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판단을 기준으로 여성혐오라 생각되는 표현에 대해 유난히 민감한 비평가가 있다.
그는 대중적으로 유명한 스타들의 발언이나 표현에 대해 공개적 비난을 가해 입길에 오르내린다.
김희철씨와는 SNS에서 설전을 벌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김희철씨가 위근우 평론가의 SNS에 직접 단 댓글
최근 그는 개그맨이자 방송인인 유세윤씨의 부캐(부캐릭터를 일컫는 말로 여러 성격의 가상 캐릭터를 만들어 활동하는 게 유행이다) '까치블리'에 대해 날선 글을 올렸다.
그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까치블리 계정의 포스팅을 인용하며
"이게 재밌어요?"
라며 공격의 포문을 열었다.
당연히 질문이 아닌 공격이다.
자신도 궁금해서 물어본 건 아니라고 한다.
위근우 평론가가 개그맨 유세윤을 비난한 포스팅
위근우 평론가의 까치블리 비난글 전문
그는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 유세윤의 까치블리를 여성혐오라 비난한다.
과거 옹달샘 시절 이야기를 꺼내는 건 부적절한 듯 말하면서 결국 다시 끌어내 유세윤의 여성혐오 혐의를 굳힌다.
이들에게 여성혐오라는 '범죄'는 공소시효나 일사부재리의 원칙 같은 것이 적용되지 않는다.
여성혐오 비판에 특화된 비평가들의 특성 중 하나는 히스테릭함이다.
위 까치블리 비난은 개인의 SNS에 올린 것이라 덜 정제된 면이 있기는 하지만 미디어에 노출될 가능성을 충분히 알고 쓰는 글이다.
물론 그는 공적 글이라 해서 꼭 정제된 표현만을 쓰지는 않아왔다.
다수 언론에 보도된 위근우의 까치블리 비난
위근우의 칼럼.
'한국남자' 비난에는 굳이 정제된 표현을 하지 않는다.
그의 주장은 간단하다.
여성혐오 표현을 하지 말라는 것.
물론 할 수 있는 주장이다.
문제는 여성혐오의 기준이 순전히 비평가의 주관적 판단으로 결정된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이 불편함을 느끼면 즉시 여성혐오자로 낙인찍으며 사적, 공적 도구를 활용해 타인을 비난한다.
"나쁜 사상과 나쁜 도덕도 좋은 문학이 될 수 있다"(조지 오웰)
최근 <조지 오웰의 진실에 대하여>(2021.
필로소픽)라는 책이 출간됐다.
조지 오웰이 쓴 글들 중에서 '진실'에 대한 조각들을 모은 책이다.
조지 오웰이야 부연할 필요가 없는 작가이지만 이 책을 읽는 내내 전혀 시차가 느껴지지 않는 현실성에 다시한 번 놀라게 된다.
조지 오웰의 글을 모은 신간.
현재 우리사회 모습과 씽크로율 100퍼센트이다.
조지 오웰이 진실에 대하여 다룬 글들은 현재의 우리 모습과 놀랄만큼 똑같다.
'예술과 프로파간다는 결코 완벽하게 분리될 수 없다.'라고 쓴 장을 보자.
이 챕터는 그가 1941년에 쓴 문학비평 방송에서 발췌한 글이다.
톨스토이는 생전에 셰익스피어를 맹비난한 것으로도 알려졌다. 셰익스피어라는 최고의 대중적 작가에게 톨스토이는 '사상가'의 덕목을 요구하며 고담준론을 편다.
이에 대해 조지 오웰은 다음과 같이 비평한다.
톨스토이의 자리에 여혐감별 비평가를, 셰익스피어의 자리에 대중문화예술인들을 넣어보자.
"톨스토이는 셰익스피어를 향해 극렬한 공격을 감행했다.
(...)톨스토이의 주된 주장은 셰익스피어가 일관성 있는 철학도 없고, 고민할 가치가 있는 사상이나 이념도 없으며, 사회적 혹은 종교적 문제에 대한 관심도 없고, 등장인물이나 개연성에 대한 이해도 없는 하찮고 천박한 작가라는 것이다.
(...) 또한 당대의 부도덕한 권력정치와 불공정한 사회적 차별을 당연시한다고 힐난한다.
간단히 말해서 톨스토이는 셰익스피어가 경솔하고 칠칠치 못한 작가이자, 도덕관이 수상쩍은 자이며, 무엇보다도 '사상가'가 아니라고 지탄하는 것이다.
(...)톨스토이가 셰익스피어에 대해 거의 낱낱이 해명할 수 있어도, 해명할 수 없는 한 가지가 있는 듯하다.
바로 셰익스피어의 인기다.
(...) 톨스토이는 그럴 수 없겠지만, 수백만의 평범한 사람들이 높이 평가하는 셰익스피어에게는 어떤 좋은 점(어떤 오래가는 점)이 있다고 결론 내려야 한다.
개연성 없는 일이 그득한 희곡을 쓴 흐리멍텅한 사상가라는 사실이 드러나더라도 셰익스피어는 살아남을 수 있다.
설교로 꽃을 시들게 할 수 없듯이, 그런 방법으로 그에 대한 세평을 뒤집을 수는 없다. (...) 이것은 주제와 의미에만 초점을 맞추는 비평의 한계를 보여준다.
톨스토이는 셰익스피어를 시인이 아니라 사상가이자 교육자로 보면서 비평하며, 이러한 노선에 따라 손쉽게 그를 무너뜨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말한 것은 모조리 부적절하다.
셰익스피어는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은 것이다.
그의 명성뿐 아니라 그가 주는 즐거움도 예전과 다르지 않다.
물론 시인은 사상가이자 교육자여야 하지만, 분명 그 이상이기도 하다.
모든 작품은 프로파간다의 측면을 지니지만 책이나 희곡, 시, 혹은 그 밖의 작품이 오래가기 위해선, 그 도덕이나 의미에 의해 전형 영향받지 않는 어떤 나머지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오직 그 나머지만을 예술이라 부를 수 있다.
어떤 한계는 있겠지만, 나쁜 사상과 나쁜 도덕도 좋은 문학이 될 수 있다.
톨스토이 같은 위대한 인물조차 이를 반증할 수 없다면, 아무도 반증할 수 없으리라."
코미디언은 철학가나 도덕군자가 아니다.
어떤 코미디언은 정치인을 조롱하고 도덕군자인체 하는 사람들을 비틀어 풍자하기도 하지만 그건 일부일 뿐 코미디의 영역은 넓다.
순전히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만 웃음을 주거나, 재치있는 말장난과 입담, 자신에 대한 비하, 특정 요소에 대한 조롱, 유아화, 흉내내기, 바보스러움 모두 코미디의 소재고 대중은 각자의 취향에 따라 이를 소비한다.
어떠한 표현물을 좋아하는 이유에는 지적 만족감도 있고 말초적인 즐거움도 있다.
한국의 히스테릭한 비평가는 대중들의 호응이 못마땅하다.
그래서 글의 말미에서 이렇게 말한다.
"물론 그럼에도 저게 웃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좋아요가 수만에서 십만을 기록하는 거겠죠.
그럴수록 한 마디라도 거들어야겠습니다.
전 하나도 웃기기 않습니다."
비평가라기보다는 여성혐오에 좋아요를 누르는 십수만 대중의 반동적인 물결 앞에 홀로라도 맞서겠다는 결기를 품은 지사의 모습이다.
이러한 지사풍의 비평가가 주류인 요즘, 문화를 '평론'한다는 것 자체에 어떠한 긍정성이 있는지 회의가 든다.
창작자와 소비 대중의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이것은 혐오이므로 사회에 해롭다'는 '혐오감별사' 노릇이 비평의 자리를 대체한 상황을 볼때마다 이러한 행위가 사회의 문화적 성숙이나 시민들의 자유와 권리를 확대하는 데에 기여하지 않는다는 확신만 강화된다.
오히려 대중적 스타가 비평가보다 영화의 윤리적 가능성과 비평의 기능에 대한 고민이 깊어보이는 지경이다.
과거 배우 유아인이 위근우의 글에 쓴 댓글.
평론가보다 더 비평의 기능을 고민한다.
과거 이 비평가는 SNS를 잠정 중단하겠다며 이렇게 말했다.
"중요한 건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하는 말들이 실제보다 어느 의미로든 과잉해석 된다는 것이다.
몇 가지 민감한 이슈들에 목소리를 낸 것에 너무 과잉된 의미가 부여돼 내 존재 자체가 불필요한 잡음을 만드는 건 아닌지 고민하게 됐다.
우선은 입을 다물고 어떻게 내 의도를 오해 없이 전달할지 고민할 시간을 가지려 한다.”
사뭇 진지한 토로를 하며 '자신의 존재 자체가 불필요한 잡음을 만드는 건 아닌지'의 수준까지 고민한 사람이라 하기엔 고민 전과 후의 태도에 별반 차이가 보이지 않는다.
그 숙고와 자숙의 시간을 보내고 돌아와 여전히 "이게 재밌어요?" 라는 수준의 공격에 머물러 있음을 보면 안타까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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