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벌주의가 사회가 좋아졌다는 증거?(ft: 알쓸범잡)
이선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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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5 23:10 | 최종 수정 2024.03.06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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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범잡에서 범죄전문가들이 모여 강호순 등 연쇄살인범들에 대한 얘기를 나눈다.
이야기는 N번방과 디지털 성범죄로 이어졌고 가상화폐 등이 생기면서 범죄 인프라가 구축된 현실이 언급됐다. 이야기 도중 정재민 법무심의관(전 판사)은 말한다.
"사회의 분위기가 25년 전 제가 법대에 들어갔을 때와 되게 다르다. 그때는 억울하게 처벌받는 사람들이 많아서 공권력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하는 게 중요했다.
지금은 완전히 다르다. 엄벌주의가 됐다. 조두순 사건 이후로 양형이 강화됐다.
15년에서 30년으로 상한을 올리고 가중처벌도 25년에서 50년으로 되고"
이를 받은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가 이렇게 말한다.
"우리사회가 좋아졌다는 증거겠죠"
<유튜브채널 디글 :Diggle 캡처>
국가로부터 시민이 억울한 피해를 입지 않도록 공권력에 대한 감시와 견제를 강조하는 분위기에서, 강력범죄에 대해 엄벌주의로 변화한 것이 더 좋아진 것인가?
'엄벌주의에도 강력범죄 증가'와 같은 뉴스는 여전히 자주 볼 수 있다.
정재민 심의관은 강호순, 조두순과 같은 강력범죄가 널리 알려지면서 처벌의 기준이 달라지고 강화되었음을 지적한다. 명시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엄벌주의에 찬성한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사회에 강력범죄가 노출되면서 이를 엄벌하라는 여론이 들끓고 이러한 분위기가 엄벌주의로 이어진다는 진단을 말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뒤이어 편집된 김상욱 교수의 발언은 위험하고 부적절하다.
엄벌주의가 좋은 변화라면 사형제가 존재하고 실제 사형이 집행되는 국가, 신체에 직접 손상을 입히는 형벌이 존재하는 국가들이 더 좋은 사회일까? 냄비처럼 끓는 여론에 따라 형벌의 기준이 오락가락하는 여론재판이 기승을 부리는 사회일수록 엄벌주의가 강화된다.
공권력은 이러한 분위기를 기회삼아 시민의 지지라는 명분까지 얻으므로 손쉽게 강력한 형벌권을 획득한다. 요즘엔 특히 성범죄에 대한 엄벌주의가 강력범죄 가운데 가장 광폭행보를 보인다.
수사기관,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 모두 광폭행보다. 엄벌주의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로 나가면 가장 좋았겠지만, 거기까지는 아니라 해도 전문가들의 경험과 지식을 대중에게 전파하는 프로그램인지라 김상욱 교수와 같은 단순한 진단이 전문가의 권위를 빌어 사실로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우려된다. 해당 프로그램에도 나오듯 요즘 연쇄살인범이 뜸한 이유는 과거와 달리 수사기술이 과학적으로 발달해 빨리 잡기 때문이다.
우리 수사기관의 검거율은 매우 높다고 한다. 범죄를 예방하고 줄이는 길은 '반드시 잡힌다'는 공식이 확고하게 입증되고 인식되는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엄벌주의는 사회가 좋아졌다는 증거가 아니다.
오히려 통제받지 않는 강력한 공권력의 남용으로 시민들이 억울한 피해를 입던 25년전의 사회가 재연될 가능성이 높다. 더구나 독재권력이 아닌 시민들이 원해서 만들어진 강력한 공권력은, 국가라는 존재의 위험성을 가리는 요인이라 저항의 목소리가 먹히기도 어렵다. 이만큼 오는 데 걸린 수십 년의 노력이 불과 수년 사이에 손쉽게 무너지는 느낌이다. 이것은 좋은 변화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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