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생 언어의 감별사: 신흥귀족의 탄생 정체성 정치는 위계를 타파하고 다양성을 구현하는 대신 도덕적 우월감으로 무장한 새로운 엘리트 집단을 만들어냈다.

대부분의 성인들은 사회적으로 합의된 보편 규범에 따라 행동하고 책임을 진다.

당사자가 부정적 감정에 대해 예의를 갖춰 표현하면 상대방은 자신의 의도를 설명한 후 이를 수용하거나 해명하는 것으로 해결한다. 그러나 관습적 해결이나 대항력을 가진 개인을 권장하지 않는 정체성 정치는 권력의 장에 신흥 귀족을 탄생시켰다. 정치적 올바름은 약자그룹에 대한 차별을 예민하게 감지하는 자들이 주도한다.

위생 언어의 예민한 감별사인 이들은 약자 그 자신으로부터 요구되지 않은 권리를 대행하는 것으로 실질적인 권력을 차지한다. 2020년 8월, 한국사회에 일어난 한 사건은 이러한 대행 권력의 지형을 드러낸다.

유명 인물로 분장한 졸업사진을 찍어 매년 화제가 된 의정부 고등학교 학생들이 인터넷 명사인 흑인그룹 ‘관짝소년단’의 춤을 패러디했다가 인종차별 논란에 휩싸였다.

가나 출신의 방송인 샘 오취리는 불쾌감을 표했다.

그는 흑인들 입장에서 매우 불쾌한 행동이라며 비판했다.

학생들과 학교측은 흑인을 비하하거나 혐오할 의도는 전혀 없었으며(당연하지 않은가? 흥겨운 밈(meme)을 단지 재연했을 뿐인데) 학생들의 풍자에는 어떠한 정치적 의도도 담겨있지 않음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러한 해명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비판자들은 의도는 중요하지 않을 뿐 아니라 결코 변명이 될 수 없으며, 인종차별행위를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한국사회의 후진 인권감수성을 개탄했다. 정작 패러디의 원본인 관짝소년단의 반응은 어땠을까? 이들은 SNS에 직접 의정부고의 패러디를 거론하며 졸업을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세계 각국에서 자신들을 패러디한 영상이 올라올 때마다 이들은 감사 인사를 해왔다.

같은 흑인이지만 샘 오취리와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인 것이다.

샘 오취리는 이 사안에서는 약자그룹 구성원임에도 피해의 당사자가 아닌 예민한 차별 감지자로 흑인권리의 대행자 역할을 했다.   관짝 소년단은 의정부고 학생들의 졸업을 축하했다.   정체성 정치에서 중요한 요소는 당사자의 의사다.

패러디의 원본인 흑인 당사자 관짝소년단은 전혀 불쾌해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흥겹게 화답했다.

이 패러디는 그들에게 차별, 혐오, 위협, 권리침해로 작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차별을 주장하고 나선 건 권리에 예민한 다른 흑인, 차별표현에 민감한 감별사들이었다. 당사자성과 결과론을 강조하던 PC주의자들은 개인이 아닌 ‘집단적 권리’라는 개념으로 혼란을 제압하려 한다.

페미니스트인 손희정 문화평론가는 ‘당사자의 말이 ‘모든 것’이라고 보기보다 합리적인 차원 안에서 어떤 윤리적 판단기준을 가질 것인가 논의해가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보통의 성인들 사이에서 ‘합리적인 차원의 윤리적 판단기준’은 특정된 상대방이 불쾌감을 느끼지 않는 표현은 문제삼지 않으며 이를 권리의 침해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어 친한 친구 사이에 멸칭을 사용하는 일은 흔하며 이는 그들 사이에 양해된 규칙이다.

그러나 PC주의 운동에서 권리의 대행자들은 당사자 사이의 상호작용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던 규칙을 집단적 차원의 강제규범으로 격상시킨다. 약자그룹의 개별 당사자가 동의하지 않는 경우에는 개인의 판단력을 인정하지 않는다.

집단적 정체성 속에서 권리 대행자들의 지침에 동의하지 않는 개인은 천덕꾸러기가 된다.

페미니즘을 거부하는 여성, 흑인의 약자성을 부인하는 흑인, 교조적 교리를 비판하는 무슬림은 신흥 귀족들에 의해 집단의 해악으로 낙인찍힌 후 정치적으로 추방당한다. 다양한 집단의 평화롭고 평등한 공존을 주장하는 정체성 정치가 확산될수록 다양성의 기본 단위가 되어야 할 ‘개인’이라는 존재는 지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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