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시 평생학습관 웹진 '와'에 기고한 글입니다.
“왜 여자아이들은 운동장을 갖지 못하지?”
지난 1월 6일 청와대 국민청원게시판에는 '초.중.고 학교 페미니즘 교육 의무화' 청원이 올랐다. 이 청원은 만료기간인 2월 5일 21만3,219명의 서명으로 마감됐다. 청와대는 20만 명 이상이 참여한 청원에는 답변을 하기로 한 방침에 따라 2월 27일 국민소통수석이 직접 답변을 했다. 답변의 요지는 이렇다.
"사회 전반의 성차별 인식과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며, 현행 양성평등 교육은 양적, 질적으로 부족하므로, 연내에 초중고 인권교육 실태를 조사하겠다.
2018년 교육부 예산 12억을 활용해 통합적 인권교육에 필요한 교수, 학습자료를 개발해서 보급하겠다."
윤영찬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이 청원에 답하고 있다.
페미니즘 교육 의무화 청원은 짧은 기간에 20만 명을 돌파했다. 다중계정을 동원해 숫자를 조작했다는 의혹이 일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다. 이 청원이 올라오게 된 계기는 혁신학교인 서울의 한 초등학교에서 일어난 페미니스트 교사의 발언 때문이었다.
해당 학교의 최모 교사는 한 인터넷 매체의 인터뷰에 등장해 “초등학교 운동장은 여자아이들의 것이 아니에요. 축구하고 노는 건 다 남자아이들이에요. 왜 여자아이들은 운동장을 갖지 못하지? 왜 저 뛰어노는 신체적인 활동의 장을 남자아이들이 다 전유해야 하지?” 라는 발언을 했다.
이 인터뷰가 화제가 되면서 반대 여론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해당 교사의 신상정보와 과거 발언들이 인터넷 커뮤니티에 퍼지면서 인신공격이 이어졌고, SNS 계정과 블로그의 발언을 캡처해 그녀가 남성혐오발언을 하고 있는 성차별 교사라는 근거들이 제기됐다. 수업시간에 퀴어축제 동영상을 보여주었다는 이유로 보수우익 성향의 학부모 단체는 항의 기자회견을 열어 파면을 요구했다.
최교사의 인터뷰 장면.
닷페이스 화면 캡처
여성계와 진보진영이 대응에 나섰다. 진보매체들은 이 사건을 일제히 보도했다. 페미니스트 교사와 혐오세력의 대결로 갈등구도를 분석한 후, 한 초등학교 페미니스트 교사가 일베 등 한국사회의 혐오세력의 마녀사냥식 공격을 당하고 있는 상황으로 보도했다. 전교조는 최교사의 페미니즘 교육 발언을 지지하고, 명백한 교권침해 상황이라며 보수단체와 네티즌을 상대로 법적 대응에 나서기도 했다.
민주당의 일부 의원과 여성단체, 진보정당들은 최교사 지지성명을 내고 교사 지지모임을 결성했다. 이후 인터넷을 중심으로 "#우리에게는 페미니즘 교사가 필요합니다" 해시태그 달기 운동이 벌어졌고, 급기야 청와대 청원에까지 오르게 된 것이다.
페미니즘 교육을 제도화하면 더 이상 이런 갈등은 벌어지지 않을까?
페미니즘의 현재
몇 달 동안 진행된 이 사건의 전개과정은 교육현장의 페미니즘 문제 뿐 아니라, 페미니즘을 대하는 우리사회의 현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 쪽에서는 페미니즘 교육을 제도화 할 것을 요구하고, 다른 쪽에서는 이를 반대한다.
사태의 원인에 대한 분석도 다르다.
한 쪽에서는 그동안 페미니즘 교육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 여기고
, 반대쪽에서는 페미니스트 교사가 자신의 이념을 학생들에게 일방적으로 주입하다 벌어진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 진보매체들과 최교사 지지진영은 이 사건의 대립구도를 인권+진보+성평등을 원하는 세력 대 보수+우익+반동성애 혐오세력의 대결로 규정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 이 사건은 그동안 이어온 성별대결의 연장에 있다
. 그것이 교육현장의 문제로까지 확대된 것일 뿐
, 본질적인 구도는 다르지 않다
. 이들의 분석과 진단은 맞는 것일까
? 페미니즘 교육을 제도화하면 더 이상 이런 갈등은 벌어지지 않을까
?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몇 가지 문제들을 넘어서야 한다.
몇 가지 문제들
1) 개념의 모호함과 선택적인 확장
“과연 페미니즘은 무엇인가?”
페미니즘을 둘러싼 갈등에는 이 질문이 늘 내포되어 있다. 몇 년 전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선언운동이 벌어졌을 때 일부 페미니스트는 이 선언에 동참하지 않는 남성들을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그들은 ‘페미니즘이 별다른 게 아니다, 성차별에 반대한다면 당신도 페미니스트’라고 주장하며 동참을 요구했다.
이러한 비난 방식은 위험하다.
예를 들어 우리는 타인에게 ‘나는 마르크스주의자임을 선언하라’고 종용하거나 의사에 반하는 운동에 소속되도록 하지 않는다. 어떤 ‘이즘’에 동의하는 일은 개인의 판단이며 양심과 사상의 자유 영역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스스로 페미니스트라 규정하지 않아도 성차별에 반대하고 성평등에 동의할 수 있다.
혐오 개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혐오라는 개념에 대해 아직 사회적 논의를 시작하지 못했다.그간 인식하지 못했던 개념을 정립하고 이해하도록 설득하는 과정 없이 혐오의 범위를 광범위하게 늘려놓으니 혐오자가 양산된다. 혐오를 없앤다며 혐오로 맞서니 혐오의 총량이 늘어 오히려 혐오사회가 되어버리는 아이러니가 생겼다.
페미니스트들의 주장 안에서도 페미니즘의 개념은 일관되지 않다. 사회적 약자인 여성의 권리신장을 위한 운동이라고 정의하다가, 넓고 보편적인 개념인 인권과 평등이 곧 페미니즘이라고 하기도 한다. 사안에 따라 개념이 이리저리 바뀌고 확장된다. 그러다보니 인권과 평등교육을 하는 것과 페미니즘 교육은 어떻게 다르며, 왜 별도의 페미니즘 교육이 필요한가? 라는 질문이 생긴다. 대중들은 개념부터 혼란스러워한다.
2) 이분법적 대립구도
최교사가 제기한 학교 운동장 사용 문제를 보자. 그녀는 “왜 여자아이들은 운동장을 갖지 못하지? 남자 아이들의 전유물이 되어야 하지?”라는 질문으로 접근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빼앗은 자와 빼앗긴 자,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이분법적 구도로 사안을 바라보는 데서 나오는 접근방식이다.
이 사건이 보도되었을 때 댓글에서 많이 등장했던 말도 "여자아이들은 운동장에서 노는 걸 싫어한다", "남자아이들 없는 여중과 여고 운동장도 비어있다"는 증언들이다. 학교 현장에서 여자 아이들의 운동장 사용을 금지하는 일은 없다. 해당 학교에서도 아이들 사이에 운동장 사용을 두고 갈등이 있었던 건 아니다.
여자아이들이 운동장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운동에 대한 선호가 남자아이들보다 적고, 다른 형태로 친구들과 어울리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은 이 또한 사회적인 학습의 결과라고 주장하지만, 어떤 행위의 선택이 사회적 문제라고 하려면 당사자들이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이 선택으로 인해 고통 받거나 부당하다고 여길 때 설득력을 갖는다.
운동장을 전유한 남자아이들 때문에 여자아이들이 고통 받는지, 남자아이들이 운동장을 독점하기 위해 여자아이들을 억압하는지, 무엇보다 여자아이들이 선호하지 않고, 차별의 결과로 인식하지 않는 것을 페미니즘의 논리에 따라 차별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이분법의 틀 안에 가두면 다른 의견과 해석의 여지가 봉쇄된다. 만일 성장과정에서 필요한 신체적 활동을 고르게 하도록 여자아이들의 운동장 사용을 유도하자는 관점으로 접근했다면
, 이 문제가 성별대결의 장에 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
여성문제 관련한 갈등 사안에서 반복되는 문제 중 하나는, 단일하지 않은 사람과 의견들을 단일한 갈등의 전선으로 묶어버리는 일이다. 여기에는 진보매체와 단체들의 책임이 크다. 어떤 사안이든 이를 둘러싼 다양한 견해가 있고, 이해관계에 따라 판단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갈등의 구도는 복합적이다.
그러나 진보매체들은 .... ‘정의로운 페미니스트 여교사 대 반동적인 혐오세력의 탄압’으로 단순한 전선을 만들었다. 비단 이 사건 뿐 아니라 그동안의 여성관련 이슈에서 계속 이 전선만을 부각시켜 왔다.
3) 대립주체의 단순화
여성문제 관련한 갈등 사안에서 반복되는 문제 중 하나는, 단일하지 않은 사람과 의견들을 단일한 갈등의 전선으로 묶어버리는 일이다. 여기에는 진보매체와 단체들의 책임이 크다. 어떤 사안이든 이를 둘러싼 다양한 견해가 있고, 이해관계에 따라 판단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갈등의 구도는 복합적이다.
그러나 진보매체들은 사안을 보도하면서 정작 아이들의 의견, 학부모들의 의견을 들어보려 하지 않았다. 남초 커뮤니티의 신상털이와 보수우익 단체들의 개입을 근거로 ‘정의로운 페미니스트 여교사 대 반동적인 혐오세력의 탄압’으로 단순한 전선을 만들었다. 비단 이 사건 뿐 아니라 그동안의 여성관련 이슈에서 계속 이 전선만을 부각시켜 왔다.
그렇다면 보수우익의 주장에는 반대하지만 학습권을 걱정하고 교사의 성대결적 관점에 문제를 제기한 해당 학교의 학부모는 혐오세력인가? 어린 학생들에게 교사의 이념을 주입하는 교육행위에 우려를 표하는 모든 대중이 성차별주의자여서 그럴까?
흑백논리 속으로 가두면 합리적인 문제제기가 들어설 자리는 없다. 단일한 전선으로 묶인 양 진영은 서로의 가장 극단적인 행위를 전면에 내세워 상대방을 악마화한다. 갈등은 해결되지 않고 증폭된다.
그릇된 진단이 불러온 성별 전쟁
한국사회에서 지금처럼 페미니즘이 화두가 된 일은 없었다. 그와 더불어 사상 유례없는 성별 전쟁 사회가 시작됐다. 누구도 원하지 않았고 예측하지 못했던 급속한 변화다. 세상의 절반을 위함으로 진정한 평등을 이루겠다는 선의가 이토록 집약된 상황인데, 왜 점점 성별갈등과 대립은 깊어질까? 이를 성평등한 사회를 거스르는 반동의 물결로 취급한들 해결될 수 있을까? 이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할 때다.
최교사의 파면을 요구하는 시위.
기독일보 기사.
나는 이 사안을 둘러싼 식자들의 진단과 주장이 무지하고 게으르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성별대결의 원인을 강자인 남성과 약자인 여성의 구도로 본다. 여성들이 그간 당해왔던 차별에 대해 저항하기 시작하니, 우월한 지위를 위협받은 남성들이 여성혐오와 같은 백래쉬(반동)로 이를 억압한다는 주장이다.
이들이 놓치고 있는 것은 지금 성별대결의 당사자가 청년 세대이며 연령대가 점점 내려가면서 확산되고 있는 점이다. 적어도 그간 성차별 구도의 수혜를 누려온 올드한 남성들이 반발한다면 기득권 세력의 역공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겠지만, 지금 청년세대는 남성으로서 기득권을 누려온 경험적 인식이 없다. 단지 남자라는 이유로 강자이며 기득권자라는 구도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근대적인 개념의 평등과 인권을 교육받았고, 페미니즘 세례를 받은 부모 아래서 특별히 차별로 인한 혜택을 받은 경험이 없는데도 자신을 기득권자라 하니 반발하는 것이다. 교육과 취업시장에서 여성과 동등하게 경쟁하고, 고용불안과 실업의 시대에 불안정한 노동자 신분인 자신들이 어째서 구조적 가해자이며 강자에 기득권자라는 말인가.
이 물음이 해소되지 않은 채 번번이 성차별주의자, 여성혐오자라는 낙인이 돌아오니 이들의 분노는 진짜 여성혐오로 향한다. 거기에 인터넷 커뮤니티 문화의 선정성과 주목경쟁까지 더해져 서로에 대한 극단적인 혐오가 온라인상에서 끝없이 표출된다. 이 전쟁을 어떻게 끝낼 수 있을까?
가치 지향이 다른 구성원들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상충하는 주장들에 대해 권리, 공정성, 자유, 이익, 고통, 행복,효율과 같은 개념들을 가지고 토론에 참여해야 한다. 다양한 권리주체들의 주장을 경청한 후, 권리의 논증과정을 거쳐 자신의 판단에 탄탄한 논리적 근거를 갖도록 하는 교육이 필요하다.
사유의 힘을 가진 '단단한 개인'
교육의 목적은 동등한 학습기회를 제공하고 아이들이 행복하고 올바르게 성장하도록 해서 궁극적으로는 민주사회의 시민을 길러내는 일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갈등은 필수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갈등상황을 접한다. 사회적으로 충돌하는 사안들을 보면서 나는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 지 혼란스럽다. 그 과정에서 꼭 필요한 게 사유하는 힘이다.
원론적인 이야기일 수밖에 없지만 빠르면서 해결 가능한 다른 방법이 없다. 다시 기본권부터, 인권의 개념,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 갈등을 대하는 민주시민의 태도를 가르치고 배우는 수밖에.
가치 지향이 다른 구성원들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상충하는 주장들에 대해 권리, 공정성, 자유, 이익, 고통, 행복, 효율과 같은 개념들을 가지고 토론에 참여해야 한다. 다양한 권리주체들의 주장을 경청한 후, 권리의 논증과정을 거쳐 자신의 판단에 탄탄한 근거를 갖도록 하는 교육이 필요하다.
그런 사유의 결과로 페미니즘을 자신의 이즘으로 선택하는 것과, 이미 편이 나뉜 대립구도에서 내가 속한 진영의 주장으로 페미니즘을 흡수하는 것은 다르다.
다시 기본권부터, 사유하는 힘을 기르는 교육이 필요하다.
더불어 꼭 필요한 것 중 하나가 대결을 부추기는 언론의 보도행태를 비판하는 일이다.
오늘날 성별전쟁에는 진보매체들의 책임이 크다. 공론의 장을 열기보다 흑과 백, 강자와 약자, 선과 악, 니편과 내편으로 진영논리에 갇히도록 만들어 갈등을 증폭시켰다. 지속적으로 문제 제기하고 책임지도록 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 또한 사유하는 개인들이 해야 하는 일이다.
단단한 개인들의 총합이 결국 민주사회를 지탱하는 힘이다. 이들이 중심을 잡고 설 때 비로소 성별 갈등을 넘어, 누구도 배제하지 않으면서 모두를 위해 진보하는, 그런 세상도 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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