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금지법 제정을 주장하는 대표학자인 숙명여대 홍성수 교수가 노키즈존을 차별의 사례로 들었다. 그가 제시한 근거는 차별금지법을 추진하는 진영의 논리체계를 보여준다.
이는 홍교수만의 논리가 아니므로 나는 이 글에서 홍교수가 대표하는 정체성정치 집단의 주장을 언급할 때 '이들', 혹은 '그들'과 같은 대명사로 지칭할 것임을 일러둔다.
이들의 주장을 분절해서 살펴보자.
1. "어린이를 못 들어오게 하는 것이 '흑인 출입금지'와 본질적으로 같은 차별이다. 그 이유는 당하는 사람에게 모멸감과 두려움을 주기 때문이다. 손님을 가려 받는 이유가 정체성과 연관돼 있을 때는 정신적 고통을 준다"
2. "소란스럽다는 이유로 출입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정체성’을 이유로 차별하는 것이다"
3. “식당에서 노란 옷 입은 사람을 못 들어오게 했을 때, 노란 옷 입은 사람이 억울할 수는 있겠지만 인간적인 모멸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4. "국가권력에 의한 차별은 현저하게 줄어든 반면, 사적 영역에서 차별은 더 많이 발생하고, 새로운 형태로 진화해서 나타나고 있다"
인종과 소란스러움은 본질적으로 다른 속성이다.
먼저 1과 2에 대해 살펴보자.
노키즈존과 흑인금지가 같은 차별이라는 논리는 아무런 논증이 없는 주장이다. 어린이 출입금지가 흑인 출입금지와 본질적으로 같은 차별이라는 주장에서 동일한 본질은 '정체성'을 이유로한 금지라는 것이다.
이들이 표현한 바에 따르면 이 사안에서 아동의 정체성은 '소란스럽다'는 생애주기별 행동특성을 말한다. 생애의 한 주기에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행동특성은 존재의 본질을 규명하는 정체성으로까지 규정하지 않는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요소가 아니라 해당 시기를 벗어나면 신체적 성숙과 사회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속성이기 때문이다.
반면 흑인의 경우 흑인이라는 인종적으로 고유한 속성은 일생동안 변하지 않는다. 흑인이라는 금지의 카테고리는 개별 흑인들이 가진 성별, 계급, 연령 등 특성을 무시할 뿐 아니라, 기질적으로 유순하고 문명사회의 교양인으로서 규범을 완벽하게 갖춘 사람이라 해도 인종적 정체성만을 이유로 금지를 당하는 것이다. 이는 개별인간이 어쩔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엄격하게 봐야 하는 차별이 있고, 그렇지 않은 차별이 있다. 인종, 국가, 성별 등에 대한 차별행위는 사회구성원들이 엄중하게 받아들인다. 개인의 노력으로 바꿀 수 없고,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요소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차별을 더 엄격하게 판단하기 시작한 것은 개별인간의 존엄을 최우선으로 삼는 헌법적 가치가 가장 심각하고 빈번하게 도전받은 역사 속에서 나온 응전의 결과물이다.
노키즈존의 경우 차별의 기준은 연령이다. 연령은 위 요소들처럼 엄격하게 다루는 표지가 아니다.
예를 들어 미성년자 음주, 흡연 금지와 같은 차별적인 대우는 연령의 변화에 따라 해제되는 것이라 헌법상 권리를 침해하는 차별행위로는 규정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홍성수 교수 등이 '연령'과 '흑인' 두 사례를 '정체성'이라는 개념으로 엮어 본질적으로 같은 차별이라 규정하는 것은 논리적 주장이 아니다.
오히려 서로 다른 속성을 같은 것으로 개념화해서 표면상 비슷해 보이도록 유도함으로써, 사람들의 합리적 사고체계를 교란하는 반지성적인 행위이다.
인간적 모멸감이라는 감정은 권리의 기준이 될 수 없다.
다음으로 3에 대해 살펴보자. 이들은 정체성에 따른 차별이 심각한 것은 인간적인 모멸감과 공포를 느끼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식당에서 노란옷 입은 사람을 금지하면 당사자가 억울할 수는 있어도 인간적인 모멸감을 느끼지 않지만, 아동금지는 인간적인 모멸감을 느끼기 때문에 다르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모멸감, 두려움, 고통, 억울함, 공포, 존엄과 같은 개념을 즐겨 사용하는데, 개별인간마다 차이를 가질 수밖에 없는 감정의 영역이며, 계량이 불가능하고, 사용자에 따라 정의도 제각각인 모호한 개념들이다.
그래서 억울한 건 넘길 수 있지만 모멸감은 차별이라 넘길 수 없다는 이들의 논리는 해괴하다. 노란옷 금지에 인간적 모멸감을 느끼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주장은 무엇을 근거로 하는가? 억울할 수는 있지만 모멸감은 느끼지 않는다는 주장은 무엇을 근거로 하는가? 억울함을 느끼는 건 차별이 아니지만 모멸감을 느끼면 차별이라는 주장은 무엇을 근거로 하는가? 억울함과 모멸감이라는 감정 중 무엇이 더 치명적이며 위해한 요소인가 하는 서열은 누가 정하며, 무엇을 근거로 하는가?
단지 노란옷을 입었다는 이유로 출입을 금하는 것은 노키즈존보다 더 비합리적이고 부당한 금지다. 부당한 취급을 당했을 때 개별 인간은 다양한 감정을 느낀다. 억울함, 불쾌함, 어이없음, 분노, 인간적 모멸감 등 무엇으로 표현되든 그것은 개별 인간의 주관적이고 고유한 느낌이다.
심지어 아무런 감정적 동요를 느끼지 않는 사람도 존재한다. 그러므로 홍성수 교수의 자의적인 감정기준은 애초 차별행위를 가름하는 기준으로 성립할 수 없다.
공포의 부풀리기도 문제다.
홍성수 교수는 아래와 같이 주장한다.
"출입을 거부당한 개인이나 특정 집단은 ‘다른 식당 어디를 가도 같은 대우를 받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게 된다. ‘노키즈존’이 특별히 많은 제주 등에서는 아이를 동반한 부부가 외출하기 전 식당·카페의 출입금지 여부를 확인하는 게 필수 과정이 됐다.
코로나 초기에는 국내에서 ‘중국인 출입 금지’ 등을 내건 식당도 있었는데, 인종이나 국적 등을 이유로 차별을 경험한 사람은 ‘다른 가게뿐 아니라 학교에서도 이런 일을 당하면 어쩌지’ ‘직장에서도 비슷한 일을 당하면 어쩌지’ 하는 공포를 느낀다. 자기 정체성 때문에 전전긍긍하며 스스로 자책하게 되고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한다”(홍성수)
'노키즈존-노심초사-중국인 출입금지-공포-전전긍긍-자책-극단적 선택'으로 이어지는 주장의 연결고리 안에 권리의 논증은 없다.
그저 감정적인 수사의 나열과 공포 부풀리기만을 활용한다. 흑인과 노키즈존이 본질적으로 같은 행위가 아니듯, 중국인 출입금지 또한 노키즈존과 같지 않다.
노키즈존에서 시작한 주장은 극단적 선택으로 마무리된다. 노키즈존 때문에 아이와 부모가 극단적 선택이라도 한단 말인가? 노키즈존이 지양되어야 할 문화라는 주장은 할 수 있으나, 과장된 공포를 덧대어 극단적 선택에 이르는 치명적인 차별행위라 선동하는 것은 그야말로 반지성적인 행위이다.
그럼에도 이들이 이러한 수사의 연결고리를 계속 쓰는 이유는 논리적 미숙함을 보완할 성실하고 치밀한 지적 노력 대신, 반지성적인 선동을 통한 패권전략이 더 쉽고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국가 차원의 차별금지가 아닌 사인 간의 행위통제권을 가지고자 하는 정체성정치 운동
마지막으로 4를 살펴보자.
이들은 "국가권력에 의한 차별은 현저하게 줄어든 반면, 사적 영역에서 차별은 더 많이 발생하고, 새로운 형태로 진화해서 나타나고 있다"고 말한다. 이들도 인정하듯 우리 헌법과 법률은 제도적 차별을 금지하도록 정립되어 있다.
그런데도 새로운 법을 원하는 것은 그들이 사적 영역의 차별, 진화한 형태의 차별이라고 규정하는 사안들에 대해 국가 수준의 통제 권력을 원하기 때문이다. 갈수록 진화하고 새롭게 나타나는 사적 영역의 차별은 무엇인지에 대한 규정은 누가 하는가? 무엇이 차별이고, 차별이 아닌지, 무엇이 심각한 차별이고 경미한 차별인지는 누가 판단하는가?
이들의 운동으로 인해 차별언어, 차별행위에 대한 규정은 점점 넓어지고 미세해진다. 그러나 어떤 차별은 용인하고 어떤 차별은 불관용할 것인가에 대한 판단에서 개개인의 가치관이나 특정한 진영의 주장은 기준이 될 수 없다.
무엇이 차별인지, 왜 차별인지, 누가 피해자인지를 합리적으로 논증하지 않고, 공포 부풀리기와 개념 왜곡하기를 이용해 자의적으로 규정한 후, 그러므로 우리의 주장만이 정당하다는 이들의 전개방식은 문명사회에서 지양되어야 하는 행위이다.
주관적 기대가 충족되지 못했을 때 느끼는 분노나 불행감과 같은 감정적 고통은 권리의 범위에 들어가지 않는다. 이를 권리의 범위에 넣기 시작하면 사회는 모든 사람의 다양한 주관적 고통을 해소해야 할 의무가 발생한다.
정체성정치 운동진영이 내세우는 것도 이 논리다.
이들은 제도적 차별 철폐를 넘어 여성, 이주민, 성소수자 -그리고 그들의 권리를 대리 주장하는 자신을 포함- 가 사회구성원들과 상호작용에서 어떠한 감정적 불편함도 느끼지 않는 사회를 요구한다.
이러한 법칙이 통용되는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을 끝없이 예민하게 만들어 권리를 청구하게 된다. 주관적 고통을 내세워 타인의 의사결정과 행위에 대한 지배권을 가지려 하고, 반대로 타인과 원만하게 교류하는 현명하고 단단한 사람일수록 권리범위가 축소되는 결과를 낳는다.
노키즈존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노키즈존은 출입을 금지한 장소의 기능 또는 안전 여부와 실질적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흑인 출입금지 사례보다는 30대 이상 출입을 금지하는 클럽의 사례와 유사하다.
이는 차별이 아니라는 의미와는 다르다.
장소의 기능이나 안전 여부와 실질적 관련이 있는 점에서는 같지만, 여성전용 업소나 청년전용 클럽처럼 특정 대상을 금지하거나 허용하는 사례는 노키즈존과 또 다른 면이 있다.
여성전용 업소는 목적 자체가 여성만을 대상으로 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클럽 역시 특정연령의 성인들이 모여 즐기는 플랫폼을 제공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준 외의 손님을 받으라고 하면 사업의 목적 자체가 망가진다.
반면 주로 식당이나 카페가 적용하는 노키즈존은 영업 행위에 성인만을 위한 배타적 플랫폼 제공이라는 목적이 없다. 음식과 음료를 제공하는 보편적 서비스에 접근 권한을 제한한 것은 앞의 경우들과 다르다.
2017년 노키즈존 업주를 고발한 사안에서 인권위는 노키즈존을 차별이라고 규정하면서 노키즈라는 전면적인 접근금지 대신 좀 더 적극적으로 방해 행위에 대한 조치를 공지하라고 권고했다.
차별비례의 원칙 가운데 ‘동일한 목적을 달성하는데 차별을 덜 하고도 가능한 다른 방법이 있는가?’를 고려해보라는 조치다.
(차별비례의 원칙과 노키즈존에 대한 헌법적 권리논증은 이선옥닷컴 "노키즈존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진짜 문제는?"과 필자의 저서 <단단한 개인> 4부 '헌법적 사고와 권리논증' 대목에 자세하게 서술해 두었다. 글쓴이 주)
인권위의 권고는 법적 구속력은 없으나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기능을 한다.
그러나 노키즈존에 대한 시민들의 지지 또한 만만치 않다. 누구나 지불한 비용만큼 쾌적한 환경에서 만족한 서비스를 받고자 하는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서로 불편을 참지 않는 사회가 될수록 권리의 충돌은 잦아질 수밖에 없다. 그럴수록 권리에 대한 논증과, 합리적이고 질서있는 사고체계를 고양하는 사회적 노력이 필요하다.
정체성정치 집단처럼 어떠한 사안을 권리의 논증 없이 차별이라고 즉시 규정해버리고, 이에 대한 반대 견해는 즉각 차별주의자나 혐오주의자로 비난하는 행위는 사회전체의 갈등과 반지성화를 촉진한다.
개념을 왜곡하고, 과장하고, 다른 것을 같은 것으로 한 바구니에 쓸어담은 후 그 중 가장 극단적인 것을 명분삼아 자신들의 목적을 관철하려는 운동방식 또한 지양되어야 한다. 원하는 바가 있으면 모든 것을 솔직하게 내어놓고 진지하게 토론하는 태도의 정착이 필요하다.
우리가 추구하는 제도에는 어떠한 쟁점이 존재하고, 반대하는 쪽에서는 어떠한 주장을 제기하고 있으며, 이에 대해 우리는 이러한 반박논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들이 투명하게 제공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각 집단의 견해는 주장이 아니라 권리논증을 통해 제시되어야 유효하다. 이러한 문화가 확립되면 사회 구성원들은 논쟁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즉자적인 연상작용이나 진영의 논리에 휘둘리지 않으면서 독립된 사고를 고양할 수 있고, 권리에 대한 체계적인 인식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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