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당과 장혜영 의원이 불러일으킨 성범죄 친고죄 논란을 다루면서 세번 째 글에서는 '여성의 진정한 이익'을 그때 그때 다르게 적용하는 페미니스트의 모순된 행동은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본질적 문제를 짚어보기로 했습니다.
세번 째 글입니다.
페미니즘이 말하는 가부장제 이론을 알면 이 모순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페미니스트들끼리 의견이 갈려도 누가 옳은지 결론을 내릴 수 없는 이유도 알게 됩니다.
“페미니스트들은 대체 왜 이런가요? 페미니즘은 원래 이런가요? 내가 알던 페미니즘이랑 다른 거 같아요.”
필자가 페미니즘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표현한 후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다. 페미니즘 자체는 좋은 개념인데 일부 극단적인 여성들 때문에 나쁘게 비친다고 생각한다.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누차 얘기하는데도 여전히 필자에게 긍정적인 의미에서 ‘진정한 페미니스트’라고 칭하는 분도 많다. 한 남성 지식인은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하는 내게 “왜 (페미니즘에는) 성해방론자들도 있는데 굳이 페미니스트라는 영예를 내려놓으려 하시느냐”고 물었다.
내가 주로 표현의 자유와 성적 영역에 대한 페미니스트 진영의 엄숙주의와 규제 요구, 엄벌주의를 비판하다보니 성적 자유를 중시한다고 여긴 것 같다.
진보적 남성지식인의 전형인 분이라 구구한 설명 대신 "저는 페미니즘을 영예라 여기지 않아요."라고 답했다.
잠시였지만 리버럴 페미니즘이라 불리던 페미니즘의 한 기류가 주류이던 시절도 있었다. 이들은 여성에게 남성과 똑같은 성적 문란함, 주체성, 당당함을 요구했다. 페미니즘은 여성이 ‘따먹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남자들을 따먹는 거라며 발상을 과감하게 전환하라 권했다.
그 때의 언니들은 '원나잇을 하고 수치스러워 하지 마라, 평판을 두려워하지 말고 더 문란해지고 자유로워져라, 당당하게 빗취(bitch)가 되라'고 했다. 포르노를 금지할 게 아니라 여성이 즐기는 포르노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고, 음란함을 이유로 성적 표현물을 규제하는 국가에 반대했으며, 성매매에 대해서도 성노동자 여성의 노동권을 어떻게 취급할지에 대해 논쟁했다.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여성들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진취적으로 고민하던 시대였다.
오늘날 여성들은 많은 영역에서 남성과 대등하거나 뛰어난 성과를 보이고, 소녀들은 원하는 모든 일에 도전할 수 있다는 걸 안다. 남성들은 성차별적인 생각과 행동은 법적으로 제재받고 사회적으로 비난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제도권에서는 성평등, 차별반대, 성폭력반대, 양성평등 등의 이름으로 페미니즘 이론에 입각한 교육을 실시한다.
그런데 페미니즘이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는 지금, 과연 여성들은 그 시절의 여성들보다 더 과감하고 주체적이며 자유로워졌는가? 남성들은 그 시절보다 더 억압적이고 권위적이며, 차별의식 또한 강해졌는가?
두 질문에 선뜻 그렇다고 답하기는 쉽지 않다. 페미니즘이 확산될수록 페미니즘에 대한 혼란과 반감 또한 비례해 늘고 있다. 페미니스트들은 페미니즘을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들에게마저 혼란을 준다.
정의당과 장혜영 의원이 성범죄 신고를 비난하며 공동체적 해법을 주창하는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어떤 규범을 바꾸라고 요구해 바꾸게 하고는 바뀐 규범에 대해 자신은 예외로 두면서 따를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성범죄에서 친고죄를 폐지시킨 세력이, 스스로 친고죄 논리를 부활시킨 행위를 하고는, 그럼에도 자신들의 행위는 기존 논리에 어긋나지 않으며 친고죄 폐지는 존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모순된 행동 말이다.
똑같은 행위를 두고 어떤 페미니스트는 여성의 이익을 해친다고 주장하고, 다른 페미니스트는 반대의 주장을 펴는 사례도 있다.
자신의 신체를 과시하는 당당한 여성에게 성상품화에 기여해 여성의 지위를 하락시킨다며 비난하는 다수의 페미니스트가 존재한다. 그러나 해당 여성은 내가 내 몸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세상이 여성에게 이익이라고 반박한다.
모순된 사례는 많다. 이런 모순은 본래 페미니즘이 내포한 핵심 이론에서 기인하기 때문에 특정한 사안에서만 예외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본래 상시적이며 광범위하게 포진해 있었는데 페미니즘 운동이 확산되고 힘을 발휘하면서 대중들에게 본질적 모순 또한 함께 드러나는 과정에 있다.
혼란과 질문이 많아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여성신문의 기사. 쩍벌남이 에티켓이 아닌 남성의 문제라고 본다.
하나하나 궁금증을 풀어보자.
페미니스트들은 왜 이러는가? 무엇이 진정한 페미니즘인가?
답은 '가부장제'에 있다. 페미니스트들의 모순된 주장은 페미니즘의 근간인 가부장제 이론에서 나온다. 가부장제 논리를 이해하면 이들이 페미니즘을 받아들이는 순간 왜 모순된 주장에 사로잡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가부장제란 무엇인가?
페미니즘에 대한 가장 광범위한 오해는 양성평등을 위한 사상이라거나, 양성평등을 목적으로 한 운동이라는 착각이다. 페미니즘을 지지하고 받아들이려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아는 페미니즘은 이런 게 아니라고 말하거나, 일부 급진적인 래디컬 페미니스트가 문제일 뿐 여전히 페미니즘은 평등을 위한 이념이라고 지지하는 사람들 말이다.
그렇지 않다.
페미니즘은 단순하게 양성평등이나 성평등, 차별철폐를 주장하는 이념이 아니라 정확하게는 가부장제 철폐가 곧 양성평등이라고 주장하는 이념이다.
가부장제라는 필터를 거치지 않고서는 양성평등은 완성되지 않으므로 페미니즘을 이해하려면 그들이 말하는 가부장제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이를 이해하면 페미니스트들의 모순된 행동을 해석할 수 있으며, 왜 ‘그런 모순을 견디면서 하는 게 페미니즘’이라는 조롱의 말이 광범위한 동의를 얻는지도 이해할 수 있다.
이 글은 대체 페미니스트는 왜 이러느냐며 그 모순을 납득하지 못하는 의문들에 대한 답이자, 현재 한국사회의 큰 혼란과 갈등에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념에 대한 분석이다.
가부장제라는 필터를 거쳐야 제대로 이해가 가능한 페미니즘
가부장제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페미니스트는 ‘남성 중심의 권력구조로 인해 여성이 억압된 사회’라는 정도의 답을 한다.
남성 중심이란 어떤 것이냐고 재차 묻는다면 정치, 경제, 문화, 사회, 가정 등 모든 영역에서 남성들이 주류이며 권력을 휘두르는 것이라는 정도의 답을 한다. 최대한 뭉뚱그려 말하기 전략이다. 세세하게 말하지 않음으로써 낮은 수준의 동의만 구해도 틀린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좀 더 정교한 답을 원하면 이렇게 대응한다.
“오늘날 정치인과 기업인들의 회의 장면을 봐, 여자는 없어! 가부장제라는 증거가 더 필요해?”
페미니스트가 주장하는 가부장제 사회라는 레토릭에 우리는 사회적으로 세뇌당한 상태다. 모든 지식인들은 설사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해도 “가부장제 사회에서”라는 말을 의심없이 전제하고 인용한다. 페미니즘은 이제 설득할 필요가 없을만큼 힘을 가졌기 때문에 세부논리를 펼 필요마저 없다.
페미니스트가 주장하는 가부장제 이론의 틀림과 모순에 대한 지적을 들을 수가 없으니 ‘한국은 가부장제 사회이므로 여성업악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주장을 온 사회가 되뇌이는 것이다.
사실 페미니즘에서 말하는 가부장제는 더 촘촘하다. 페미니즘의 근간인 가부장제 이론은 다음과 같다.
가부장제는 여성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사회적 제도와 구성원들의 일거수일투족 등 ‘모든 것’이다. 가부장제에는 국가 단위의 법과 경제조직, 문화뿐만 아니라 보통의 구성원들이 구사하는 표현, 사고, 행위, 표정, 몸짓, 걸음걸이까지 빠짐없이 포함된다.
이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작용해서 여성을 항구적인 종속상태로 몰아넣으며, 남성에게는 이 상태가 큰 이익이 된다. 쩍벌남은 왜 가부장제의 상징인가? 그는 옆자리에서 불편하게 몸을 쪼그려야 하는 다른 여성승객을 배려할 필요가 없다.
그가 그럴 수 있는 이유는 가부장제 하에서 남성은 그러한 권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다리를 벌리고 앉은 남성은 단순히 에티켓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가부장제를 상징하는 남성권력이다.
그러므로 가부장제 질서를 타파하려면 남자가 지하철에서 다리를 벌리고 앉지 못하도록 발모양을 규제해야 한다.
여성들이 빠지는 항구적인 종속상태란 물리적이고 경제적인 종속뿐 아니라 정신적인 종속까지 포함한다. 가부장제 하에 사는 여성들은 자신의 이익이 아닌 것을 자신의 이익으로 착각하게 되는데 이게 바로 정신적 종속상태다.
이런 상태에 빠진 여성은 오히려 여성들의 종속상태를 유지하는 데에 기여하게 되므로, 여성의 ‘진정한’ 이익을 가려내야 하며 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페미니스트이다.
오로지 여성의 관점에서, ‘여성의 진정한 이익’을 아는 자만이 현 상황을 비판할 수 있고, 이런 선각자만이 가부장제의 착취와 억압의 현실을 제대로 꿰뚫어 볼 수 있다. 그 선각자가 바로 페미니스트인 것이다. 이것이 페미니스트 역할론이 된다.
가부장제란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하는 여성이, ‘여성의 진정한 이익’이라고 규정하는 이익을 거스르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또한 가부장제 철폐 운동인 페미니즘은 바로 그 여성의 진정한 이익을 도모하는 '모든 것'이 된다.
가부장제 논리를 알고 있으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던 페미니스트의 모순된 행동과 주장이 비로소 이해가 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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