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념가들은 심오하고 깊은 논쟁이 필요한 화두를 단순하게 후려친다.
국가대표 메달리스트를 둘러싸고 벌어진 최근 논란의 예를 들어보자.
나라망신, 학대 등 극적인 용어가 동원되고 한동안 세상이 시끄러웠다.
선수 자신은 차분하게 경기에 임해 메달 획득에 성공했지만 양궁협회는 이 소란 때문에 업무를 정상적으로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진정 선수를 위한다면 소란에 가담하기보다 응원에 매진하고, 협회에 부담을 지우는 행동을 자제해 선수 지원에 집중토록 하는 게 합리적인 행동이다.
그러나 작은 불씨만 던져져도 들불로 타오르고 마는 성별 갈등 사안에서는 그러한 상식을 기대하기 어려운 지경이 돼버렸다.
언제나 그렇듯 사건이 아닌 것을 사건으로 만들어 키운 언론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
이번 사태는 언론과 페미 진영이 주장하듯 단순한 공식에서 비롯된 게 아니다.
이들이 공식화한 아래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 숏컷은 페미이므로 메달을 박탈해야 한다(X)
-페미니스트라는 이유로 메달 박탈까지 요구한다(X)
-여성에 대한 혐오이며 사상검증이다(X)
페미 진영이 의도적으로 누락한 '남성혐오'
숏컷과 페미니스트와 메달 박탈 사이에는 수년 간 과열되어 온 성별갈등에 축적된 키워드가 빠져있다.
이들이 의도적으로 누락시키고 있는 단어, 바로 '남성혐오'다.
이번에 남성집단이 문제삼은 것은 '숏컷'(외모)이나 '페미니스트'(사상) 여부가 아니었다.
그들의 주장대로 숏컷을 이유로 메달 박탈을 요구했다면 다른 숏컷 선수들에게는 왜 이러한 항의가 없었을까? 숏컷이나 페미 여부에 대한 부정적 견해 또한 초반에 일부 익명의 소수가 제기했으나, '숏컷이 무슨 문제인가', '페미니스트라도 실력만 있으면 될 뿐 문제삼을 일이 아니다'라는 면박만 당한 채 묻혔다.
그동안 우리사회는 일베식 혐오 용어를 썼다는 이유로 즉각 공개사과를 하고 불이익을 얻은 사회적 경험이 쌓였다.
공적 지위를 가진 인물에게 혐오 용어 사용의 진위여부와 책임을 묻는 대중의 태도는 그리 이상하지 않은 일이 되었다.
이들의 주장은 그간 여성혐오 혐의를 받은 많은 인물들이 공개적 사과 등으로 제재를 받았으므로, 공적 인물들의 혐오발언이 사회적 문제라면 남성혐오 발언 또한 문제시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제기조차 언론이 키우지 않았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다.
언론이 숏컷, 페미니스트 논란을 중계하기 시작하면서 관심이 집중되자 해당 선수의 과거 발언들이 일부 드러났다.
초점은 숏컷이나 페미가 아니라 '남성혐오'로 이동했다.
언론은 이 과정에서 남성혐오는 누락하고 젊은 남성들이 숏컷과 페미를 문제삼아 메달 박탈을 요구하고 있다며 또 한 번 이들을 문제적 집단으로 낙인찍었다.
소란 수준에도 들지 못할 존재감 없던 발언들은 언론이 붉은 고기덩어리를 발견한 사냥개처럼 덤벼들기 시작하면서 '나라망신'에 이르는 사건이 됐다.
언론은 열심히 전쟁을 부추겼다.
설사 페미니스트에 증오심을 가진 남성들이 메달 박탈을 요구한다 해도 누가 이러한 주장을 실질적인 위협이나 의미 있는 여론으로 취급할 것인가? 마치 독재정권에 대한 향수에 젖어 "군부여 일어나 과거의 영광을 되찾자!"고 주장하는 노인들이 법원 앞에 상주한다 해도 민주사회의 키치적인 풍경으로 취급되는 것과 같은 상황일 뿐이다.
그러나 언론이 이 노인들을 진지하게 내란 음모세력으로 규정하고 나선다면 그건 다른 문제가 된다.
이번 사태도 그렇게 전개됐다.
'남성혐오'는 의도적으로 누락되고 '금메달 반납'은 진지하게 부풀려졌다.
페미니스트들은 '숏컷'과 '페미니스트', '메달박탈 요구'라는 후려친 사실로 외신에 제보를 하고, 이를 근거로 한 외신보도는 다시 '국제적 망신'이 되어 돌아왔다.
여성혐오와 남성혐오를 둘러싼 성별전쟁의 맥락은 사라졌다.
남성들은 숏컷(외모)이나 페미(사상)가 아니라 '혐오'를 문제삼았지만 어디에서도 이들의 주장을 굴절시키지 않고 그대로 다뤄준 곳은 없었다.
심판의 지위를 가장한 플레이어, 페미 진영의 이념가들
사태가 커지자 일부 매체는 자성의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그 결은 달랐다.
언론의 자성 포인트 중 하나는 온라인 공간에 상주하는 일탈적 의견을 침소봉대해 클릭장사에 매진하는 선정적 태도에 대한 자성이다.
다른 하나는 혐오와 차별의 문제를 단순 '논란'으로 중계하는 바람에 여성혐오라는 사안의 본질이 묻힌다는 자성이다.
둘 다 표면으로는 언론의 자성을 촉구하고 있지만 전자는 미디어로서의 규범에 관한 것이고, 후자는 규범의 외피를 두른 이념의 주창으로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후자의 매체들은 '논란' 대신 '온라인 학대'라고 표기해야 마땅하다고 말한다.
'논란'과 '학대' 사이이 간극은 크다.
논란은 관전자로서 사실관계를 전달하는 태도이지만, 학대는 사안에 대한 주관적 가치판단이 작동한다.
캐스터에서 플레이어로 지위가 전환되는 것이다.
해당 선수를 둘러싼 발언들을 과연 '학대'라 칭할 수 있는 것일까? 페미 진영의 매체들은 단호하게 그렇다라고 말한다.
어떤 행위를 학대라 규정하려면 논란의 양과 질, 문제적 발언의 내용과 수위, 빈도, 지속성, 해당 발언의 영향력과 파급력, 발언자의 지위, 대표성, 발언의 확산양태, 선수에게 미친 영향 등등 따져보아야 할 조건이 많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이들은 개념을 주장하고 고정시키는 데 필요한 논증을 하지 않는다.
기준은 자의적이며 편의적이다.
가령 배우 유아인이 '애호박 사태"때 당했던 사이버불링은 왜 학대라고 명명하지 않았을까? 당시 온라인 상에서는 만 단위가 넘는 비난과 공격이 쏟아졌고, 주요매체에 그를 비난하는 공식 칼럼들이 실렸으며, 그의 작품에 대한 보이콧과 별점테러들까지 벌어졌다.
단지 애호박을 두고 농담성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한 연예인이 당해야 했던 일이다.
페미 진영의 매체들은 개인에 대한 도넘은 사이버 불링을 비판하기는 커녕 온라인 조리돌림에 동참했다.
이들에게 온라인 학대를 구분하는 기준이란 무엇일까?
<한겨레>는 얼마 전 20대 여성의 자살시도가 급증했다며 이를 '학살'이라 규정했다.
이번에는 선수에 대한 온라인 상의 비난을 '학대'라 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사려깊은 논쟁이 필요한 사안을 가장 극단적인 용어를 사용해 후려치는 방식을 선호한다.
극단적 용어 사용에 주저함이 없다.
자신들의 방식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는지, 이러한 주장이 합당한지에 대한 검토 또한 없다.
페미 진영의 학자인 홍성수 교수는 "악의적 왜곡은 언론이 할 수 있는 잘못 중에서도 가장 죄질이 나쁜 것"이라고 한 바 있다.
또한 "특정인과 단체에 대한 혐오나 비난, 과도한 책임전가는 그 자체로 나쁘기도 하지만, 문제를 푸는데 효과적이지 않다"라고도 했다.
남성혐오를 의도적으로 누락하며 악의적으로 갈등을 키우는 언론, 남성들이 양궁협회에 메달박탈 요구를 하고 있다며 취재 없이 보도하는 언론, 남성집단에 대한 과도한 혐오와 비난, 책임전가에 급급한 페미 진영 등 지금의 상황에 딱 들어맞는 말이다.
그 자체로도 나쁘고, 문제를 푸는데 효과적이지도 않은 이러한 방식을 계속하는 페미 진영에 대해서는 왜 그러한 분석과 평가가 적용되지 않는 것일까?
여혐과 남혐에 대한 불공정한 취급
남성집단의 항의와 요구가 언제나 정당하고 합리적일 수는 없다.
익명성과 주목경쟁의 공간인 온라인에서는 더욱 그렇다.
여성집단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똑같은 문제적 행위에 대한 사회적 평가와 취급이 다른 데에서 불거진다.
여성들의 비합리적 요구에 대해서는 맥락을 살피고 이해해야 한다는 태도로 일관한 반면, 남성들에 대해서는 혐오의 누명을 즉각 씌우고 비난해온 사례가 쌓여왔다.
언론은 마치 남성이 당한 사례는 하나도 없었던 듯 여성의 피해사례만을 부각해 남성을 가해자로만 규정한다. 공정을 요구하는 청년남성들의 분노와 항의가 페미니즘과 페미 진영을 향하는 것은 이러한 차별과 불공정이 축적되어왔기 때문이다.
이를 파악하고 합리적 해결에 나서야 할 이들이 지식인들은 사회적 책무보다 이념가로서의 정체성에 더 몰두해 있다.
이들은 심판의 권위와 지위를 부여받은 채 실제로는 플레이어로 뛴다.
성별 갈등의 해결을 요원하게 하는 요소다.
다음 글에서는 이번 사태가 불거지게 된 핵심 개념이면서 홍성수, 나임윤경, 정희진, 이라영, 이나영, 진중권 등의 이념가들이 왜곡시키고 있는 혐오표현에 대해 다뤄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