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한 이념을 공유하는 집단은 그러하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어떤 식으로든 두드러진 경향성을 갖는다. 이념의 영향과 집단의 압박이 작용한 결과이다. 그런데 이들이 공통되게 보이는 경향성을 근거로 문제제기를 하면 꼭 따라오는 반론이 있다.
"그건 일부의 사례일 뿐이니 일반화하지 말라"
페미니스트들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비판을 받을 때면 소수의 사례를 일반화하지 말라, 내가 아는 페미니스트 중에는 그런 사람이 없다고 주장한다.
<까칠남녀>라는 프로그램에서 남성 출연자가 데이트비용을 남성들이 주로 부담하는 것의 불합리성을 지적하자 페미니스트 여성은 "그런 여성들만 만나보셨느냐, 내 주변에는 없다"는 말로 반박을 한다.
이는 의도적으로 상대의 발언을 오도하여 문제제기의 본질을 흐리는 전술이며 논리적이지도 않다. 상대방은 자신의 경험을 근거로 주제를 잡은 게 아니라 사회적 현상으로 존재하는 경향성을 논하고 있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 진영이 '일반화하지 말라'는 논리로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에 대한 비판을 방어하는 것은 반지성적일 뿐 아니라 행위에 책임을 회피하는 비윤리적인 태도이기도 하다. 나는 이것이 페미니즘이라는 이념의 본질적 속성이라고 생각한다. 이념을 공유하는 집단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속성은 해당 이념이 그러한 행동양태를 강화하는 쪽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근거가 된다.
페미니즘에 따르면
여성은 차별받는 존재이며,
차별로 인해 경제적으로 열악한 지위에 있으므로,
남성이 데이트 비용을 감당해온 문화는 이러한 가부장적 질서의 산물이기 때문에,
여성의 잘못은 아니며 여성이 책임질 일도 아니다,
여성은 남성보다 30퍼센트 이상 월급을 덜 받으므로,
남성이 데이트비용을 내는 것은 당연하며,
호감을 얻고 싶은 쪽에서 비용을 지불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이치다,
또한 여성은 데이트를 위한 꾸밈노동에 비용을 지불하고 있다.
고 주장한다.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지 않는 여성들도 이 논리를 대부분 받아들인다. 이러한 논리를 받아들이면 자신이 데이트비용을 지불하지 않는 것에 대한 공적 합리화가 되고 책임에서 자유로워지기 때문에 여성에게 이익이다.
페미니즘이라는 이념이 해악인 이유는 이처럼 성인 여성들에게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속성을 강화하도록 유도하기 때문이다.
경제학자 박지호 교수는 페미니즘을 '감사에 반대하는 사상'이라고 명명한 바가 있는데 상당히 적절한 분석이라고 생각한다.
페미니즘의 논리를 받아들인 여성들은 기존의 관습과 문화가 모두 가부장제의 산물이며 여성을 억압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데이트비용을 부담하는 남성, 가족을 부양해온 가장, 국가안보에 헌신하는 남성들에 대한 사회적 존경과 감사를 악습으로 여긴다.
페미니즘의 논리에 따르면, 남성들의 데이트비용 전담은 우월적 지위를 이어가려는 비용지출이므로 감사할 일이 아니고, 가족을 부양하는 가장의 노력 또한 가부장 지위를 공고히 하려는 남성집단의 의도이므로 감사할 일이 아니고, 국방의 의무를 전담하는 것 또한 군복무를 통해 여성차별 지배구조를 유지하려는 남성들이 지불하는 차별비용이기 때문에 감사할 일이 아니게 된다.
이들은 감사할 일이 아니라는 주장을 넘어 심지어 감사를 반대하고 방해한다. 스타벅스에서 휴가나온 군인을 위해 이벤트를 하자 여성에 대한 차별이라며 반대해 행사를 취소시키고, 군인에게 감사의 위문편지 쓰는 것을 위안부 문화라며 비난한다.
여성 커뮤니티에서는 자신의 아버지를 벌레에 비유하며 헐뜯는 글을 쉽게 볼 수 있고, 데이트비용이 부담된다고 호소하거나 데이트통장을 제안하는 남성에 대한 증오수준의 분노가 일상적으로 공유된다. 남성의 헌신에 대해 감사하는 종류의 글이 올라오면 여성억압 질서를 강화하는 데에 복무한다며 비난의 댓글이 달린다.
이들이 모두 페미니스트는 아닐지라도 젊은 여성들의 남성관에 페미니즘 논리가 상당히 잠식되어 있음은 쉽게 감지할 수 있다. 페미니즘을 받아들이면 여성에 대한 연대의식이나 공감은 늘어날지 몰라도 동시대를 살아가는 남성에 대한 연대의식은 사라지고 감사에 인색하거나 반대하는 사람이 된다.
위 까칠남녀에 출연한 페미니스트들은 자신 주변에 그런 여자는 없다면서도 데이트비용을 남성이 불균형하게 지불하는 문화에 대해서는 여성의 책임을 부인한다. 얼마나 많은 여성이 더치페이를 감당할 수 있겠느냐며 바로 전 일반화하지 말라던 자신의 주장과 달리 여성 일반이 더치페이를 감당할 수 없다고 항변한다. 더치페이는 데이트비용 문제의 답이 아니라는 것이다.
데이트비용을 남성에게만 전가하는 여성은 소수일 뿐이니 일반화하지 말라는 페미니스의 주장은 사실일까? 우리사회의 문화는 데이트비용을 동등하게 부담하는 쪽으로 바뀌었을까?
현실을 보자. 연인관계인 남성과 여성의 임금격차는 다 다르다. 맞선 시장에 나온 남성과 여성 사이 소득과 자산의 격차 또한 다 다르다. 맞선 시장은 오히려 비슷한 조건으로 매칭이 되기 때문에 격차가 적다.
그러나 저녁식사 비용을 지불하는 것은 여전히 대부분 남성이다. 소개팅을 하면 남자가 식사비용을, 여자는 커피를 사는 게 일반적이다. 데이트통장을 만들어 공동적립하는 식으로 변화의 조짐이 있긴 하지만 여전히 데이트비용은 남자가 더 많이 부담한다. 이는 소득이라는 현실적 조건보다 문화적 압력에서 기인한 현상이다.
결혼도 마찬가지다. 젊은 여성과 남성에게 결혼을 하지 않는 이유를 물으면 여성은 남성의 경제력을 문제삼고, 남성은 자신의 경제력을 문제삼는다. 즉 둘 다 남성이 문제인 것이다.
남성들은 자신이 돈이 없으니 결혼을 '못한다'고 하고, 여성들은 남성이 돈이 없으니 결혼을 '안한다'고 한다. 아무리 여성이 주체적이 되고 경제활동을 하는 세상이 되었다고 해도 미혼 여성이 배우자를 고를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여전히 상대 남성의 경제력이다.
남자는 집을, 여자는 혼수를 담당하던 기존 규칙은 부동산 폭등과 청년들의 어려운 경제상황 때문에 형편껏 함께 부담하는 추세로 바뀌고 있지만, 여전히 남자가 더 많은 결혼비용을 책임지는 문화는 공고하다.
결혼과 출산의 키워드가 남성에게 있다는 주장에 대해 페미니스트 진영은 여성혐오라고 비난하지만 이러한 문화적, 현실적 근거에서 도출된 주장이지 여성에 대한 혐오가 아니다.
자신이 경제적으로 가정을 책임질 능력이 안된다는 이유로 결혼을 주저하는 여성보다, 자신을 부양하고 가정경제를 책임질 남자가 아니면 결혼을 안하는 여성이 많고, 남성들은 이를 잘 알기 때문에 경제력이 없으면 결혼을 포기한다.
남성들이 결혼과 연애를 포기하는 것은 이러한 성별 역할에 대한 문화적 압박이 여전히 공고하기 때문이다. 혼인관계 안에서의 출산비율이 절대적인 사회에서 이러한 현실을 도외시한 출산장려 정책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과거에도 이러한 문화가 존재했는데 왜 지금에 와서 남성들이 더 연애와 결혼을 포기하는 걸까?
서로에 대한 존중과 사랑의 문화가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과거의 남녀문화는 여러 현실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연애를 하고 함께 삶을 개척하려던 애정에 기반한 협동의 정신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그러한 문화는 점차 사라지고 젊은 남녀 사이에 증오와 적대의 문화가 자리를 잡았다.
책임감과 호의에 기반한 지불을 더이상 감당하지 않는 남성이 늘어나고, 남성의 지불을 고마움이 아닌 당연한 의무로 여기거나 감사에 반대하는 여자들에 대해 더이상 남성들이 호감을 느끼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여성들 또한 동등한 지불에서 동등한 지위가 나온다는 인식이 늘고 있지만 그 동등한 지위에 대한 인식은 연애나 결혼으로 이어지는 애정적 협동관계보다는 개인적 삶의 태도로 자리하고 만다.
나는 이러한 문화적 변화에 페미니즘이 상당한 기여를 했으며, 그 기여의 하나가 여성들에게 피해의식을 심어주고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인간상을 권장한 페미니즘의 논리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페미니스트들은 더치페이를 감당할 능력이 있는 여성이 얼마나 되겠느냐고 한다. 젊은 남성들 또한 마찬가지다. 물가는 오르고, 임금은 여전히 낮은데 취업은 어렵다. 집값은 천정부지로 뛰었다. 소비영역은 넓어지고 취향 또한 상향 평준화된 세상에서 데이트비용을 오롯이 감당하면서 결혼을 위한 경제력까지 갖추기에 젊은 남성들의 삶은 버겁다.
그런데 여전히 가부장제 논리를 펴면서 남성을 기득권자라 주장하는 페미니스트들의 논리가 일반 여성들에게 파고들면서 남녀관계는 악화됐다. 남성들에게 데이트비용을 전가하는 여성의 이기적인 태도와 불합리한 관습을 지적하면 일부 여성의 문제로 일축하려 한다.
페미니스트에게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태도와 주장의 문제에 대해 지적하면 그건 일부 페미니스트의 문제일 뿐이니 일반화하지 말라고 한다. 만일 어떠한 문제적 행동도 페미니스트 개인의 특성일 뿐 이념집단의 일반적 속성일 수 없다면, 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비판은 어떤 경우에도 불가능해진다.
페미니스트 진영은 일반화의 오류를 방어전략으로 삼아 비판을 받을 때면 책임 없는 개인으로 사라졌다가, 성과와 보상이 주어질 때는 페미니스트라는 집단적 인격체로 등장해 공을 챙기는 행위를 반복해왔다.
이들의 활약으로 권리를 보장받는 측면에서 여성의 지위는 매우 높아졌지만, 책임을 감당하는 측면에서 남성의 지위는 여전히 열악하다. 그 간극에서 오는 갈등이 계속 사회문제로 이어지며 젊은세대에서는 성별갈등이 1위를 차지하는 문제적 상황이 된 것이다.
이처럼 오늘날 한국사회의 젊은 남녀 사이에 자리잡은 적대와 갈등의 문화에 페미니스트들의 기여는 매우 크며 이는 래디컬이든 온건 페미니스트이건 같다. 일례로 스타벅스의 군장병 감사이벤트에 대해 급진페미니스트 워마드와 강단페미니스트 이나영 교수 모두 여성차별이라며 반대했다.
남성에 대한 증오와 적대적 행동을 일부 극단적 페미니스트의 문제라며 일반화하지 말라는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은 틀렸다.
이는 일반화의 오류가 아니라 '여성은 언제나 피해자이고 약자이며 기득권 남성에게 억압당하므로 보상을 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페미니즘이라는 이념 자체가 남녀의 문화에 끼친 영향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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