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흔하게 갖는 오해는 원래 페미니즘은 옳고 페미니스트는 좋은 사람인데, 일부 극단적이고 급진적인 레디컬 페미니스트들이 문제라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이 왜 오해이고 그런 분류가 의미없는 일인지 설명하는 마지막 글로 ‘페미니스트의 모순 짚어보기 시리즈’를 마무리한다.
한국의 페미니스트 진영은 내부의 논쟁이나 갈등이 외부로 표출되는 걸 최대한 막아왔다.
갈등 상황이 노출된다면 누가 더 옳은지 판명난다 해도 결국 페미니즘 진영 전체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어떠한 이념집단이든 더 순정하고 강성인 부류와 상대적으로 온건한 부류가 있게 마련이다.
2015년부터 한국에 페미니즘 뉴웨이브라 칭할 정도로 바람이 불었고, 새롭게 페미니스트가 된 여성들은 대부분 레디컬 페미니즘을 받아들였다.
주로 온라인에서 활동하는 이들은 원래 대중들이 페미니즘이라 이해해왔던 남녀평등, 차별반대보다는 남성혐오, 남성도태, 여성우월주의를 앞세워 가파르게 성장했다.
주류 페미니즘 진영(강단 페미니스트, 여성단체)은 새롭게 부상한 극단적인 넷페미니스트(net-feminist)의 주장과 행동에 부정적이거나 우려를 표했다.
그러나 젊은 여성들이 급진주의에 열광하자 이 현상을 새롭게 평가하기 시작한다.
혜화역 시위, 강남역 추모, 메갈리아와 워마드 사이트 개설, 미러링 운동 등 넷페미니스트들은 온라인을 넘어 오프라인에서 응집력과 행동력을 보였다.
여성운동가들만의 운동에서 페미니즘을 내건 대중적 운동이 큰 성공을 보이자 주류 페미니스트 진영은 태도를 바꿔 이 행적을 한국 페미니즘史에 정식 등재하기에 이른다.
급진적이며 극단적이고, 남성혐오에 뿌리를 둔 페미니즘이 한국의 페미니즘 운동사에서 족보를 가지게 된 것이다.
초기 메갈리아에 우려를 보내던 강단의 페미니스트들은 아래와 같은 찬사를 바치며 태세를 전환한다.
“이들은 온라인을 통해 물리적 한계를 뛰어넘어 구조적 폭력현상을 중단시키는 실질적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윤김지영).
“메갈리안이 실험한 것은 쾌락의 언어와 농담의 에너지를 운동의 에너지로 전화시키는 것이었다.”(윤보라)
“메갈리아 만큼 대중적이고, 가시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성과를 끌어낸 곳은 없었다고 생각한다.”(손희정)
"메갈리아는 일베에 대항한 유일한 당사자."(정희진)
그러나 페미니즘 운동이 세를 가지게 되면서 페미니스트 사이의 격돌 또한 수면 위로 불거졌다.
그간 페미니즘 진영 내에 갈등의 역사가 없었던 건 아니다.
2002년 한겨레 기자 최보은이 촉발한 여성으로서 박근혜 대통령 지지 논란은 대표사례다.
당시 최보은의 주장은 페미니즘 진영에 큰 논쟁을 일으켰다.
남성은 성별 자체로 기득권 수호를 공고히 하는데, 여성은 독자적 이해관계보다 왜 (진보)진영의 이익을 먼저 고려하느냐는 주장은 그 상징으로 박근혜라는 독재자의 딸을 내세우는 바람에 더 도발적인 제기가 됐다.
당시 페미니즘은 진보진영의 자장 안에 있었으므로 여성계는 이런 주장에 당황한다.
아무리 생물학적 여성이라 해도 독재자의 딸을 지지할 수는 없지 않느냐는 견해가 주류였다.
당시의 논쟁은 어쨌든 진보진영 이론가들에게나 흥미 있는 주제였지, 현실 정치와 운동세력의 분화에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졌다.
페미니즘이 정치권력과 각종 운동에서 누리는 지위, 여성단체에 대한 막대한 지원금, 제도권 곳곳에 자리잡은 00위원회 등의 여성할당을 통한 사회적 지위 획득 등 직업과 사업 영역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현실권력’을 획득하면서 이들 사이의 갈등은 운동권 안의 노선싸움으로 끝나지 않는다.
누가 더 많은 대중을 확보해 권력의 영토를 확장할 수 있는가를 두고 싸우는 파워게임이 됐다.
주목할 점은 페미니스트들끼리 갈라져 “이건 페미니즘이 아니다”, “저들은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싸움에서 양쪽 모두 논리의 근거로 ‘가부장제’를 이용한다는 사실이다.
페미니즘끼리 대립하면 누가 옳은지 모른다
이러한 갈등은 주로 난민에 대한 취급이나 성소수자 문제에서 드러난다.
급진파는 무슬림 남성들의 강간 위협을 들어 난민 수용을 반대하고,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전환한 사람을 여성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들 주장의 요지는 남성은 여성이 될 수 없으며, 여성이 가진 약자 정체성은 어떤 사회경제적 취약함보다 본질적이며 영원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무리 난민 남성이 사회경제적 약자라 해도 그는 남성이므로 선진국 여성은 강간당할 수 있다는 논리다.
반면 교차성 페미니즘-한 사람의 사회적 정체성은 성별, 인종, 성정체성 등 다양한 요소가 상호 교차하여 구성된다는 논리-쪽에서는 소수자연대를 내세워 급진파의 주장을 반박한다.
여성, 성소수자, 비주류인종을 사회적 약자로 규정하고 이들의 권리보장을 주요 목표로 삼는 정체성 정치 운동(주로 진보좌파인권운동 진영)은 교차성 페미니즘과 함께 한다.
가부장제 필터에 대한 글에서 썼듯, 페미니즘이란 철학적인 논리체계를 가진 이념이기보다는 ‘여성의 진정한 이익을 위한 모든 것’이기 때문에 페미니스트끼리 의견이 부딪힐 때가 많다.
그러나 서로 ‘진정’한 여성의 이익을 주장하기 때문에 둘 중 누가 옳은지는 결론이 날 수 없다.
‘결론날 수 없음’, ‘옳고 그름을 구분할 수 없음’ 이것이 페미니즘의 본질이다.
페미니즘은 권리 논증이 아니라 모든 주장에 가부장제 필터를 적용해 정당화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급진파나 교차파 모두 페미니즘이라 주장하고 실제로 둘 다 페미니즘이다.
가부장제 필터가 있는 한 페미니즘 도덕은 다양하게 대립하며 그 분열상은 페미니즘이 존재하는 한 계속될 수밖에 없다.
-내가 원하는 일이 내 이익이다 vs 아니다.
그건 성상품화이며 종속적 행위다
-코르셋은 여성 스스로가 조일 때 문제 없다 vs 아니다.
스스로 원함이란 없다.
사회적 억압의 내면화다
-트렌스젠더는 여성이 아니다 vs 그녀가 여성이라고 느끼면 여성이다
-여성의 이익을 위해 성범죄 친고죄 폐지를 해야 한다 vs 여성의 이익을 위해 친고죄를 유지해야 한다
-성노동은 내 자의에 의한 것이며 여성의 이익이다 vs 아니다.
자의란 없다.
가부장제가 만든 억압이다
-여성도 남성과 똑같은 신체능력을 가지고 있다 vs 여성은 신체조건이 다르므르 체력시험 기준을 달리 적용해야 한다
-생물학적 성은 없다.
사회적으로 강제된 성이다 vs 남성은 생물학적으로 유해한 성범죄자다
이러한 대립된 견해가 페미니즘 안에서는 모순되지 않는다.
모두가 페미니즘이기 때문이다.
가부장제 하에서 여성의 진정한 이익은 '여성이 원하는 모든 것'이므로 페미니스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은 모두 옳다고 우기게 된다.
그 이념을 받아들이는 순간 억압받는 여성인 자신의 해방은 곧 정당한 운동이라는 공식이 성립한다.
백 명의 여성이 가부장제 철폐를 내세워 각자 자신이 원하는 걸 얻으려 하고(N개의 페미니즘), 모두가 나의 주장이야말로 진정한 것이라며 우긴다.
서로 우기는 사람들끼리의 싸움에는 답이 없는 법이다.
싸우다가 답이 없을 때 이들은 상대를 진정한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규정하고 자신이야말로 여성의 진정한 이익을 꿰뚫어 보는 ‘진성 페미니스트’임을 선언한다.
어떤 페미니스트는 주체적으로 자신의 매력을 뽐내고 멋진 남성과 데이트 하는 것이 자신에게 이익이라고 생각한다.
여성의 진정한 이익을 실현하고 있으므로 자신은 진성 페미니스트이다.
다른 페미니스트는 이런 행동을 반대하고 때론 비난한다.
낭만적 연애는 환상이며 여성의 진정한 이익이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외모를 치장하고 멋진 남성과 데이트를 하려는 욕망이야말로 가부장제가 주입한 것이며 이에 굴복한다면 가부장제는 더 강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두 페미니스트 모두 자신이야말로 여성의 진정한 이익을 실현하는 것이므로 이 둘의 충돌을 합리적으로 해결할 방법은 없다.
페미니즘은 애초 그러한 합의가 불가능한 이념이다.
그러므로 관찰자들이 혼란스러워하며 무엇이 진정한 페미니즘인지 가리는 일은 무의미하다.
그때그때 누가 현재 더 센 페미니스트인가만 남을 뿐이다.
지금까지 관찰한 바 급진파와 교차파의 대립에 정답이 존재하던가?
교차파는 트랜스젠더를 쫓아낸 급진파의 행동을 비난한다.
그러나 여성으로 태어나야만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성별환원론을 비판하는 교차파는 다른 방식의 성별환원론을 편다.
교차파는 유해한 남성성을 거론하며 남성의 유전자에 강간범의 DNA가 각인되었다 규정한 후, 남성을 향해 잠재적 강간범이 아님을 입증하라고 요구한다.
급진파가 말을 거칠게 하고 행동이 좀 더 강경하다는 차이가 있을 뿐 남성에 대한 본질적 혐오와 피해의식, 여성의 배타적인 이익 요구, 강간을 매개로 생물학적 성별 환원론 주장, 최종 가해자를 남성으로 규정하는 점에서 급진파와 교차파는 다르지 않다.
숙대 트랜스젠더 퇴출사건에서 급진파를 비난하던 대표적인 교차파 페미니스트.
페미진영의 모순을 지적하는 이에게 욕설을 하며 여자가 여자를 쫓아냈어도 모든 원인은 남성탓이라 주장한다.
또 한 가지 이들의 공통점은 여성이라는 성별집단 전체를 하나의 권리단위로 취급하는 것이다.
가부장체 필터가 여기에서도 핵심적으로 작동한다.
이 논리가 어떻게 개별여성들의 이익과 권리를 침해하는지 알아보자.
페미니즘이 빼앗은 여성의 일자리
사람은 누구나 다른 욕망을 가지고 있다.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한 개별 인간들의 욕망은 정의나 불의로 규정될 수 없으며, 타인이 옳고 그름을 판단할 영역이 아니다.
그런데 왜 페미니즘은 여성의 이익이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오히려 개별 여성이 하고 싶은 걸 억압할까? 가부장제 논리에서는 당연한 귀결이다.
가부장제는 여성집단 전체를 지배한다.
그러므로 여성 개인이 중요한 게 아니라 여성 집단 전체의 해방이 중요하다.
집단으로서 여성이 해방된다면 여성들 개인도 당연히 해방된다는 논리다.
페미니즘은 가부장제가 철폐된 상태를 향해 끊임없이 전진하는 실천이자 운동이므로 여성 개인이 자기의 이익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그러한 전진에 방해가 된다면 그 여성이 말하는 이익은 가부장제에 세뇌된 이익이 된다.
따라서 그런 착각에 빠진 여성의 이익을 분쇄하는 것은 곧 여성억압을 분쇄하는 것이다.
페미니스트가 성상품화, 성적 대상화라고 반대하는 직업의 예를 들어보자.
모터쇼의 레이싱 모델, 격투기 경기의 라운드 걸, 미인대회 참가자 등 외모의 어필이 중요한 직종의 여성들은 페미니스트에 의해 점차 일자리를 잃고 있다.(기사링크) 유지가 된다 해도 평범한 옷차림으로 바뀌거나 그 자리를 아이들과 남성이 대체하기도 한다.
섹시한 컨셉의 여성 아이돌은 성상품화라며 비난을 받고, 여자 아동은 성인의 섹시한 컨셉을 모방했다는 주장으로 CF가 삭제된다.
페미니스트들의 요구로 삭제된 광고
당사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스트 진영의 요구로 퇴출된 그리드걸
성노동 불법화를 반대하는 성노동자는 주류 페미니스트에게 공격받고 ‘자의’란 없는 피해자로 취급된다.
외모 꾸미기를 좋아하는 유튜버는 ‘코르셋을 조인다’며 여성들의 악플에 시달리고, 속옷을 만들어 판매하는 여성 사업가는 페미니스트의 사이버 테러로 계정이 정지당하기도 한다.
페미니스트의 악플을 박제한 여성유튜버
페미니스트는 자신들이 성상품화와 성적 대상화를 대표하는 직업이라고 규정한 레이싱걸들의 일자리를 없앴다.
그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자신의 일을 사랑하며, 자부심을 가진 여성들이 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이들은 여성이 스스로 원하는 것을 억압하고, 일자리를 잃게 만들며, 성노동의 경우 법과 제도를 통해 거래를 금지하도록 만든다.
그것이 페미니스트에게는 여성해방을 위한 길이다.
성적 코드를 내세운 업종에 종사하는 여성들은 페미니스트가 볼 때 가부장제에 굴종함으로써 전체 여성의 진정한 이익을 해치는 존재다.
설사 여성 개인이 “나는 나의 일이 좋고, 내가 원하는 일을 계속 하고싶다”고 주장한다 해도 이는 여성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아니다.
가부장제에 찌든 여성은 피해자이기 때문에 억압을 내면화해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논리다.
그러므로 가부장제에 의해 인지가 왜곡된 피해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서는 안 되며, 그러한 직종을 없애는 것이야말로 해당 여성들을 위하는 일이라는 궤변이 등장한다.
이처럼 페미니즘은 언제나 집단주의이며 여성 개인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지 않는다.
전체 여성 집단의 이익, 즉 페미니스트가 규정한 ‘가부장제 철폐’라는 목적을 실현하는 것만이 중요하다.
이러한 사고체계에서 여성 개인은 ‘여성의 진정한 이익’에 기여하는 데 필요한 로봇과 같은 존재다.
로봇이 되길 거부하는 여성은 가부장제에 찌들어 자기 이익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바보 또는 반동이 된다.
이들에게 페미니스트가 부여하는 호칭이 ‘명자(명예 자X)와 흉자(흉내 자X)’다.
로봇을 조종하는 조종석에 앉느냐, 로봇이 되어 조종되는 처지가 되느냐 하는 구도에서 페미니스트들은 다른 여성들을 조종하고 규정하는 지위에 오르기 위해 경주한다.
경주에서 쉽게 이기는 방법은 누가 남성에 대해 가장 과격한 비난을 퍼붓는가, 누가 남성에 대해 가장 과격한 통제를 요구하는가, 누가 여성의 이익 확보를 가장 많이 주장하는가이다.
오늘날 위 세 가지를 가장 많이 주장하는 급진파들은 진성 페미니스트의 조종칸에 앉아 여성들에게 명자와 흉자 낙인찍기에 여념이 없다.
그들의 극단적이고 선명한 말투에 일군의 여성들은 환호한다.
환호의 지분만큼 권력이 된다.
남성에 대한 비난과 통제, 여성만의 이익 주장에 과격한 것은 곧 가부장제 철폐의 선봉에 섰다는 의미이므로 이들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일하는 동안 남성들이 아니라 페미니스트 여성들에게 모욕을 당했다는 Ring Girl
일자리에서 쫓겨난 여성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는 이들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녀들이 입은 타격은 가부장제 철폐를 향한 길에 따르는 부수적 피해일 뿐, 내 알 바 아닌 것이다.
페미니스트들은 일정한 직업군에 대한 상징적 타격으로 목적을 달성하는가 하면, 일상적인 탐지활동으로 다음의 타깃을 겨냥해 반복된 타격을 가함으로써 세를 확장한다.
이런 운동에는 급진파와 교차파가 따로 없다.
페미니즘이 주력하는 것: 검열, 감시, 폭로, 처벌
급진파와 교차파 페미니스트 모두 언어와 문화적 표현에 대한 감시와 검열에 주력한다.
가부장제 필터를 장착하면 당연한 결론이다.
가부장제는 ‘여성의 진정한 이익’에 반하는 모든 것이므로 사소하게 보이는 미세 억압요소들을 찾아내는 일이야말로 가부장제 철폐의 과제다.
구성원들의 눈빛, 시선, 말투, 태도, 습관적 행동, 무의식적인 대응, 요리법, 식재료, 카메라의 앵글, 관공서의 가로수 정책, 정치인의 옷차림, 휴대폰의 크기, 성인커플 사이의 콘돔사용, 화장실 기호, 남자 둘이서 나누는 대화...
이 모든 것들이 모두 가부장제를 구성하는 요소다.
콘돔 거부자는 출마하지 말라는 한국성폭력상담소
은행나무 암나무 표시가 여성혐오라며 철거시킨 안양여성연대
페미니즘에서는 그 어떠한 것도 사소하지 않다.
페미니즘을 모른 채 가부장제에 찌든 무식한 대중들이 사소하다고 치부하는 그런 것들이 바로 가부장제의 핵심이다.
페미니스트가 웹툰, 영화, 소설, 인터넷 기사, 커뮤니티 활동, 노래, 뮤직비디오, 유튜브, SNS의 짧은 글, 단어, 속담, 호칭 등 한도 끝도 없이 모든 것들을 지치지 않고 검열하는 것은 페미니즘의 대의에 딱 들어맞는 일이다.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이 도덕의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페미니즘 대의를 방해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들은 어떤 일은 사적 영역으로 인정하고 어떤 일은 공적인 영역이니 같이 결정하자는 구별 자체를 가부장적으로 본다.
리얼돌에서 즉각 강간행위를 도출해내는 식이다.
내 방 안이라는 지극히 사적인 공간에서 하는 행위라는 항변은 통하지 않는다.
그러한 구별이야말로 가부장적인 짓을 계속 하고 싶어하는 남성들의 음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페미니즘에서는 사적인 행위가 없다.
“모든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며, “그것은 절대 사소하지 않다.”
리얼돌은 강간인형이라는 페미니스트와 이를 지지하는 한겨레의 보도
더구나 가부장제는 사적인 곳에서 가장 심하게 재생산되어 공고한 억압으로 작동한다.
'취향'이나 '자유'와 같은 개념은 가부장제 하에서 독립적인 개념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그러한 논리 하에 가부장제에 찌든 구성요소들을 하루빨리 철폐하기 위해 동원하는 빠르고 손쉬운 방법이 일상적인 감시와 검열이다.
그래서 페미니즘은 검열국가, 감시국가와 기꺼이 손을 잡는다.
물론 진정한 페미니스트 자신은 검열되지 않는다.
페미니스트들은 사회의 빅브라더가 되어 구성원들의 일상을 감시하고 통제한다.
자신 외에는 모두 검열하고 통제되어야 한다.
감시를 통해 적발된 사람은 즉각 폭로되고, 폭로한 후에는 검증 절차 없이 즉결처분한다.
폭로 자체가 이미 즉결처분이다.
적정절차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면 가부장제 부역자가 된다.
적정절차 위반으로 여성이 처벌되면 사법부를 향해 가부장제의 수호자이며 남성권력 자체라며 맹비난한다.
페미니즘은 틀렸다
페미니즘에 동의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가부장제 개념에 동의하는 것이다.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이 "가부장제 하에서"라는 관용구를 당연한 듯 사용하는 것은 가부장제 개념에 동의한다는 전제를 담고 있다.
그냥 ‘남녀평등은 좋은 것이니까 페미니즘은 좋은 것이다, 페미니즘이 좀 과도하게 나가는 게 문제다’라는 견해는 이러한 가부장제 필터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도출된 오류다.
그런 식으로 순진하게 이해하고 있다가 상식적인 의문을 던지면 페미니스트는 즉각 “페미니즘 공부 좀 하라”며 비난할 것이다.
가부장제 개념에 동의한다는 것은 진정한 페미니스트가 규정한 이익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모조리 쓸어버려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는 것이 된다.
당신이 "가부장제 하에서 남성 또한 여성과 다른 형태의 억압을 당한다"라고 말하며 가부장제가 온존함을 전제하는 순간, 가부장제 철폐를 위한 싸움에 동참해야 한다는 요구와, 어떻게 페미니즘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느냐는 페미니스트의 물음에 답할 의무가 생긴다.
전제를 인정하는 것부터 발을 잘못 디디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가부장제라는 억압은 페미니스트에 의해 끝없이 부풀려지고 무한 확장된다.
영원히 철폐될 수 없는 조건을 내세워 언제나 현존하는 개념으로 왜곡한다.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여성이 부당한 차별을 받았던 역사가 존재한다.
이를 인정하기 때문에 그에 맞섰던 페미니즘을 존중하려는 선의를 페미니스트는 교묘하게 이용한다.
가부장제는 그러한 도구로 그간 오남용되어 왔으며 이제 우리가 오히려 그러한 억압에서 벗어날 때이다.
가부장적 사회의 습속이 일부 남아있다 해도 이것이 가부장제가 온존한다는 근거는 될 수 없다.
오랜 기간 독재정권의 지배를 받은 탓에 누군가 권위적인 명령어를 남발한다 해도 우리는 이를 독재정권이 현존한다는 근거로 삼지 않는다.
민주적 시스템이 가동하는 사회에 아직 남아있는 개선요소일 뿐이다.
페미니스트가 가부장제의 억압이라 주장하는 여성에 대한 교묘한 문화적 차별은 동료시민들 사이에서 존중에 기반한 계몽을 통해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다.
페미니즘이 아니어도 가능할 뿐 아니라, 페미니즘이 개입하면 오히려 해결의 실마리를 꼰다.(여성혐오는 존재하지만 남성혐오는 존재할 수 없다는 류의 궤변들처럼) 인류가 사회라는 공동체를 구성하고 살아온 이래 언제나 그래왔듯 모순은 존재하고, 우리에게는 변화시켜야 할 당대의 현실적 문제들이 있을 뿐이다.
만악의 근원, 가부장제
'진정한 페미니즘'을 계속 찾으려는 당신에게
과격한 주장과 상대적으로 온건해 보이는 주장을 관전하다 그 순간 내가 더 동의하는 쪽에 손을 들어주면서 ‘이것이 진정한 페미니즘’이라고 결론을 내려온 경험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한 결론은 권리 논증을 통한 진지한 답이 아니라 당시 나의 취향에 따른 견해이므로 다른 사안에서는 또 진정한 페미니즘의 정의가 바뀌게 된다.
여기에서 혼란이 시작된다.
사람들은 왜 ‘진정한 페미니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할까? 잘못된 건 일부 나쁜 페미니스트들이지 원래 내가 알고 지지했던 페미니즘은 여전히 옳다라는 믿음을 고수하려 할까? 우리가 그동안 페미니즘과 성평등, 인권을 동일하게 여기는 착시상태에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페미니스트 진영의 전략이었다.
“차별에 반대하지요? 그렇다면 당신은 페미니스트입니다.”
“성평등을 지지하지요? 그렇다면 페미니스트입니다.”
“페미니즘은 인권의 다른 이름입니다.”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한 번 이상 들어봤을 말들이다.
페미니스트들은 늘상 이렇게 말해왔다.
성평등은 곧 페미니즘이고, 차별반대는 곧 페미니즘이니 이를 부인할 수 없지 않은가.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는 선언을 나는 여성의 이익만을 위해 일하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이 선언을 함으로써 페미니스트들에게는 청구권이 생겼고 정부에게는 갚아야 할 빚이 돼버렸다.
페미니스트 진영의 개념 후려치기와 뭉뚱그려 말하기 전략은 성공적이었다.
어떠한 가치에 대한 지지행위가 페미니스트의 주장과 겹쳤을 뿐이라는 우연적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면, 당시 옳다고 여겼던 자신의 판단을 오류라 인정해야 하는 불편한 상황에 빠지게 된다.
차별에 반대하는 나, 인권의식이 있는 나는 페미니즘을 떼어내도 여전히 성립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면 굳이 ‘진정한 페미니즘’에서 방법을 구할 필요 또한 사라진다.
그래서 페미니스트 진영은 더욱 성평등, 차별반대, 인권과 같은 가치들을 페미니즘이라는 이념에 접착시켜 따로 떼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가부장제 필터를 제대로 이해하면 ‘좋은 페미니즘’, ‘진정한 페미니즘’ 같은 건 없다는 정답을 도출해낼 수 있다.
이제 페미니즘은 틀렸다는 것, 우리는 개인으로도 사회적으로도 페미니스트에 진 빚이 없음을 깨달아야 할 때이다.
더이상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 '진정한 페미니즘'을 찾는 혼란에 빠질 필요는 없다.
좋은 페미니즘, 진정한 페미니즘 같은 것은 없다.
<페미니즘의 모순 짚어보기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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