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블로그에서 옮겨온 글입니다. 작성: 2017.12.05 10:49 조회 수 79840)
'애호박 대첩', '애호박 게이트', '페미니스트 대첩', '유아인 대첩'. 이런 이름들로 지난 한 주가 뜨거웠다. 다수 대중이 유명 연예인 한 사람을 대상으로 공격성을 드러낸 사건은 이전에도 있었다.
이 사례가 남다른 건 인기를 먹고 사는 약점을 가진 배우가 대중과 맞서면서 일이 커졌고, 많은 진보논객들이 그를 향해 날카로운 글을 쏟아낸 점이다. 그들이 가세한 이유는 이번 사안이 '페미니즘'과 관련됐기 때문이다.
비평가들이 유아인에게 쏟아낸 글에 대해서는 각자 기준대로 판단할 일이다.
다만 이 글에서 말하고 싶은 내용은, 그들이 기이할 정도로 사소하게 취급하는 어떤 문제에 대해서다. 이번 사태에서 유아인은 글의 많은 부분을 '대중의 공격성과 폭력성,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조리돌림의 폐해'에 대해 말하고 있다.
함부로 말하고, 판단하고, 박제해서 조리돌리고, 모욕, 조롱, 인신공격도 마다하지 않는 다수대중의 공격을 받는 기분이 어떤지, 그들을 '폭도'로 규정할 만큼 강도 높은 발언을 하고 있는데, 이들은 페미니즘에 대해 '맨스플레인'을 나열할 뿐, 정작 유아인이 호소하고 있는 문제는 외면한다.
"상당수 여성 누리꾼들에게 비난과 조롱을 받은 건 사실이다.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누구든 자신에 대한 놀림, 비아냥, 인신공격 등을 당하면 기분이 나쁠 수 있다. 이름이 알려진 유명인일지라도 그에 대해 항의할 수도 있다...참 대단한 글을 썼다.",
"저 정도 말다툼은 SNS 유저들 사이 예사로 일어나는 데다 당사자로선 기분 상할 수 있는 표현이었다."
이처럼 아주 사소한 문제로 취급하거나 오히려 조롱하기도 한다.
유아인이 쓴 글의 한 대목을 보자.
"성별도 실체도 없는 익명들, 하지만 웹상에 쏟아져 눈앞에 펼쳐지는 언어라고 부를 수 없는 배설물들. 여론을 농단하고 온라인 생태계를 넘어서 사회를 교란하며 진짜 피해자와 사회적 약자들과 모든 인간의 존엄함, 그리고 숭고한 인권 운동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저 집단의 만행에 감정과 상식과 논리로 대응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입니까.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닌 '조직폭력배'와 싸우고 있습니다. (...) 이 논란은 '익명'의 집단이 '실명'의 개인에게 가하는 명백한 '폭력'입니다. 저들의 언어의 폭력성이 증명하죠. 그리고 저는 손잡이가 없는 칼날과 싸울 도리가 없습니다. 몇몇 온라인 커뮤니티를 거점 삼아 하루 종일 무리 지어 몰려다니며 쏟아내는 인신공격은 인권 운동이자 세상에 대한 피해자들의 분노로 조작되고 둔갑하여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유아인)
페미니스트들은 지금껏 여성들이 제기하는 문제에 대해 "뭘 그 정도 일을 가지고 그래?" 하는 무시와 싸워 왔다. "그것은 절대 사소하지 않다"고 외쳐온 역사가 여성운동의 중요한 내용이었다.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생각하는 남자 배우는 자신의 '이즘'에서라면 나올 수 없는 공격들에 혼란스러워한다.
이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데 진보 남성 페미니스트들은 그가 발언마다 주되게 얘기하고 있는 이 부분을 누락한다. 사소해 보여서일까? 자신들의 정의에 반하는 사람이 당해야 할 마땅한 처분이라고 여겨서? 혹은 그저 활자일 뿐이니 실제 인간에게 타격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해서일까? 피해가 좀 있더라도 유명 배우와 힘없는 대중의 대립에서는 강자인 그가 감수해야 할 문제라고 보는 걸까?
그럼 다른 질문을 던져보자.
당신은 수만 개의 화살을 혼자 맞아 보았는가?
대중의 공격을 받는다는 게 어떤 일인지 화살을 쏘는 자들은 맞는 자의 입장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내가 쏜 화살은 하나 뿐이니, 상대가 받는 화살의 총합이 수만 개임을 생각하지도 않는다. 가상의 공간에서 쏟아지는 공격이 인간의 실제 삶에 어떤 타격을 주고, 몸과 마음에 어떤 상흔을 남기는지 알지 못한다.
온라인에서 벌어지는 대중의 공격으로 삶이 파괴되는 사례는 늘어만 간다. 유명인, 권력자, 사회적 강자, 누구든 예외가 아니다. 온라인이 공동체의 가장 큰 소통 공간이 된 오늘, 이 문제는 누구에게도 결코 사소하지 않다.
"저스틴 사코가 있어요. 여기"
2013년 연말, 미국의 유명 광고회사 간부로 일하는 저스틴 사코(Justine Sacco)라는 여성이 남아공행 비행기에 탑승하기 전 짧은 트윗올 올린다.
"아프리카로 감. AIDS 안 걸렸으면 좋겠어. 농담이야. 나는 백인이거든!"
팔로워는 겨우 170명이었다.
이 트윗 하나가 그녀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팔로워를 많이 거느린 기자 샘 비들(Sam Biddle)이 그 트윗을 리트윗 했고, 삽시간에 그녀는 전 세계인 앞에 인종차별주의자가 되었다. 회사는 사과문을 썼지만 대중은 그녀의 해고를 요구했다. 저스틴 사코의 이름은 불과 열흘 사이에 122만 번이나 검색되었고, 끔찍한 비난에 시달렸다. 대중의 공격으로 결국 직장마저 잃었다.
샘은 자신의 블로그에 이 사건을 포스팅 하면서 정의를 수행했다고 믿었다. 6개월 후 그는 그녀의 이메일을 받았고, 만났다. 그는 "저스틴 사코가 있어요 여기."라는 메일 제목을 읽고 졸도할 뻔 했다.
사건이 일어난 지 1년이 되는 날, 샘은 Gawker에 저스틴을 향해 공개 사과문을 썼다.
"그래서 나는 사과했다. 나는 내가 그녀의 트윗을 포스팅 하고 그녀를 미디어의 잔혹함과 비참함의 세계로 텔레포트 시킨 것에 대하여 사과하였다. (그러면서도 나는 내가 미디어감시전사로서 비판 작업을 수행하였다는 아이같은 변명을 되뇌이면서 내가 실제로는 미안하지 않다고 나를 확신시키려고 하였다.) 나는 겨우겨우 내가 했던 일이 옳았다고 반쯤 확신시키고 있었는데, 그 때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당신이 인터넷에서 파괴한 누군가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경우가 얼마나 자주 있겠는가? 나는 멍해졌다."
대중에게 공격받은 사람들, 우리가 외면한 목소리
저스틴 사코가 겪은 일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정의의 이름으로, 혹은 약자의 이름으로 날마다 사람들은 누군가를 공격하고 삶을 타격한다. 어제 공격에 가담한 사람이 내일 공격의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공인이나 권력자라는 라벨이 붙으면 더 많은 화살을 받으면서도 동정의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
대중을 직접 상대해야 하는 유명인들은 자신의 직업 때문에 고통과 손해를 감수한다. 우리는 약자의 호소에 귀 기울이는 정의로운 자신의 모습에 만족한다. 강자와 권력자에게 화살을 쏘아대는 행위가 불평등한 사회의 균형을 잡는 일이라 착각하기도 한다.
자신의 가치관을 기준으로 잘못했다고 여기는 이들에 가해지는 불이익은 응당하게 여기고, 반대의 경우만 우려한다. 내로남불이 원칙이 되어가고, 린치의 방식에 대한 문제제기는 없이 대상만을 문제 삼는다. 약자의 편에 서 있다는 굳건한 믿음은 누군가의 삶을 해치면서도 그 고통의 크기를 가늠하지 못하게 한다. 진통제처럼 타인의 통증에 대한 감각을 마비시키고, 어떤 마약보다 강하게 흥분감을 고취시킨다.
나는 몇 년 동안 온라인에서 대중의 공격을 받은 사람들을 만나왔다. 시작은 나와 가까운 사람이 대상이 된 사건 때문이었다. 나 또한 불의하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기꺼이 온라인에서 목소리를 높였고, 내 이념에 어긋나는 사람의 이름을 거론해서 비난하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저스틴 사코를 만난 기자처럼, 구체적인 인간이 겪는 고통을 마주하기 전까지 나의 '정의'는 성찰 대상이 아니었다.
온라인 공격이 인간의 삶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알게 된 지금, 그가 누구든 대중에게 공격 받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힘겹다.
내가 만난 피해자들은 다양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대중을 직접 상대해야 하는 사람도 있고, 평범한 직장인도 있다. 가족이 공격받는 걸 지켜봐야 했거나 그 자신 이념에 몰두해 있던 이도 있다. 온라인 상의 공격이 이들에게 어떤 상흔을 남겼는지, 공격에 가담한 사람도, 방관자였던 사람도 알지 못한다.
세상은 불의라 낙인찍힌 사람의 이야기는 들으려 하지 않는다. 설사 그(녀)의 행위에 불의가 섞여 있다 해도 한 인간의 삶을 총체적으로 낙인찍는 건 섣부르고 지독한 폭력이다. 만일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기회가 있다면 이 폭주를 조금이라도 멈출 수 있을까? 낙관할 수는 없을지라도 그들의 간절한 증언, 고통을 전하는 생생한 언어를 조심스레 내어 놓는다. 부디 화살을 쏘아대기 전 이들의 목소리를 한 번 쯤은 들어주기 바란다.
약자의 편에 서 있다고 생각하는 당신이라면 더욱.
“화학 약품 가득한 가스실에 살고 있는 느낌이에요”
"악플러를 고소하고 싶은 생각이 많았어요. 잡는다고 뭐가 달라질까? 그들의 특성이 상대 안 하면 재미없어 하고, 언제든 물어뜯을 거리는 계속 생기니깐 빨리 다른 사건이 터져서 내 사건이 덮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사건을 겪고 난 후) 자는데 목이 졸리는 느낌이 들었어요. 몇 번 그러다가 숨이 안 쉬어질 정도로 목이 졸리는 느낌이 와서 아내가 걱정해서 병원에 갔더니 약을 주더라고요. 한 달쯤 그러다가 지나고 나니깐 또 그 증상이 왔어요. 스트레스가 쌓인 상태에서 해결이 안 되니깐 잠도 안 오고, 약을 다시 먹었어요. 항우울제, 불안장애약. 수면제. 더 이상 더 많이 먹으면 안 될 정도로 먹고 있어요." (예술가 A)
"나는 스스로 공인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공인이라는 사전적 의미에는 맞지 않아요.
연예인들이 누리는 호의처럼 팬이 있기 때문에 대중들한테 받는 유무형의 혜택이 있고 그 상태에 맞는 책임은 따른다고 생각하지만 공인의 책임을 지는 건 아니죠. 누군가에게 잘못했다면 그 사람한테 잘못에 맞는 책임을 지면 되는데, 내가 공인이어서 이런 취급을 받아도 된다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었어요. 내 경우는 몸으로 영향이 왔어요. 일단 숨을 못 쉬겠는 거예요. 흉부에 압박이 와서 날숨을 못 쉬었어요. 밖에 안 나가려 했고 어쩌다 나가게 되면 공황장애처럼 사람들 안 보이게 땅을 보고 걷고, 사람 많은 쪽을 피하려고 벽에 붙어 다녔어요. 심장이 내가 느껴질 만큼 너무 벌렁벌렁하고 계속 화가 나있는 느낌이 들었어요. 자살 생각도 했죠. 1주일 정도 지났을 때 4일 동안 밥을 아예 못 먹었어요." (예술가 B)
"광장에 끌려 나와서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한테 돌을 맞는데 나 뿐 아니라 가족들까지 끌려나온 느낌이었어요. 나는 아무리 아니라고 주장해도 아무도 내 말을 듣지 않고. 나를 비방하는 글을 보는 건 화학 약품 가득한 유독성 가스실에 살고 있는 느낌이에요. 정신이 피폐해지는 걸 느껴요. 날마다 아침 운동하고, 잊으려고 노력하고 근근이 버티고 있는 거지 이대로 가면 뇌암이 걸릴 거 같아요. 칭찬만 받고 살아도 어려운데 인간 말종, 인간 쓰레기 이런 말을 거의 매일 들으니까. 고소해서 경찰에 가도 그 얘기를 내 입으로 또 해야 돼요. 나를 욕하는 글만 봐도 고통이 오래 가는데 그런 글을 아예 끼고 사는데 그게 어떤 마음인지 몰라요. 분노와 억울함이 가시지 않아요. 약을 먹고 있어요. 불면증이랑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요. 견딜 수 없어서 밖에 나가면 외롭고 아무도 없어요. 그래서 다시 들어오면 또 가스실이에요." (직장인 C)
"제일 힘들었던 건 악플이었어요. 익명의 대중들이 성추행범, 파렴치범, 여성한테 폭력이나 일삼는 사람으로 매도하고 블로그에 악플이 삼 백 개 쯤 달렸어요. 너무 많은 사람들이 그러니까 그들은 절대 다수고 저는 혼자니까 어떻게 할 수가 없이 너무 막막했어요. 나중에 분위기가 좀 가라앉은 후에 악플러들한테 하나하나 댓글을 달았어요. 비공개로 돌렸더니 고소하겠다는 말을 접한 악플러들이 자기가 무슨 댓글을 썼는지 알려달라고 해요. 절반 정도는 사과를 보내왔어요. 제가 원했던 건 고소 이전에 면대 면 대화를 하고 사과를 받고 싶었어요. 익명의 대중들한테 자기가 그때 한 개인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자각을 하고, 가능하면 나한테 사과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나마 일반인들이 진보운동을 하는 사람들보다는 나았어요." (직장인 D)
"비난 글을 다 읽어봤어요. 그 때 마음은 짜증이 났어요. 진심으로 다 이해해보려는 마음으로 읽어봤고 노력했어요. 그러다가 000 죽어라, 빻은 한남충 이런 거 읽으면 의식이 흐려져요. 그걸 하루에 한 삼십 번 정도 왔다 갔다 하다 보니까 두통이 왔어요. 그래서 한의원에 가서 머리에 침을 맞았어요. 처음 (온라인 공격)사태가 나고 비난 글을 읽을 때는 이렇게까지 짜증이 나지는 않았어요. 그때는 그게 실수라고 생각 안했는데 지금은 이게 뭐지? 한 번 끝까지 해봐?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해요.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게 싫고 눈 마주치는 게 무서워요. 나를 설명해도 안 먹힐 거 같고, 설득하고 싶은 마음은 없고, 아군도 짜증났고. 내 편을 들어준다는 사람들이 상대한테 똑같이 모욕하고 조롱하는 태도도 싫었어요." (예술가 E)
"대중을 상대로 돌을 맞는 게 어느 정도의 벌인지를 그 사람들은 몰라요. 십만 명한테 비난을 받는다는 건 그게 저를 죽이지는 못할지라도 감당할 수 없는 비난이거든요. 인터넷 문화에 익숙했던 나도 이 정도로 힘들 줄은 몰랐어요. 글을 써서 수만 명한테 까이는 것과 내 삶을 두고 비난받는 건 달라요. 훨씬 더 심각했어요. 심지어 사적으로 알거나 나를 칭찬하고 좋아했던 사람들한테 당신은 왜 함께 비난하지 않느냐며 십자가 밟기를 시켰어요. 나와 연락하는 자체만으로 비난을 받는다고 했어요. 근대 사회라는 게 범죄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교화를 받고 사회에 재통합을 시켜야 하는데 네티즌들이 죄에 대해 양형 기준으로 삼은 것은 추방이에요. 단순히 내가 활동하는 영역에서의 추방이 아니라 인간관계까지 다 끊어버리는, 사실상 공동체 전체로부터의 추방을 원한다고밖에 볼 수 없어요. 공격의 총합은 엄청나게 큰데 개인은 자기 잘못이 없어요. 자기는 게시판에 글 하나 쓴 거니까." (작가 F)
"이 일이 생기고 나서 '어? 그거 다 끝난 거 아냐? 아무 일도 아니었잖아?'이런 얘길 많이 들어요. 끝났다니...당사자는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데...사람들은 그걸 몰라요. 당사자가 겪는 피해는 남들이 생각하는 거의 수백 배예요. 사회적인 재갈부터 시작해서 상처가 정말 상상 이상이라는 걸 느꼈어요. 가족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까지 고통이 큰 줄 몰랐을 겁니다. 저한테는 굉장한 교훈이었어요. 처음 온라인에서 매도당할 때 진짜 답답했던 게 살인자도 자기변론을 하는데 세상에...이 마녀사냥은 어떤 기회도 주어지지 않아요.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경우가 어디 있나요. 상대의 어떤 말도 듣지 않는 이 현상이 너무 기이했어요. 어떤 말을 하면 또 꼬투리를 잡히고, 말을 하면 할수록 더 나쁜 놈이 되어버리는 상황. 말 자체가 허용이 안 되는 걸 보면서 모순이라고 생각했어요." (피해자의 가족 G)
그래도 되는 사람은 없다
저널리스트 존 론슨(Jon Ronson)은 수 년 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저스틴 사코와 같은 온라인 공격의 피해자들을 만났다. 같은 일을 겪은 사람들은 매우 많았고 날마다 생겨났다. 사람들은 그들이 괜찮다고 생각하길 원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대중의 공격에 노출된 사람들은 누구라도 모두 심하게 상처받았다. 우울증, 불안감, 불면증에 시달리며 자살을 생각했다.
그는 말한다. 이것은 사회적 정의가 아니라고.
"우리가 법정 드라마를 볼 땐 주로 마음씨 착한 피고측 변호사에게 공감하곤 합니다. 하지만 권력을 가지는 순간 우린 교수형을 내리는 재판관처럼 굴죠. 권력은 순식간에 이동합니다.(...) 이제 권력을 남용한 사람을 찾지 못할 때 우리는 이상하게도 공허함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소셜미디어의 좋은 점은 소리 낼 수 없는 사람들에게 소리 낼 수 있게 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감시사회를 만들고 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다시 침묵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러지 맙시다."(Jon Ronson 테드강연: 온라인 상의 모욕이 통제를 벗어날 때 생기는 일. http://www.ted.com/talks/jon_ronson_what_happens_when_online_shaming_spirals_out_of_control?language=ko)
1975년 인혁당 사건으로 하재완이 사형 당했을 때 그의 막내는 겨우 4살이었다. 4살짜리 꼬마는 마을에서 이런 일을 겪어야 했다. 유아인이 여성들에게 빨갱이 딱지를 붙이는 폭력을 저지르고 있다는 남성 페미니스트의 글을 보고 생각난 일화다. 빨갱이라는 낙인만큼, 이런 낙인 또한 섣부르고 위험하다. 우리 근현대사에서 대표적인 조리돌림이었던 '빨갱이'와 그 낙인에 가담한 자들. 그 역사의 무게를 안다면 빨갱이라는 낙인도, 빨갱이 딱지를 붙이는 자라는 낙인도 쉽게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이 땅의 40대 이상은 그들의 죽음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1975년 인혁당 사건의 하재완이 사형 당했을 때 그의 막내는 4살이었다. 잘해야 여덟, 아홉 살 먹었을 동네 형아들은 4살짜리 꼬마를 빨갱이 새끼라고 새끼줄로 나무에 묶어놓고 사형시키는 놀이를 했다고 한다. 그 형아들은 무슨 죄인가? 그 시절을 산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간첩사건 발표 날 때 정말 큰일 날 뻔했다고, 저런 것들은 잡아 죽여야 한다고 박수 치지 않았던가? 마침 그 골목에 살지 않았을 뿐, 그 암울한 시절을 산 사람들은 모두 새끼줄 한 자락을 잡고 있었던 셈이다."('권재혁을 아십니까' <한겨레신문> 시론. 2009.11. 4. 한홍구)
오늘날 공동체의 마당은 온라인으로 바뀌었다. 시공간만 달라졌을 뿐 우리는 여전히 4살짜리 꼬마의 몸을 묶은 새끼줄 한 자락을 잡고 있다. 빨갱이니까 저런 것들은 잡아 죽여야 한다고 박수치는 사람들 중 하나가 내 모습이기도 하다. 훗날 우리는 이 암울한 풍경을 또 다시 부끄러움으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
집단적 린치는 동료 시민의 삶을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일생 동안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한다. 누구에게나 삶은 한 번 뿐이고 소중하다. 당신이 정의의 이름으로 행하는 그 린치가 부수고 있는 건, 정작 불의가 아니라 구체적 인간의 삶과 존엄이다.
저스틴 사코의 트윗을 세상에 알리면서 샘 비들은 그녀의 인생을 망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만일 당신이 포스팅 했던 사람들 모두와 얼굴을 맞대고 앉아 있게 된다면, 그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에 대해 다시 포스팅을 할 수 있겠느냐"고 그는 묻는다.
당신이 공격하는 대상이 눈앞에 있다면 조롱과 모욕의 언어를 들려줄 수 있겠는가?
부디 조리돌림에 동참하지 마라. 품격 있는 말, 예의 바른 태도, 합리적인 비판으로도 우리는 정의를 수행할 수 있다. 존중의 정신과 윤리성을 놓지 않으면서도 논쟁에 참여하고 책임을 물을 수 있다. 당신이 쏘는 화살은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공간에 있지만, 그 화살을 맞는 건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실제 인간이다. 그들도 당신처럼 맞으면 아프고, 공격하면 상처받는다. 당신의 생각보다 많이 아파한다.
온라인 공격, 이것은 사회 정의가 아니다. 그게 누구든 세상에 그래도 되는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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