홍보영상은 국가기관마저 워키즘에 빠진 미국의 현실, 본연의 임무와 목적보다는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보이는' 부조리한 허상에 빠지도록 만드는 워키즘의 위험함, 진보좌파의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된 워키즘이 한 사회의 안전과 안정을 흔들고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교훈을 준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떨까?

얼마 전 진중권 교수는 방송에 출연해 PC주의 즉 정치적 올바름은 우리사회가 지켜야할 기본적 규칙이라며 PC주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보수정당을 비판했다.

워키즘, PC주의, 정체성 정치, 정치적 올바름 등, 무엇으로 불리든 진보좌파의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된 그 운동 때문에 1세계가 얼마나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는지, 과도한 PC주의자들이 그간 축적된 민주주의와 전통적 미덕들을 어떻게 파괴하고 있는지, 이러한 해악 때문에 사회적으로 어떠한 비용을 치르고 있는지는 알려고 하지 않은 채 그저 자신의 '정치적 올바름'을 뽐내는 사람들이 진보좌파의 주류가 되었다.

보수정치인들은 PC주의를 그저 세련되어 보이는 글로벌 스탠다드 매너쯤으로 여기고 무비판적으로 추종한다.

한국사회가 더 암울한 점은 그나마 진보좌파 진영의 내부에서 잘못된 길을 인지하고 성찰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1세계와 달리, 진보좌파 진영 안에 그런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진중권 교수처럼 PC주의라는 용어 자체가 비아냥의 의미가 된 대중적 변화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이 새로운 좌파의 '교리'를 주창하는 사람들이 오피니언 리더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분별없는 열정에 사로잡힌 정의중독자들,

오늘날 정치적 올바름에 빠진 진보좌파에게 적절한 표현은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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