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율'이라는 개념을 '출생률'이라는 개념으로 고쳐 말하는 것은, 크게 개념 사용의 정확성에 따른 정책 대응 면에서의 문제와, 이념집단이 자신들의 이념에 친화적인 환경을 만들기 위해 다른 이들의 언어생활의 자유에 압박을 가하는 면에서의 문제가 있다.
출생률이라는 용어사용의 문제를 논리적으로 전개하기 전에 먼저 전제해야 할 것은, 출생률이라는 용어 사용은 저출산 문제의 해결과 무관한 단지 이데올로기적 용어사용 놀음이라는 것이다.
각각의 문제에 대해 두 편에 걸쳐 게재한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보면 '신어(Newspeak)'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소설 속 빅브라더의 주요한 통치전략인 신어사전은 기존의 단어와 개념을 없애고 새로운 언어들을 만들어 보급하는 것이다.
지배권력이 신어를 보급하고 강제하는 이유는 언어지배전략을 통해 전체주의 사회를 완성하기 위해서다. 이데올로기는 언어에 반영되고 이는 생활습관과 사회질서에 영향을 끼쳐 결국 지배이념과 다른 사상과 생각들이 설자리를 없앤다. 언어지배전략은 사회에 대한 통제권을 쥐려하는 모든 이념집단들의 속성이다.
출산율을 출생률로 바꿔 부르자고 하는 운동에도 바로 이러한 이념집단의 속성이 작동한다. 그저 '더 정의로워 보이는 말을 사용하자'는 그들의 명분은 그러한 통제욕구를 가리려는 수사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출생률' 같은 말로 대체하자는 운동이 벌어지면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말하기가 싫어진다. 출산율이라는 단어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평소 그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출생률로 바꿔쓰기 운동이 벌어지면 그 사람은 출산율 저하에 대한 가치있는 아이디어가 있다해도 입을 닫게 된다. 왜냐하면 출산율이라는 말이 공론장에서 점차 퇴출되는 분위기에서는 출산율이라는 용어를 고수하는 데에 대한 압박을 먼저 느끼기 때문이다.
내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언어를 입에 올리는 치욕을 감수하고 적극적으로 견해를 표명할만큼 열정있는 사람은 흔하지 않다. 그가 내심의 양심을 지키려면 어떤 말이 옳으냐라는 논쟁을 먼저 거쳐야만 하고, 그 논쟁이 두렵거나 무의미해 참여하지 않는다면, 결과적으로 공론장에는 출생률을 써야 한다는 이념집단에 동조하는 사람들만 남게 된다.
이처럼 문제 해결을 위해 말을 바꾸는 운동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공론장에서 밀어내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출산율과 출생률은 상호교환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
요즘 '출산율'을 '출생률'로 고쳐 사용하는 인사들과 미디어가 점점 늘고 있다. '저출산 문제'는 '저출생 문제'로, '출산 지원 정책'은 '출생 지원 정책'으로 고쳐 이야기한다. 출산율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곳에 대체용어로 출생율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대체의 이유는 출산이라는 개념의 사용이 여성에 대한 부당한 압박을 내포하므로 출산 대신 출생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두 가지 면에서 개념 사용과 사고 전개의 중요한 원칙들을 위반한다.
첫째, 개념 사용의 정확성과 실천적 적실성을 위반한다.
둘째, 이데올로기적 이유로 용어대체를 강제하는 것은 담론의 자유를 해치며 이는 공적 언어생활에 관한 원칙을 위반한다.
먼저 개념사용의 정확성과 실천적 적실성을 보자.
두 용어는 전혀 다른 개념이므로 상호교환적으로 사용될 수 없다. 그럼에도 이를 상호교환적으로 스스로 사용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사용할 것을 주창하는 것은 부정확한 개념을 사용할 것을 주창하는 것이고, 이는 사회의 공적 담론을 부정확하게 만드는 일에 가담하는 것이다.
출생률은 특정 국가 등의 지역에서 1년 동안 태어난 인구를 전체 인구로 나눈 것을 말한다. 이를 2%, 4%와 같은 지표로 나타낼 수도 있고, 인구 1,000명당 몇 명이 태어났는지를 나타내는 조출생률로 나타낼 수도 있다.
반면 합계출산율은 가임기(15~49세) 여성 1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하는 평균 자녀수를 나타낸 것이다.
그렇다면 출산율을 출생률로 바꾸는 것은 단순한 용어의 대체로 별다른 문제가 아닌 것일까? 페미니스트 진영의 주장에 따르면 저출산은 성차별 용어라고 한다. 출산은 여성이 하는데 저출산 문제라고 하면 여성들에게 책임을 돌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들은 태어남 자체를 뜻하는 가치중립적 용어 '출생'으로 대체하는 것이 의미전달을 왜곡하지 않으면서 더 정의로운 행위이므로 '출생률'을 사용하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들의 주장은 어떤 점에서 틀렸는가?
(1) 출생률은 의미전달을 왜곡하지 않는다는 그들의 주장은 틀렸다.
출산율이 낮다고 할 상황에 출생률이 낮다고 하는 것은 왜곡이 될 수 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출생률은 높지만 출산율은 낮을 수 있고, 반대로 출산율은 높지만 출생률은 낮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전쟁이나 재해 등으로 남성과 노인인구가 타격을 입어 모수 인구가 줄면 상대적으로 출생률은 높게 측정될 수 있는데 이 경우 출산율은 보통이거나 낮을 수 있다.
또한 초고령화가 상당기간 진행되어 가임기 여성의 수가 적은 사회에서는 출산율이 매우 높다 하더라도 출생률은 현저히 낮을 수 있다. 이를테면 대한민국의 출산율이 지금과 같이 20년간 진행된다면, 20년 이후 출산율이 2.0정도로 높아지더라도 출생률은 오히려 지금보다 낮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2) 출산율 통계를 언급하면서 출생률 개념을 언급하는 것 자체로 틀렸다.
요즘 정치인들은 출생률 저하가 문제라고 쓰고, 일부 언론과 오피니언 리더들은 앞다투어 출산율 자리에 출생률을 쓴다. 합계출산율 통계인 0.72, 0.91 등을 언급하면서 이를 출생률이라고 하는 것은, 대학진학률 숫자를 언급하면서 수능시험 응시율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이 틀린 사용이다.
자신이 언급한 개념에 맞는 통계가 아닌 다른 개념의 통계를 이야기하는 자체가 틀린 것이며 이는 부정확한 사고를 유도한다.
(3) 출산 지원과 관련하여 타깃이 되는 대상은 저출산이지 저출생이 아니다.
저출생은 출산이라는 행위 이외의 여러 요인이 대등하게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수명연장기술이 발달해 가임기 여성 외 고령인구가 크게 늘면 출산율이 동일한 수준에서 유지되더라도 저출생이 초래된다.
이런 경우 출생률 통계지표가 하락하더라도 이는 출산지원 정책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또한 출생률 상승을 위해 수명연장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되지도 않는다.
한국사회에서 출산은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기르겠다는 인생의 설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적극적, 의식적 행위이다. 그러므로 고령인구의 증가처럼 의식적인 선택에 의한 요인이 아닌 것에서 영향을 받는 출생률을 타깃으로 한 정책은 출산율 하락에 대한 대응이 될 수 없다.
출산율 정책의 실천적 대상은 '아이를 낳고 기르는 선택에 영향을 끼치는 제반 사항'을 정확하게 포착해야 하는 것이므로 출생지원 정책이 아니라 출산지원 정책이어야 하는 것이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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