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배송 금지 논쟁에 불을 당긴 한동훈 장혜영 두 정치인의 토론
자정부터 새벽 5시까지 새벽시간에 이뤄지는 쿠팡 배송기사들의 야간 배송을 금지해야 한다는 민주노총의 제안이 사회적 논쟁을 촉발했다. 친노동계 성향의 진보좌파 시민들은 이 제안에 찬성하며 정부와 기업에 새벽 배송을 금지하라는 개인성명을 발표하는 중이다.
이들의 규제 정당화 주장은 다음 세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야간노동은 인간의 건강을 해치는 2급 발암물질에 해당한다,
둘째, 최근 택배노동자의 죽음이 급증하고 있다,
셋째, 생명보호는 배송기사의 자유의지나 소비자의 편리보다 중요하므로 강제적 규제가 정당화된다.
이러한 정당화 주장은 후견주의적 사고에 의해 가능하다. 후견주의는 상대방(국가, 타인)이 나의 이익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자유를 제한하거나 나를 대신해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후견주의적 사고는 항상 높은 곳에서 사회를 조망하고 조정하는 입장을 갖는다. 개인들에게 어떤 삶이 진정으로 '좋은' 삶인지, 어떠한 사회의 형태가 진정 바람직한지 자신들만이 정확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위험하며 문제적이다.
레이싱걸의 일자리를 없앤 페미니스트 진영의 후견주의
후견주의자들의 대표적인 사례는 페미니스트 진영이다. 여성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통제하거나 법적으로 무능력자 취급을 하는 태도와 제도를 비난해온 페미니스트들은 후견주의(Paternalism) 철폐를 핵심투쟁으로 삼아왔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레이싱걸의 일자리를 없애라고 요구하거나, 성매매 산업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 이들은 강력한 후견주의자가 된다. '여성의 진정한 이익'을 위해 레이싱걸 당사자와 성매매에 종사하는 당사자 여성들의 반대는 무시된다. 설사 여성 개인이 '나는 나의 일이 좋고, 내가 원하는 일을 계속 하고싶다'고 주장한다 해도 이는 여성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들만이 가부장제에 세뇌돼 제대로 판단할 수 없는 여성들을 대신해 이들의 진정한 이익을 판단할 수 있다.
레이싱걸, 그리드걸의 일자리를 빼앗은 페미니스트들이 내세운 논리는 그녀들은 제대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후견주의 사고체계에서 여성 개인은 ‘여성의 진정한 이익’에 기여하는 데 필요한 로봇과 같은 존재다. 로봇이 되길 거부하는 여성은 가부장제에 찌들어 자기 이익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바보 또는 반동이 된다. 성적 코드를 내세운 업종에 종사하는 여성들은 페미니스트가 볼 때 가부장제를 강화하므로 전체 여성의 진정한 이익을 해치는 존재다.
이처럼 여성의 이익이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여성운동이 여성의 판단력을 인정하지 않고 개별 여성의 일자리를 빼앗는 행위는 후견주의에 의해 정당화된다.
새벽 배송 금지론자들의 후견주의
새벽 배송 규제론자들의 논리도 같은 구조에 해당한다. 이들은 택배 노동자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초심야시간인 새벽 0시부터 5시까지는 야간 배송을 금지하고 새벽 5시부터 배송업무를 시작하라고 한다. 새벽 5시 노동을 시작하기 위해 초심야시간인 새벽 3시나 4시부터 움직여야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것인지, 자신들이 금지하는 시간에 일하는 다른 많은 영역의 심야노동과 산업영역은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제대로 답하지 않는다.
이러한 주장은 우선 당사자들과 함께 진지하게 숙고되지 못했다는 점, 특정 기업의 특정한 노동자들에게만 강제를 적용한다는 점에서 부당하다. 우연히 쿠팡에서 새벽 배송기사로 일하는 사람은, 권력을 가진 세력에게 자신의 소속기업이 타깃이 되었다는 그저 우연적인 이유로 생계의 위협을 받는 처지가 된다. 이들은 그러한 금지의 대상이 되어 피해를 입어야할 아무런 합당한 이유가 없다.
쿠팡노동조합은 즉각 야간배송 금지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후견주의자들의 논리는 언제나 집단주의적이며 개별 인간의 이익을 그대로 존중하지 않는다. 페미니스트에게 '가부장제 철폐'라는 목적이 있듯이, 이들에게는 '노동자의 해방'이라는 목적을 실현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중요하다. 노동자 개인이 "나는 나의 일이 좋고, 이러한 노동조건을 선택해서 이 일을 계속 하고 싶다"고 주장한다 해도 전체 노동자의 궁극적 이익을 위해 이를 진정한 자유와 선택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세상을 원하는 대로 바꾸기 위해 다른 사람이 이미 선택한 삶을 진정한 선택이 아니라고 부정하거나, 선택이라 해도 너에게 안 좋은 것이다 주장하며 바꿔버린다.
이들의 문제는 자신들의 후견주의적 사고와 온정적 간섭주의가 정의로운 자아에 의한 사회정의의 실현이라 확신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전체주의적 행위를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후견주의적 태도의 문제를 비판하면 정의로운 나를 부당하게 공격하는 반동이라거나, 인간의 생명 따위에는 관심없는 피도눈물도 없는 자본주의자로 몰아붙인다.
자유의 개념을 왜곡하는 후견주의
또한 이들은 '진정한 자유'의 개념을 내세워 새벽 배송 금지를 주장한다. 근본적으로 후견주의자들은 어떤게 나에게 좋은 삶인가를 선택할 자유의지를 개인에게서 박탈하면서 자유의 개념을 왜곡한다. 나는 나의 삶을 살고, 타인은 타인의 삶을 사는, 각자의 다른 삶의 형태를 이들은 참지 않는다.
자신의 정의로운 자아를 모든 사람들에게 뻗쳐두고, 다른 사람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사는 모습을 관철해내는 것을 성공적 삶이라고 생각하는 괴이한 삶의 관점을 지니고 있다. 이들은 자유를 각 개인들이 원하는 것을 선택하고 행하는 것이 아닌, 자신이 생각하는 삶의 패턴을 다른 사람의 삶에 도장 찍듯이 부과하면서 자유의 실천이라 주장한다.
자유의 개념을 자의적으로 주조하는 규제론 주장자
타인의 '좋은' 삶과, 사회적으로 '옮은' 삶을 규정하고 통제하는 행위, 사람들이 어떤 선택을 하든 관계없이 강제로 그 사람들의 삶을 주조하려는 행위는 부당하다. 이러한 자유관을 가진 사람들이 관료가 되고 권력자가 된다면 우리는 정의중독자들이 강제로 주조하는 좋은 사회를 위한 도구로서 삶을 살아가야 한다. 이러한 사고를 가진 후견주의자들이 힘을 가질 때, 온정적 간섭주의에 선을 긋지 못할 때, 그 사회는 전체주의화된다.
후견주의자들과 피씨주의자들은 왜 상당히 일치할까?
피씨주의자들은 권리의 대리자로 행세하면서 권력을 취득한다. 정체성 정치는 도덕적 우월감으로 무장한 새로운 엘리트 집단을 만들어냈다. 권리의 감별사인 이들은 약자 그 자신으로부터 요구되지 않은 권리를 대행하는 것으로 실질적인 권력을 차지한다.
피씨주의 운동에서 권리의 대행자들은 당사자 사이의 상호작용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던 규칙을 집단적 차원의 강제규범으로 격상시킨다. 약자그룹의 개별 당사자가 동의하지 않는 경우에는 개인의 판단력을 인정하지 않는다. 집단적 정체성 속에서 권리 대행자들의 지침에 동의하지 않는 개인은 천덕꾸러기가 된다.
새벽배송 규제에 반대하는 비노조 택배기사, 페미니즘을 거부하는 여성, 흑인의 약자성을 부인하는 흑인, 교조적 교리를 비판하는 무슬림은 신흥 귀족들(피씨주의자)에 의해 집단의 해악으로 낙인찍힌 후 정치적으로 추방당한다.
또한 후견주의자와 피씨주의자는 흔히 목적론자들이다. 이들은 수단의 적절성이나 과정의 합리성은 고려하지 않고 목적의 달성만을 중요하게 여긴다. 여기에서 목적은 자신들이 정당하다고 규정한 목적이다. 노동자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새벽배송기사의 생존권을 고려하지 않는다거나, 약자인 여성의 지위를 끌어올리기 위해 남성의 기본권적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가 이에 해당한다.
개별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 권리의 단위를 개인이 아닌 집단으로 두는 인식체계, 권리의 대리자로 권력을 획득하는 정치행위, 목적을 위해 수단의 적절성은 고려하지 않는 태도 등 후견주의자와 피씨주의자는 인식과 행위에서 상당한 유사성을 보인다.
매체 '슬로우 뉴스'에 보도된 국제노동기구 종사자의 글
새벽 배송 금지 논쟁이 촉발된 후 한 노동계 인사가 새벽 배송은 원칙적으로 없애야 하고, 없애려면 그냥 한 번에 해결해야 한다는 견해를 표명했다. 그의 견해는 앞서 후견주의와 전체주의적 사고가 왜 위험한지 원리 면에서 설명한 글의 정확한 예시에 해당한다.
그는 국제노동기구에서 일하는 엘리트 노동관료이다. 노동자의 편에서 그들의 이익에 복무하려는 그의 마음은 의심할 바 없는 진심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피씨주의자들의 말을 인용해야겠다. 그 마음이 진심이라 해도 그의 인식과 주장은 선량한 후견주의, 선량한 전체주의에 다름아니다.
슬로우뉴스에서 보도한 새벽 배송 금지 주장. 후견주의의 논리를 확인할 수 있다.(출처: 슬로우뉴스 화면캡처)
그의 주장을 살펴보자.
"택배 노동자는 장기적으로 자신의 건강을 고려해서 판단하기 어렵다. 지금 당장 하루하루가 급한 노동자가 많다. ... 하루하루가 급한 노동자는 이런 파국과 위험을 장기적으로 고려하기 어렵다."
그는 택배 노동자의 후견인으로 자신을 위치시킨다. 노동자는 자기 선택이 자신에게 이익인지 판단할 수 없으므로 내가 대신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사자가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간섭당하는 자를 위해서 강제적으로 간섭하는 것을 주장하는 후견주의의 전형이다. 후견주의는 어떠한 경우라도 부당한 개념은 아니나, 본질적으로 어떤 사람도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의 의지의 단순한 도구로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예외적인 정당성 조건을 통과하지 않는 한 부당하다. 택배 기사들의 경우는 후견인의 대리선택이 정당화될 수 없다.
가급적 한 번에 새벽 배송 금지를 관철하고자 하는 금지론자.(출처: 슬로우뉴스)
다음으로 개별적 개인을 집단을 위한 도구로 취급하는 전체주의적 사고와 목적론적 사고의 문제다. 그는 목적(자신이 규정한 정의로운 원칙)을 이루기 위해서는 과정의 합리성보다 강력한 권력의 행사를 주장한다.
"사회적 이익, 규제와 개입의 필요성: 그런데 노동자 개개인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시선으로 보자. 노동자의 건강은 사회적 자산이다. 그래서 제도로써 보호해야 한다. 아니면 결국 사회 전체의 손해가 되기 때문이다. ... 공적 이익(노동자 개인의 건강)이 결국 더 큰 이익이고, 훨씬 더 중요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대화’가 그래서 필요한 거다."
"그래서 이런 상황을 모두 고려하면, 단계적인 해법은 ‘더’ 어렵다. 한 번에 해야 한다. 제한 시간을 조금씩 늘려 간다면, 계속 그런 논의를 반복해야 한다. 지금은 원칙을 정확하게 세우는 게 중요하다. 가령, ‘새벽 배송은 원칙적으로 금지한다’...
자율적인 방식은 답이 안 나온다. 자율성과 개별성과 사회성이 충돌하는 상황을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자발성에 기초한 해법은 있을 수 없다. 가급적 한 번에 해결해야 한다. 물론 정말 정말 쉽지 않은 문제다."
공적 이익(노동자 개인의 건강)이 결국 더 큰 이익이고, 훨씬 더 중요한 가치라는 사고가 바로 전체주의적 사고다. 전체의 이익은 언제나 개인의 이익에 우선하고, 사회 전체에 좋은 것이라면 개인의 권리는 제한되어도 된다는 생각은 뜻밖에도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선량한 사람들에게서도 흔하게 발견 할 수 있다.
전체주의적 사고는 강력한 국가권력의 행사로 귀결되기 쉽다. 위 주장처럼 단계적 논의나 자율적 해결은 불가능하니 권력의 힘으로 한번에 해결해야 한다는 결론은 독재적 권력행사를 정당화한다. 좋은 사회를 위해 독재적 방식을 써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점점 어떠한 사회문제의 해결책으로 곧장 금지와 규제와 처벌을 먼저 떠올리고, 화끈하고 강력한 힘이 그러한 금지를 행사하는 사회가 된다.
또 하나, 가장 효율적인 방식을 가장 옳은 방식으로 여긴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택배기사들이 새벽노동을 선택하는 제1의 이유는 효율적인 작업조건 때문이다. '효율을 위해 목숨을 갈아넣는 선택'이라며 이를 금지하려는 이들이, 해결은 효율적인 강력한 한 번을 원한다. 단계적 논의, 자발성에 기초한 해법은 목적을 이루는데 비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그는 앞에서는 사회적 대화가 필요하다고 하고 마무리에서는 논의로는 해결될 수가 없다고 한다. 같은 글 안에서 앞의 주장과 뒤의 주장이 부딪힌다. 나는 이것이 글쓴이의 선량한 진심 속의 혼란이라고 생각한다.
가난이 아닌 가난한 사람들과 싸우는 정의
트럼프의 등장과 그가 주도하는 새로운 질서를 두고 우아한 위선의 시대가 가고 솔직한 야만의 시대가 왔다고 한다. 국가가 통금을 시행하던 시절을 야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밤의 경제활동을 일괄 없애고 싶어하고,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던 사람들이 어떤 주제는 숙의 민주주의를 하면 안 된다고 한다.
내 원칙은 옳고 정답은 정해져 있으니 단계적 논의나 자발성에 기초한 해법같은건 상정하지 말고, 한 번에 절대적 권력의 힘으로 해결해야 한다고도 주장한다. 이러한 행동은 우아한 위선과 솔직한 야만 중 어디에 해당할까?
쿠팡 택배기사의 93퍼센트가 새벽 배송 금지를 반대한다.
새벽 배송 논쟁이 확산된 후 택배사회적 대화기구 회의장에 비노조 택배기사조직의 대표 김슬기씨가 참여를 희망하며 찾아갔으나 거부당했다.
새벽 배송을 금지하자는 이들은 장기적으로 건강을 망치는 게 당장의 돈보다 훨씬 밑지는 장사이기 때문에 결국 손해보는 건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가난한 사람을 위한 선량하고 정의로운 행동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쿠팡의 배송기사들 대다수가 새벽배송 금지에 반대한다. 쿠팡의 노동조합은 즉각 반대성명을 발표했다. 새벽배송 금지에 반대하는 비노조 택배기사는 사회적 대화기구의 회의장에 참가를 원했으나 거부당했다. 사전에 합의되지 않은 방문이기는 하나 의견개진을 허용하기는 어렵다 해도 참관까지 막아야 했을까 아쉬운 대처다.
새벽배송이 금지되면 그 시간에 일하던 사람들은 심야노동을 멈추는 게 아니라 다른 일(어쩌면 더 열악할지도 모르는)을 찾아 계속 심야노동을 할 것이다. 지금 사회적 대화기구의 금지해법은 택배 기사들에게 희망보다는 오히려 고용에 대한 불안을 안겨주고 있다.
가난을 없애겠다는 사람들이 가난이 아닌 가난한 사람들과 싸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